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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10화 (210/241)

210화. 신화 속 결투 (4)

‘또…… 졌다고.’

드라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금의 기사는 신의 사도라고 불리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존재였다.

비록 신들의 전쟁 시절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루어낸 위업은 신화라 불리기에 충분했으니까.

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수백만의 생명력을 갈아 넣어 제작한 투귀에 이어 황금의 기사까지 패배했다.

고작 두 명의 인간에게.

수천 년간 자신의 옆을 지킨 두 존재를 한순간에 상실한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드라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만약 비기기라도 해서 물러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을 것이다.

무조건 승리해 눈앞의 세 사람을 피의 병사로 삼아야만 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터.’

드라칸이 그렇게 되뇌던 그때였다.

반대편 진영에서 호진이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끝내자.”

마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고, 이 싸움의 결과도 보나 마나라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투.

─아드득.

이에 드라칸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끝을 내자.”

드라칸은 황금색의 손가락 장신구를 교차해 자신의 양쪽 팔목을 그었다.

그러자 사람이 쏟아냈다곤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바닥을 적시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드라칸은 핏발이 선 눈으로 호진을 응시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보여주마. 신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

‘아랜가.’

호진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이동하는 호진의 신형을 따라 새빨간 말뚝 수백여 개가 솟아올랐다.

말뚝 하나쯤이야 맞아도 상관없지만, 잠깐이라도 움찔한 사이에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말뚝들이 몸을 꿰뚫을 것이다.

‘위험하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호진은 침착하게 발을 놀렸다.

그러자 말뚝들이 호진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고 뚝 끊겼다.

‘대략 10초.’

놈의 말뚝이 솟아오른 시간이다.

‘다음은…….’

호진의 정면에서 창보다는 전봇대에 가까운 거대한 투창들이 날아들었다.

드라칸의 손짓 한 번에 수십 개의 창이 만들어지더니, 빛살과 같은 속도로 날아든 것이다.

호진은 청성을 고쳐 잡고는 앞으로 나아가며 휘둘렀다.

─카가각 캉!

묵직한 손목의 감각.

강철조차 케이크처럼 썰어내는 청성으로도 거대한 투창들은 잘리지 않았다.

이에 호진은 환령보를 밟아 최대한 투창들을 피하며 전진했다.

피하기 어려운 건 검으로 흘리는 데 집중하면서.

호진은 계속해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창의 개수는 14개. 단단하고 무거워. 나머진 어찌 피한다 해도 3발은 무조건 맞게 되어 있다.’

투창을 막지 않고 피하는 것에 전념한다면 11개까진 피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남은 3개는 검으로 흘려내는 수밖엔 없었다.

고민을 이어가며 호진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 사이에 피로 이루어진 넝쿨이 돋아나고, 땅에선 말뚝이, 하늘에선 투창이 날아왔지만, 호진은 이를 점점 능숙하게 파훼하며 드라칸과 거리를 좁혔다.

‘상대는 원거리 공격에 능숙하다.’

상대는 네크로맨서.

병사들이 전방을 담당하는 동안 뒤에서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면, 그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전투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거리는 어떨까.’

어느새 드라칸의 지척에 도달한 호진이 재차 환령보를 밟았다.

─콰앙!

투창 하나가 호진의 잔상이 남아있던 허공을 가르고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륵

이미 호진은 드라칸의 사각으로 접근해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휘두른 검은 드라칸의 몸을 세로로 쪼갤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검이 드라칸의 허벅지에 닿으려는 찰나, 붉은색 주먹이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쩌엉

이에 호진은 억지로 버티지 않고, 최대한 자세를 유지하며 밀려났다.

몸은 밀려났지만 검을 쥔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다음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쾅! 콰가각 쩌정!

드라칸의 등 뒤로 솟아난 네 개의 팔과 원래 있던 양쪽의 팔까지.

총 여섯 개의 붉게 물든 팔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기가 각각 들려있었다.

도끼, 창, 검, 망치와 철퇴까지.

그중 몇몇 무기는 드라칸의 몸보다도 커 보였다.

‘능숙하다.’

여러 개의 무기를 동시에 다루면서도 하나하나가 달인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호진이 공격을 막거나 흘리며 뒤로 물러나자 드라칸은 공격을 멈추고 물어왔다.

“놀랐나?”

“……조금은.”

호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원거리 공격뿐만이 아니라 접근전까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했다.

신들을 제외한다면 여태 만난 어떤 존재들보다 더.

드라칸이 지닌 천재적인 재능과 수천 년의 세월은 그를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낸 것이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드라칸은 호진의 반응에 만족하며 재차 원거리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호진은 재차 발을 놀리며 드라칸을 향해 접근했다.

‘원거리와 접근전 모두 능숙하다면, 접근하는 게 답이다.’

상대에게 약점이 없다면 자신이 자신 있는 것을 하면 됐다.

다행히 호진은 상대에게 접근하기 위한 기술이 차고 넘쳤다.

호진은 드라칸을 향해 단검 한 자루를 투척했다.

드라칸이 단검을 대수롭지 않게 위로 쳐올린 그 순간, 호진이 단검을 낚아채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스칸르의 단검.

소유자의 위치를 바꿔주는, 검보다는 스킬에 가까운 무기다.

갑작스러운 호진의 접근에도 드라칸은 묵묵히 무기를 휘둘렀다.

‘뭐, 놈이라면 이런 종류의 접근 기술만 수백 개는 더 봤을 테니까.’

호진도 애초에 이걸로 뭔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우선 접근전으로 유도는 성공했으니 만족이었다.

그렇게 싸움을 이어나가던 호진은 문뜩 자신의 상태에 의문을 품었다.

호진은 차분하게 드라칸의 공격을 받아내며 스스로의 상태를 관조했다.

왜일까.

분명 드라칸의 공격은 매섭고 강력했지만,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심장은 기분 좋게 두근거렸고,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되어 있다.

보법을 밟는 발끝에, 검을 휘두르는 손끝에는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아!”

호진은 문뜩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입을 벌려 신음을 흘렸다.

상대의 강함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나머지 지금에서야 괴리감을 깨달은 것이다.

상대가 어떤 수를 더 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더 강한 거야.’

놈이 여태 만난 어떤 사도보다 강하든 아니든, 그런 걸 다 접고 생각한다면 간단한 문제였다.

호진은 그냥 놈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거다.

그렇기에 지금도 대련을 하듯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상대의 강함에 눈이 멀어 상황 파악이 늦었다.

그 사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드라칸은 호진의 웃음에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에 호진은 난격을 이어가며 덤덤하게 답했다.

“별거 아니야. 약간 허무해졌을 뿐.”

드라칸이 그런 호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다음 순간.

─스칵

드라칸의 여섯 팔을 뚫고 가슴에 길게 칼자국이 새겨졌다.

대화하느라 정신이 흐트러진 까닭일까.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드라칸이 전투에 다시 집중하려던 순간…….

─스륵

이번엔 검을 쥔 팔에 예리한 자상이 새겨졌다.

‘무슨 일이…….’

드라칸은 몸에 하나둘 늘어나는 상처에 황급히 적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 답은 간단했다.

‘검이 점점 빨라져?’

자신의 공격을 버겁게 막아내던 호진이 이젠 자신을 압도하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스티리온.’

폭풍 검으로 무기를 바꿔 든 호진은 드라칸의 쏟아지는 연격을 빠르게 되받아쳤다.

점점 속도가 붙은 검은 놈의 공격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금씩 드라칸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크윽!”

뒤로 점점 밀려나던 드라칸은 결심을 굳힌 듯,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점점 빨라진다. 차라리 팔 한쪽을 포기하더라도 강한 일격을 먹여야 해.’

방어를 위해 앞으로 뻗은 네 개의 팔과 큰 공격을 위해 뒤로 크게 젖힌 두 개의 팔.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강하든 심리는 결국 똑같다.

수세에 몰린 사람은 도박을 걸기 마련이었다.

─서걱

놈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뿌려 놓았던 조영검의 검로.

공간을 베어낸 그 공격에 뻗어진 네 개의 팔 중 한 개가 완전히 잘리고 두 개가 덜렁거렸다.

“흡!”

드라칸은 고통을 집어삼키며 뒤로 젖혔던 망치와 도끼를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그리고…….

─스륵

힘의 방향이 틀어진 놈의 망치와 도끼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호진은 이화접목을 사용해 공격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드라칸을 향해 걸어가,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위에서 사선으로 내려긋는 일도.

어깻죽지를 따라 옆구리까지 깔끔하게 잘려 나간 드라칸의 상체가 바닥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고작 수 초 만에 끝나 버린 결투.

드라칸의 사고가 이를 따라가질 못했다.

‘끝났다고?’

드라칸이 피를 쏟으며 흙바닥을 뒹굴던 그때였다.

─저벅 저벅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인간.

호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

그 말에 드라칸은 핏발선 눈을 부릅떴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일인군단이란.’

머리를 스치는 먼 옛날의 기억.

드라칸은 입술이 찢어지도록 짓씹었다.

‘도대체 뭐냐……!’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놈과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가 있을까.

단순히 언행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왕의 위엄에 이어 검의 교단의 검술 그리고 보법까지 놈과 쏙 빼닮았다.

“그놈과 무슨 관계냐.”

“그놈?”

호진은 뜬금없는 드라칸의 말에 미간을 모았다.

“모른 척할 셈이냐? 애초에 이상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잠깐, 잠깐.”

호진은 격분하는 드라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뭘 혼자 오해하고 지껄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진 이유는 그런 게 아니야.”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첫째는 방심해서지.”

만약 드라칸이 호진과의 결투 전에 생명력을 아꼈다면?

분명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부하들을 너무 쉽게 잃었다는 거고.”

놈은 수천 년간 피의 병사들을 소환해 함께 싸우는 방식을 취해 왔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일대일 결투방식을 택한 것부터 미련한 짓이었다.

“마지막으로 너, 전투방식이 너무 잡스러워.”

놈은 접근전도 원거리전도 능숙했다.

아마 오랜 세월 동안 두 가지 모두 익힌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둘 중 하나만 팠더라면?

‘그럼 내가 졌을지도 모르지.’

호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놈의 원거리 공격도 근접 공격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까.

“…….”

호진의 말을 들은 드라칸은 입을 벙긋거리다 꾸욱 다물었다.

그러기도 잠시 재차 입을 연 놈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해댔다.

“……아직 안 끝났다.”

누가 보더라도 이미 완전히 끝난 상황.

결투는 호진의 승리가 분명했다.

“헛소리는 죽어서 마저 해라.”

호진은 어이없어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사라졌어?’

놈의 신형이 마치 증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놈을 찾기 위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려던 그 순간.

─움찔

호진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일대를 뒤덮었고, 끝내는 호진의 몸조차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반갑다.”

그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목소리 자체는 아까까지만 해도 호진과 대화하던 드라칸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존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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