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불사의 신의 사도 (1)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반갑다.”
호진은 상대의 인사에 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을 삼켰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쳇더미에 걸터앉은 이와 눈을 마주쳤다.
외관은 분명 드라칸이었다.
하지만 눈의 흰자는 검게 물들고 동공에선 노란빛이 형형하게 흘러나왔다.
그가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이 시들고 흑백으로 물들었다.
‘아아.’
호진은 어렵지 않게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데니토.”
불사의 신, 죽은 자들의 왕.
그가 드라칸의 몸에 깃들었다.
데니토는 호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빙긋 웃음 지으며 답했다.
“정말 인간이군. 소문으로 듣고 직접 지켜보기까지 했지만, 도저히 믿기가 힘들었다.”
“칭찬입니까?”
호진이 차갑게 묻자 데니토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성격도 마음에 들어. 이토록 탐이 나는 인간은 처음이다.”
“…….”
“내 그늘 아래로 들어오지 않겠나?”
호진은 대답 대신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데니토는 지금 드라칸의 몸에 강신한 상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린다는 말이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당신의 목적이 듣고 싶습니다.”
“목적? 목적이라.”
데니토는 호진의 질문이 갑작스러웠는지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괬다.
잠시 고민하던 데니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필멸자의 죽음. 그리고 모든 존재의 영생이다.”
“그게 무슨……?”
호진은 데니토의 상반되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데니토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내 말은 이 세계에서 유한한 삶이 사라지길 바란다는 거다. 난 인간이건 오크건 그들이 영원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왜죠?”
어째서 영생을 사는 신이 필멸자의 목숨에 집착하는 걸까.
호진이 의아함을 자아내며 그를 바라봤다.
“슬프기 때문이다. 영생을 사는 존재들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영혼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빛을 잃어가는 건 말이지.”
“…….”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말하는 것만 본다면 자애로움이 흘러넘치지만, 이제껏 그가 보여준 행보와는 거리가 있었다.
호진이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들은 저렇게 죽어야만 했습니까?”
바닥에 수도 없이 늘어선 시체들.
헌터들도 있지만,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만약 그가 정말 필멸자의 영혼들에게 연민을 느꼈다면, 감염자들의 수를 늘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염자들은 그저 데니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이었으니까.
이에 데니토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내가 사랑하고 연민을 느끼는 건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영혼들’. 즉, 너와 이 드라칸과 같은 영웅들의 영혼이다.”
데니토의 눈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그는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수백만, 수천만의 목숨들이야 아무래도 좋아. 난 변하지 않는 것들을 혐오한다. 신들도 그래서 싫어하지. 한데 대부분의 영혼들은 그 자리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는 버러지들 아닌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돌멩이를 좋아하는 게 낫겠지.”
호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방식.
데니토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숨은 가치가 천차만별인 것이었다.
귀한 보석 같은 존재가 있는 반면, 발에 치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도 있다.
그것이 데니토의 생각이었다.
“난 정말 네가 마음에 든다. 나와 함께하자. 나와 함께한다면 너를 나의 사도로 삼아주마. 네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모두 영생을 선물해 주마. 영혼을 온존한 채 말이다. 나와 함께 하자. 진정한 영원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
데니토가 손을 내밀며 제안을 했다.
“……저는.”
이에 호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에 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민에 빠진 척을 했다.
‘미친놈. 역시 신이란 놈들은 하나 같이 나사 빠진 놈들밖에 없군. 강신은 언제 풀리지?’
호진의 머릿속엔 온통 놈을 어떻게 쓰러트릴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 긴 시간을 고민하는 척했지만, 데니토는 호진을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어내며 호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환장하겠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데니토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고 아끼고 있는지.
덕분에 이렇게 시간을 오래 끌 수 있었으니 나쁘지만도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미치광이 신의 눈에 들 생각은 없었다.
‘빙의가 끝날 때쯤에 한 방 먹여 주고 싶은데…….’
시간은 충분히 지났다.
울타가 빙의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슬슬 한계일 시간.
마침내.
“이런, 슬슬 시간이군. 강신이 풀리려고 한다.”
데니토는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지금이다.
─스륵
호진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던 그 순간.
“이제 슬슬 현현해 보도록 할까.”
“……?”
호진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가죽 북처럼 울려댔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조되며 식은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데니토는 드라칸의 품 안에서 검게 물든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
이전의 불완전하던 돌과는 질 자체가 달랐다.
돌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신격과 맞먹을 힘이 요동치고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을…… 얼마큼의 생명을…….’
호진은 돌이 지닌 힘을 깨닫고는 망연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최소한 수천만이다.
아니, 분명 그보다도 많은 수의 사람이 저 돌 하나를 위해 희생됐다.
“이 세계는 참 마음에 든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력이 요동치는 데다가 자네 같은 영웅까지 있다니. 여신에게는 따로 감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데니토는 환하게 웃으며 돌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 속에 담긴 기운이 드라칸의 피부 안으로 파고들어 핏줄을 검게 물들이며 온몸으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무었을?”
호진이 간신히 입을 떼어 묻자 데니토가 싱그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현현이다. 이 세계에 직접 내려와 나만의 왕국을 만들 생각이다.”
‘현현?’
호진은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설마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런 호진의 표정을 살피던 데니토는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미안하게 됐군. 기껏 시간을 끌었는데 말이지.”
“…….”
“잠시 골려주려고 지켜봤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지. 하지만 무의미했다. 드라칸의 목숨과 이 정도의 제물이 있다면, 불완전하지만 일부 현신하는 건 가능하지.”
데니토는 멍하니 선 호진에게 이어 말했다.
“넌 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너만 아니었다면 드라칸을 잃을 일도 없었을 테지. 네가 다른 돌들의 영혼들을 죄다 풀어준 탓에 이렇게 불완전하게 현신하게 된 것이다. 계획대로였다면 이보다 느긋하고 완전했을 터.”
‘그런가.’
호진은 간신히 굳어있던 머리를 굴렸다.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은 제물이었다.
데니토를 이 세계로 현신하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줄.
하지만 막아내지 못했다.
호진이 정화한 돌들은 일종의 스페어.
테니토의 현신을 도와줄 열쇠들이지만, 없다고 해도 현신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생각해라.’
호진은 이를 악물며 사고를 가속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감시자의 눈이 데니토의 상태를 샅샅이 읽어냈다.
데니토는 아직도 돌의 힘을 흡수 중이었다.
돌을 쥔 놈의 오른손은 놈의 진체화가 진행 중이지만, 아직 현신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막는다.’
고민은 짧았고 판단은 빨랐다.
허리에 차고 있던 도가 뽑혀 나오며 절 베기가 정확하게 데니토의 오른손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나.
─카각
허공에 뼛가루가 튀었다.
순식간에 생겨난 뼈로 만들어진 벽에 칼이 가로막혔다.
애초에 이게 먹히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호진은 재빨리 날숨을 토해내며 가볍게 뛰어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신무로 신체를 강화한 호진은 모래시계를 사용, 데니토의 뒤로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신살의 힘이 담긴 ‘아메노히바키리’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카가각
손을 들어 검을 막아낸 데니토는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 권능은…… 라멜인가? 그리고 신체를 강화한 그건 강신무? 누구를 불러올 셈이지?”
“네가 알 필욘 없지.”
호진이 차갑게 답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이에 탄식을 흘리며 호진의 공격을 막아내던 데니토는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침을 발라 놓은 모양이군.”
그러기도 잠시, 손뼉을 탁하고 친 데니토는 호진의 검을 한 손으로 툭 쳐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부러져나간 검.
호진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하지만 데니토는 그런 호진을 쫓아 공격하기는커녕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하긴 이런 영웅을 탐내지 않을 신은 없을 테니. 좋다. 더 좋은 조건을 내걸지. 뭘 원하지? 더 강한 힘? 아니면 지배할 땅?”
“관심 없어!”
호진은 짓씹어 뱉듯 소리를 치며 ‘새벽을 밝히는 청성’을 휘둘렀다.
차가운 냉기를 품은 검기가 놈을 향해 쏟아졌다.
그 틈에 환령보를 밟아 놈을 향해 쇄도한 호진은 폭풍검 ‘이스티리온’을 휘둘렀다.
수십 개의 검격 속에 조영검의 묘리를 담아 놈의 움직임을 봉인할 셈이었다.
강신무가 달아오르며 움직임은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해.”
그러나 데니토는 그런 호진의 공격을 손을 휘저으며 여유롭게 막아내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마치 어린이와 놀아주는 어른과도 같은 모양새.
그럼에도 호진은 이를 악물며 포기하지 않았다.
빠르게.
조금 더 빨리.
폭풍의 검이 몰아치며 호진의 검격은 채찍처럼 늘어지면 집요하게 놈의 오른손을 노렸다.
‘저 돌만 떼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현신을 막을 수 있을 터다.
“젠장!”
한계에 다다르도록 끌어올린 연격에도 놈의 오른손은 굳건했다.
오직 왼손만으로 호진의 공격을 모두 쳐내는 녀석을 보며 호진은 암담함을 느껴야 했다.
한 차례 뒤로 물러난 호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상해…….’
울타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의 신격을 끌어와 자신의 몸을 강화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 연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응답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이카루스?”
호진의 물음에도 멀리 떨어진 이카루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울타의 조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쯧.”
소리 내어 혀를 찬 호진은 여유로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니토를 노려봤다.
변수가 필요했다.
‘조금의 변수만 있다면 해볼 만할 것 같은데…….’
호진이 고민하던 그 순간.
변수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음?”
데니토의 의문 섞인 중얼거림.
몸에 생긴 이질감에 내려다본 데니토의 몸엔 단조로운 모양의 창 하나가 꽂혀 있었다.
‘어느새?’
데니토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할 만큼은 했다.”
도훈은 호진에게 들리도록 외치며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그 얼굴은 긴장으로 땀범벅이었고 데니토를 찌른 창은 회수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일격을 시도하느라 얼마큼의 기력과 정신력을 소모한 것일까.
이에 호진은 사납게 웃으며 답했다.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