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불사의 신의 사도 (2)
─푸욱
날카로운 창 한 자루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솟아났다.
신격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된 신살의 창 ‘미스틸테인’.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내는 기술, ‘소리 없는 죽음’까지.
이 있을 수 없는 일이 가능했던 건 오직 도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기감까지 속인 건가.’
호진은 아주 잠깐 사이에 그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할 만큼은 했다.”
“충분합니다.”
호진은 사납게 웃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내면에 집중하자.’
사고가 천천히 의식의 안으로 침착했다.
내려앉는 사고만큼이나 시간은 몇 배나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코를 타고 흘러든 공기가 뜨겁다.
손바닥이 긴장해 흘린 땀으로 축축하다.
완벽하다 할 수는 없지만 이걸로도 충분할 것이다.
‘남은 건…….’
벤다는 의념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것.
그것이 심검이다.
그리고 심검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신의 격.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나의 근원’
호진의 손에는 어느새 검 한 자루가 그러쥐어져 있었다.
자신의 심상세계에서 홀로 자리를 지키던 그것이다.
호진의 격이 크고 단단해진 만큼 검도 그 예리함이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벨 수 있다.’
호진의 눈은 어느새 자신이 벨 대상으로 향했고, 동시에 확신했다.
지금 자신이 베지 못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
─스륵
호진의 신격이 터져 나오며 이 일대를 짓누르던 데니토의 격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무겁게 내려앉은 모래들이 폭풍에 밀려나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이게 무슨…….”
배에 꽂힌 창을 뽑아낸 데니토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 신격을 밀어내고 있어……?”
호진이 강신무를 할 때까지만 해도 어떤 신이 튀어나올까 궁금해하던 데니토였다.
하지만 다른 신이 등장하기는커녕, 스스로의 신격을 모두 드러낸 호진은 자신에게 그 칼끝을 겨눴고 그건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놈이 들고 있는 검.
저건 정말로 위험했다.
‘이런 불완전한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조금만 더 있으면 현신도 완료될 것이다.
그때라면 아무리 호진과 저 검이라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터.
‘여기선 물러선다.’
데니토가 결정을 내리고 후퇴하려던 그때.
배에 뚫린 상처가 욱신거리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몸을 뚫을 때부터 보통 창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상처가 낫질 않다니.’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데니토는 물러서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힘껏 격을 끌어올려 급소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서걱
잘삭음과 함께 몸의 균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른쪽의 팔이 팔꿈치 아래로 잘려 나간 것이다.
“……이런.”
집요하게 노리던 오른손을 마지막에 다시 노릴 줄이야.
오른손이 잘리며 들고 있던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까지 놓쳐 버렸고, 진행되던 강신이 강제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위험하네.’
애매하게 강신이 진행이 되어서 더 곤란했다.
지금 이 몸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한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 회복을 해야 할 테고, 그렇다면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자신이 설 자리는 없을 터였다.
‘저자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었었나.’
데니토가 쓰게 웃으며 맞은편의 호진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데니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강신이 끊기고 힘을 소실한 만큼 자신은 지금 무방비 상태였다.
하지만 호진은 추가 공격을 해오지 않고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설마…….’
데니토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힘을 다 썼군?”
파리해진 안색, 떨리는 팔과 다리.
침착하고 보니 알 수 있었다.
호진은 추가타를 가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싸움.
‘이겼다.’
강신화가 끊기긴 했지만 놈을 죽이고 이어서 하면 그만이다.
설득 역시 우선 호진을 죽인 후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았다.
데니토는 승리를 확신하며 호진을 마무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서걱
시야가 돌아갔다.
빙글거리면서.
땅과 하늘, 그리고 다시 바닥.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에 데니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호진이 힘을 잃은 척을 하고 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숨은 동료가 있었나?
그러나 그 의문은 길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떨어진 머리 위로 느긋하게 다가와 섰으니까.
데니토는 그런 녀석을 노려보며 살기를 담아 물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글쎄요. 하나 확실한 건 당신은 이번 게임에서 아웃이라는 겁니다. 꽤 허무하시겠네요.”
─후우
데니토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모든 게 마음 같지는 않군. 너만큼 오랜 시간 공들인 녀석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애초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후회하실 거라고.”
“그랬지. 큭큭.”
데니토는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일인군단이라 불리던 드라칸을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을 꺾은 자.
그리고 인간의 몸으로 신들의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자.
검의 교단 최초의 교인이자 창시자.
“초대 총대주교 게일.”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자신의 사도를 말이다.
***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래서야 도망치는 것도 어렵다.
호진은 온몸을 덮친 탈력감에 무력하게 몸을 휘청이며 앞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데니토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존재.
“하얀 가면…….”
근데 더 믿기 힘든 것은 데니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그랬지. 큭큭. 초대 총대주교 게일.’
‘초대…… 총대주교?’
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말에 의미를 곱씹었다.
의외로 정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일전에 시칸 제국에서 얻었던 검의 교단의 성유물, ‘게일의 부러진 검.’
교단 최초의 신도였다는 게일이 눈앞의 하얀 가면과 동일인이라는 말이었다.
호진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그때, 하얀 가면은 잘려 나간 데니토의 오른손을 주우며 데니토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당신에겐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데니토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잘려 나간 머리가 계속해 말을 하고 있으니 기괴했지만, 상대는 신이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호진은 그저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미안할 수밖에요. 처음부터 이렇게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미안해해야겠지.”
데니토는 당연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하얀 가면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흡수할 셈인가?”
“예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흡수할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가면은 들고 있던 데니토의 오른손과 그 손에 쥐어진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데니토의 신격이 하얀 가면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힘을 완전히 되찾겠군. 아쉽지만, 이건 이것대로 기대가 돼.”
“그거 다행이군요. 양심의 가책이 조금이나마 덜 느껴져서.”
“거짓말이군. 네가 애초에 그런 걸 느낄 리가 없지.”
“이런, 들켰군요.”
둘은 동시에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상황으로 봐서는 하얀 가면이 데니토를 배신한 게 분명했다.
불사의 신의 사도라는 자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목을 날렸으니 그게 배신이 아니고 무엇일까.
하지만 데니토는 이런 상황조차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한참을 웃은 데니토는 돌연 호진을 힐끗거리더니 하얀 가면에게 말했다.
“채갈 셈이냐?”
“가능하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욕심은 여전하구나.”
“제 꿈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까요.”
하얀 가면은 순식간에 손에 들고 있던 데니토의 신격을 모조리 흡수했다.
그러곤 몸을 돌려 데니토의 머리를 향해 다가섰다.
“그래도 아까 한 말은 진심입니다. 당신에겐 미안해하고 있어요.”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아쉬워지는군. 좀 더 제대로 구슬려볼 걸 그랬어.”
“하하. 그래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그래도 너를 사도로 삼았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재밌었으니까.”
“앞으로 더 재밌게 해드리죠. 지켜보시죠.”
“기대되는군.”
─스륵
그 말을 끝으로 하얀 가면은 데니토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곤 남은 데니토의 신격을 조금도 남김없이 모조리 집어삼켰다.
─덜그럭
자리에 남은 건 영혼이 텅 비어버린 드라칸의 육신뿐.
하얀 가면은 천천히 몸을 돌려 호진을 바라봤다.
이에 호진은 바닥에 꽂아 몸을 지탱하던 검을 정면으로 향하며 물었다.
“너는…… 저번에 그놈이군.”
“예에.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시리온에서 뵀었죠?”
하얀 가면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격식을 차려 인사를 건네 왔다.
그 과장된 몸짓이 어딘가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끝인가?’
호진은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줬다.
시야가 흐리고 몸이 떨려왔다.
떨림을 감추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힘이 다했다.
지금 몸으로는 눈앞의 하얀 가면은커녕 고블린 하나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런 호진을 향해 하얀 가면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제대로 인사드리죠. 저는 검의 교단 최초의 신도이자 총대주교 게일이라고 합니다.”
“……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자랑하려고 해본 말이에요.”
“…….”
호진은 하얀 가면, 아니 게일이라는 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역시 이 녀석은 짜증 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게일은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제 목적은 눈치챘습니까?”
“목적?”
“이런, 그동안 검의 교단 교인들을 여럿 만났을 텐데요. 아직도 모르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시군요. 이런 사람한테 그간 계획을 방해받았다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녀석의 모습에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몸만 멀쩡했다면 이야기고 뭐고 놈에게 검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놈의 장단에 어울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나빠서 미안하게 됐네. 그래서 네 목적은?”
“흠 인정이 빠르시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게일은 박수를 한 번 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들며 호진에게 물었다.
“궁금해하시니 전부 말씀드리죠. 그리고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선택?”
갑자기 뭘 선택하란 말인가.
호진은 게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게일은 마치 점심에 뭘 먹을지 묻는 것처럼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신들을 죽일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을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