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불사의 신의 사도 (3)
“저와 함께 신들을 죽일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을 건지.”
“……뭐?”
호진은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을 각오했었기에, 놈이 제안한 선택지가 당황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분명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호진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에 게일은 뭐가 우스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휘적휘적 내저으며 답했다.
“아…… 그땐 분명 제대로 열이 받았습니다. 오랜 기간 준비한 일을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방해를 받았으니까요.”
어딘가 그립다는 느낌을 담아 말하던 게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이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일이 잘 풀려?”
게일의 말을 곱씹던 호진의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신들을 죽이자고?’
그러니까…….
“네가 여태 준비한 것들은 설마…….”
“정답입니다. 제 목적은 하나거든요.”
호진의 물음에 게일은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죽이는 것.”
***
처음은 하픈덤의 안개 낀 해안가였다.
게일은 그곳에서 감염자들을 이용해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을 만들었다.
레플리카라 하여도 분명 격을 지닌 존재.
완성만 했다면 불사의 신을 죽이기에 좋은 무기가 됐을 것이다.
완성되기 직전, 눈앞의 인간이 녀석을 죽이고 격을 강탈해갔지만 말이다.
게일은 옅게 웃으며 회상을 이어갔다.
‘그다음은 분명…….’
제국의 공국 시리온.
그곳에 어리석은 왕을 꼬드겨 사도를 만들어 냈다.
불사의 신의 사도 후보 굴라.
우습게도 그것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영원히 불사의 신의 사도가 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야 그것 역시 불사의 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으니.’
데니토는 몰랐지만 굴라 또한 때가 되면 놈의 목을 칠 무기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방해를 받았다.
눈앞의 한 인간에게 말이다.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크게 당황했다.
앞선 것과는 달리 꽤 오랜 기간 공을 들인 작업이었던 만큼, 그땐 정말 열이 끝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당신이 그들의 역할을 이렇게 훌륭하게 해주셨는걸요.”
게일은 기쁘게 웃으며 손을 벌렸다.
불사의 신이 강신하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힘을 되찾을 이 날을 말이다.
“나를 이용했다는 건가?”
“그럼요. 이용했고말고요. 그리고 감사드리고 말고요.”
게일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가면 안에서 웅웅 울렸다.
“당신 덕분에 가장 고민거리였던 일인군단의 드라칸은 물론 불사의 신마저 이렇게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고민할 거리조차 되지 못할 문제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일인군단이란.’
소문이 자자하던 대륙의 1강 드라칸을 내려다보던 날을 기억한다.
오직 한 자루 검만으로 그의 수천의 군세를 단숨에 베어냈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드라칸의 모습이 우스웠었다.
드라칸뿐이었겠는가.
자신은, 그리고 검의 교단은 분명…….
“신들조차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뭐?”
호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쓰자 게일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저희 검의 교단 말입니다. 이번엔 당신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예전 저희의 검은 신들에게까지 닿았었죠.”
“…….”
호진이 계속 말하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게일은 어딘가 공허한 느낌으로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저흰 배신당했습니다. 모든 힘을 잃었고 한 명도 빠짐없이 살해당했죠.”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짓고 있는 미소가 딱딱하게 굳는다.
어쩔 수 없는 조건반사다.
당시의 상황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몸이 빳빳하게 굳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배신당해? 누구에게?”
“누구겠습니까?”
게일은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일그러진 흉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전부 숨기지 못했다.
사납고 거친 음성으로 그들을 입에 담았다.
“선신. 그 가증스럽고 위선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죠.”
게일의 대답을 들은 호진은 대답이 없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믿기지가 않는 걸까.
‘하긴…… 그들이 남긴 역사에 진실이 적혀 있을 리가 없으니.’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기록들을 지우고 또 새롭게 덮어썼겠지.
“신들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선신들은 돌연 저희 검의 교단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야 이런저런 것들을 들어댔지만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위험했던 것이다.
고대신과 그 사도들을 베어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검의 교단의 위세는 대단했다.
일부 필멸자들은 검의 교단의 사람들을 신성시하고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아마 그것이 신들의 노여움을 산 이유일지도 몰랐다.
“물론 일부 검의 교단 교인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강함을 얻은 인간은 교만해지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것 또한 인간들끼리 해결할 일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개입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하고 조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낱 인간들에게 맡기기엔 그 힘이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끝내…….
“그가 왔습니다.”
“누가 왔다는 거지?”
“무의 정점에 이른 자. 검으로 태어난 자.”
게일은 잠시 호진을 바라보며 씹어 뱉듯 말했다.
“검신.”
입에 담는 것만으로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한없이 동경했고, 덧없이 저주하는 그 이름.
“검신 샤카하. 제 손으로 죽였고 무한히 죽여야 할 이름이지요.”
아난타, 카인, 시스, 세쿤탈리, 샤카하, 이자리온, 얀, 릴리.
여덟 선신들의 이름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자, 검의 교단을 짓뭉갠 그의 저주스러운 이름이 입에서 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입을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겐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적이었지만 그 찬란하게 빛나는 가능성을 보며 게일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짐작이 가십니까? 마음 깊이 섬기던 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도들을 보던 저의 심정을.”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신에게 무엇을 원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그저 게일은 순수하게 동경했을 뿐이다.
검을 휘두르는 그의 동작에.
검이라는 무기에.
황홀하고 또 황홀하여 홀린 듯 그것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뿐이었는데…….’
섬기던 신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냉혹한 징벌이었다.
수천 수만의 신도가 검신이 휘두르는 검에 썰려 나갔다.
게일이 각오를 다졌을 때는 많은 것이 늦어 있었다.
“교단의 힘을 모두 끌어모은 저는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교단도 저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였습니다.”
“……그건 안타깝게 됐지만. 왜 돌아온 거지?”
호진의 물음에 게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들을 모조리 그리고 무한히 죽이기 위해서라고. 그 끝에 저는 인간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어떠한 운명도, 어떠한 제한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 시작해, 인간의 손으로 끝맺음 지어질 것이다.
그것이 게일이 꿈꾸는 세상.
인간들의 의지만이 남은 세상이다.
그때 호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아까 그랬지. 검의 신을 죽였다고. 그런데 무한히 죽인다는 건 또 뭐지?”
“모르셨습니까? 신들에게 완전한 죽음이란 없습니다.”
고대신도 그렇지만 선신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죽음이란 없는 법이다.
그저 힘을 잃고 잠들 뿐.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힘을 되찾아 깨어난다.
그것이야말로 신들과 필멸자를 구분 짓는 가장 명확한 차이일 터다.
그렇기에 게일은 그 어떤 신보다도 강력한 힘을 얻어, 그들로부터 필멸자들을 수호하고자 맹세했다.
영원히 신들을 죽여 나가기로.
“자, 이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게일은 침묵하고 있는 호진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저를 방해하기는 했지만,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었죠. 당신은 불사의 신을 막으려 저를 방해했지만, 그는 제 손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힘을 합칠 수 있습니다.”
게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불사의 신 덕분에 되살아났지만, 목표를 위해선 데니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게일은 호진 덕분에 얻고자 하던 것들을 모두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는 내버려 두기엔 너무나 위험한 변수.
검의 교단의 마지막 전승자이자, 어쩌면 역대 최강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
‘내 손을 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게일의 눈이 가면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
‘도대체 무슨…….’
호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감시자의 눈은 지금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상대의 진심을 읽어내고 있었으니까.
게일의 목적은 숭고하다고 할 수 있었다.
타인을 위해, 모든 인류를 위해.
‘신의 개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
계획이 성공한다고 한들 억겁의 세월을 신들을 감시하고 또 죽이며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희생이었다.
“이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게일은 침묵하고 있는 호진을 향해 말했다.
호진은 그럼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민 때문은 아니었다.
새로 알게 된 진실들이 충격적이었을 뿐, 답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거절하지.”
“……예?”
게일은 당황했는지 혀마저 씹었다.
하지만 호진의 대답은 확고했다.
“네가 제시한 선택지 모두를 거절한다는 말이다.”
“……어째서?”
“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신들을 죽일 거다. 하지만 너와 함께할 생각 따윈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죽을 생각은 더더욱 없고.”
호진은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몸에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체력과 회복력에 자신이 있다지만, 짧은 시간 동안 피의 공작에 이어 불사의 신의 현신과 싸웠다.
모조리 쥐어 짜낸 신격과 체력이 잠깐의 수다를 떠는 사이 보충될 리는 없었다.
“어째섭니까?”
게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약간의 분노와 짜증도 서려 있었다.
그로서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호진에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게 목표라고? 재밌네. 나도 그렇거든.”
“그럼 왜…….”
“근데 네가 죽인 사람들은?”
호진은 차갑게 게일의 말을 끊었다.
그는 기억했다.
반파된 강화도 캠프와 죽은 사람들을.
무너진 김포와 아파트의 시체들을.
시리온의 폐허와 제물로 죽어간 시민들을.
잠시 침묵하던 게일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답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불사의 신에게 의심받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호진은 검 끝을 게일 쪽으로 향했다.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내가 보기엔 너도 신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