214화. 불사의 신의 사도 (4)
호진은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은 게 있다.
어릴 적 꿈꾸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 따윈 존재하지 않다는 걸.
그렇기에 하얀 가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제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죽이며 이곳까지 왔는지 당신은 모릅니다.”
하얀 가면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슬픔.
그동안 억눌러 왔을 감정들이 그의 목소리와 몸을 통해 비집고 흘러나왔다.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
호진의 말에 게일은 떨던 몸을 뚝 멈췄다.
차갑고 차가운 냉기가 주변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혔다.
“그렇습니까.”
짤막하게 말을 뱉은 게일은 호진을 향해 한발 내디뎠다.
이야기는 더 필요 없다는 듯이.
그때, 호진은 말했다.
“희생 없인 대업을 이룰 수 없다고? 그렇다면 네가 더 희생하면 되잖아.”
게일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호진을 바라봤다.
그러나 호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그것이 죄든 고통이든, 네가 선택한 일을 이루기 위해선 네가 짊어지면 된다. 누구도 남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가능하고말고.”
호진의 고개가 짧고 단호하게 끄덕였다.
오로지 그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확언이다.
그걸 느꼈기에 게일은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쉽진 않겠지. 늘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걸 희생해야 하겠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미약하지만 돌아온 호진의 격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순수하게 쌓아 올린 격이 푸르게 타오르며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자기 손에 든 칼 한 자루로 전부 감당하는 게 ‘검의 교단’ 아니었냐고.”
손에 들린 검이 작게 흔들리며 우웅 소리를 냈다.
그 검명을 들으며 게일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최초로 검을 쥐었던 그날의 기억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검신을 쫓으며 검을 익혀나가던 그 날들을.
뼈가 부서지고 피가 터지며 쌓아 올린 희생 끝에 손에 쥐었던 것들은 분명 정순하고 고귀한 것이었다.
마치 눈앞의 사내가 지닌 격처럼.
하지만 지금 자신이 지닌 힘은 어떤가.
무엇이 자신의 것이고 무엇이 다른 이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혼탁한 기운이 몸 전체에 퍼져 있었다.
배신하고 빼앗으며 빌붙어 얻어낸 힘들이 마치 오물처럼 더럽게 느껴졌다.
게일은 문뜩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루 뒤에 군대와 함께 다시 오죠.”
“왜지?”
호진의 물음에도 게일은 이미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일종의 자비랄까요?”
호진만큼은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다면 자신이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일이 놀리듯이 말했음에도 호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맙게 받지.”
“쯧, 재미없으시긴. 진짜로 고민해 보십시오.”
호진의 반응에 게일은 김이 샜다는 듯 답하고 곧장 북쪽을 향해 사라졌다.
“…….”
적막만이 남은 전장.
호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이 끝나고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
아주 잠시지만.
***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진은 기서가 내민 따듯한 스프가 담긴 컵을 받아들었다.
─후룩
흔하디흔한 양송이 스프였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며 지치고 차갑게 식은 몸을 따듯하게 덥혀줬다.
음식이 몸에 들어가자 곧장 몸에 힘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참,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난 인간이군.’
호진은 피식 웃으며 옆에 선 기서에게 물었다.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게…….”
호진의 물음에 기서는 망설이며 옆에 앉은 도훈을 힐끗거렸다.
“……?”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기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미들급 골렘 T형 100기 중 절반 이상이 손실되었습니다. A형은 거의 전멸. 타이탄은 파일럿을 잃었으며 헌터들도 12명이 죽고 34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투입된 감시단 30명은 전멸했습니다.”
기서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적막을 깬 것은 도훈이었다.
“……그런가. 알려줘서 고맙다.”
─스륵
도훈은 기대어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호진이 걱정스레 묻자 도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지금 당장 적들을 향해 돌진할 생각은 아니다. 주변 좀 돌아다니며 정찰 겸 트랩 설치를 하고 오지.”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호진은 진지 밖으로 향하는 도훈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기서를 바라봤다.
“눈은…….”
“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기서는 안대를 낀 자신의 왼쪽 눈가를 쓰다듬었다.
이번 전투에서 다친 눈은 용재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할 시기를 놓쳤기에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조금 더 빨리 왔다면…….”
“호진님.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싸우는 것도 이곳에 온 것도 모두.”
기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결정과 각오를 무시하지 말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호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에 기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쉬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어느덧 환하게 떠오른 달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서의 말대로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드르렁 푸우.”
당장 호진의 옆에선 잠깐 깨어나 다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치료하곤 다시 쓰러져 잠든 용재가 있었다.
“먹고 자지.”
호진은 피식 웃으며 용재 옆에 몸을 뉘었다.
죽을 만큼 피곤함에도 곧장 잠이 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탓일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저 악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검의 교단 소속에, 자신과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물론 그를 이해하거나 용서할 순 없지만 말이다.
‘내일 다시 만난다면…….’
죽여야 할 것이다.
서로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버려 두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위험한 존재였다.
목표는 같았지만,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호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벤다.”
호진은 작게 읊조리며 눈을 감았다.
자신을 속박하고 얽매는 걱정들을 모조리 끊어내며.
호진은 천천히 깊은 휴식에 빠져들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머리 위의 햇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고작 하루.
무언가 준비하기엔 너무나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진을 비롯해 일행들이 대부분 힘을 되찾았다는 점 정도.
만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어제에 비한다면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호진은 감시탑에 선 기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오셨습니까. 예,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습니다.”
기서는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뢰의 매설, 포들의 상태 점검 및 시험 발사.
골렘과 헌터들 그리고 군인들의 배치까지.
조악하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게이트를 연결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지원이라도 보내주려는 걸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진은 곧장 방어선 안쪽에 강화도와 이어지는 게이트를 설치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인상을 쓰며 지평선 너머를 살폈다.
“오는군요.”
다른 이들에겐 아직 안 보이겠지만 호진에겐 보였다.
지평선을 새카맣게 뒤덮은 죽음의 군대.
불사의 신의 신격을 빼앗았기 때문일까.
게일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신의 군대를 자신의 군대인 양 이끌며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호진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오!
소름이 끼치는 울음소리를 울부짖으며 내달리는 군대는 마치 쓰나미와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집어삼키며 오로지 이곳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에 각오를 다진 군인들은 물론 헌터들마저도 마른침을 삼키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닥쳐올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그때였다.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어느새 게일이 방어선 앞에 나타나 있었다.
다른 이들이 흠칫하며 총구를 겨누는 순간 호진이 외쳤다.
“제가 갑니다.”
호진은 기다렸다는 듯 감시탑의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서로 마주 섰다.
“잘 쉬셨습니까?”
게일의 물음에 호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이거 참, 비꼰 거였는데 인정해버리시니 민망하군요.”
게일은 머리를 긁더니 이어 말했다.
“생각은 좀 해보셨습니까?”
“답은 어제 했을 텐데.”
호진의 단호한 답에 게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죠. 예에, 사실 예상은 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게일은 웃으며 뒤에 몰려드는 자신의 군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에게 시련을 드리는 수밖에요. 아끼던 사람들이 죽고 나서도 당신은 그대로일까요? 모르겠군요. 저는 바뀌었거든요. 어쨌든 실컷 발버둥 쳐보십시오.”
호진은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못 막는다.’
자신의 힘을 쏟아내면 저 군세를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게일과의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이곳의 병력들로는…….
‘외통수인가.’
호진이 씁쓸하게 게일을 노려보던 그때였다.
게일의 시선이 순간 호진이 아닌 그 뒤를 향했다.
그러곤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너무 드렸나 봅니다.”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호진은 게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단숨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호진은 게일의 앞임에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저벅 저벅
가장 앞에 선 것은 헌터 협회 소속 헌터들.
빙결 마법을 몸에 두른 협회장, 토템을 등에 둘러맨 드루이드를 필두로 수백의 헌터들이 무기를 꼬나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 양옆으로는 눈에 익은 집단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앞으로 나섰다.
한 치의 흩트림도 없이 창들을 들어 올리고 있는 흑색 창 부대와 경호 차장.
친위대를 이끌고 온 부산 캠프 대표.
─끼릭 끼릭
그들의 뒤로는 자주포와 다연장로켓 그리고 탱크로 구성된 셀 수 없이 많은 군인들이 함께했다.
군인들 사이사이에선 일찍이 회의에서 보았던 주대위와 이하균 대장 같은 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총과 무기를 쥐고 군인들과 함께 섰다.
방어선에 미약하지만 호진의 격을 닮은 성역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곳엔 가을이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갑의 거인마저 게이트를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탄.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골렘들과 눈에 익은 목각 인형들.
“호, 호진아! 우, 우리도 왔다!”
“저도 왔습니다!”
공방에 틀어박혀 있던 형 호연의 목소리가 타이탄에서 흘러나왔고, 아쉬나학에서 정신이 무너졌던 수현은 수천의 인형들을 이끌고 있었다.
공방을 통째로 옮겨온 것과 다름없는 대규모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들 미쳤군.”
호진은 이들을 보며 기껍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말했지. 그래. 실컷 발버둥 쳐주마. 똑똑히 지켜봐라. 이게 우리의 총력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