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신화 속 결투 (3)
“…….”
대적자가 사라진 투신전은 그 존재의의를 다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엔 싸늘한 적막만이 흘렀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드라칸이었다.
“졌군.”
드라칸은 결투를 시작하기 전과 결투가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투귀가 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끄륵.”
주먹 한 방에 투귀의 몸을 풍선처럼 터트려버린 용재는,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애초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과 머리를 혹사시키며 극한의 트랜스 상태로 몰아붙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용재는 살았고, 투귀는 죽었다.
‘세보진 않았지만 못했어도 최소 수백만의 생명을 갈아 넣은 합성의 산물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이야.
정말 상대는 사도라는 말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스스로의 힘으로 신의 격을 얻은 자와 그 녀석을 숭배하며 사도의 위를 얻은 자인가.’
헛웃음만 나왔다.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설마 이런 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녀석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흥미가 돋았다.
드라칸은 투귀를 잃었다는 아쉬움도 잊은 채, 다음 결투를 이어 나갔다.
“가라. 황금의 기사여.”
─찰칵
바이저를 끌어 내린 기사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호진의 측에서도 도훈이 마주 걸어 나왔다.
두 번째 결투의 시작이었다.
***
황금의 기사.
일국의 왕이었지만, 왕보다는 기사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자.
신들의 전쟁이 여덟 선신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대부분의 필멸자들이 선신을 섬길 때 홀로 다른 신을 섬기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국 ‘칼리아’를 세운 건국왕, 황금의 기사였다.
당시에 필멸자가 선신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흐름에 어긋난 행위였고,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후대에 전설과 신화가 되어 구전이 되었으니.
원래 영웅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기구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 종착지가 이곳일 것이리라곤 본인조차 몰랐지만 말이다.
‘투귀가 당하다니…… 놀랍군.’
황금의 기사는 진심으로 놀랐다.
수천 년간 자신의 옆에서 싸워온 존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나도…….’
이 길고 길었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바이저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싸우기 전에 의욕이 생기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자신의 바이저를 잡았다 놓으며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상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못 알아보는가?’
오래된 시절의 예절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끄덕
작지만 상대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고금 어디에서나 통하는 인사법.
아무래도 알아준 모양이었다.
‘즐겁군.’
이런 결투와 같은 방식의 싸움도, 예절과 명예를 표현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왠지 아까부터 생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슬며시 올라가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수밖에.
원래 영웅 서사시의 끝은 잔혹한 법이 아니겠나.
사람들을 괴롭히던 악룡을 베고,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수십 년간 왕국을 수호했던 기사도 그 운명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자신의 강함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고, 그 끝에 기다리는 건 배신과 패배 그리고…….
‘영원한 종속.’
제대로 싸웠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의미 없는 가정이다.
피의 공작, 일인군단.
당시 황금의 기사와 함께 대륙 10강 중 최강이라 회자되던 존재, 드라칸.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두 초인의 대결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황금의 기사는 믿었던 신하의 배신으로 저주에 걸렸고, 끝내 드라칸에게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패배했으니까.
‘……오늘따라 이상하군.’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죽은 몸인 만큼 나이가 더 든 건 아닐 텐데, 왜 자꾸 추억에 잠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검을 고쳐잡고는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파지직
그 순간 노란 벼락이 황금의 기사의 검에 내리꽂혔다.
전투의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양손에 단검을 교차해 들었다.
이를 확인한 황금의 기사는 섬광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이곳에서 패배해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일부러 죽어줄 순 없다.
그건 몸에 새겨진 드라칸의 명령이자,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카랑!
두 검이 교차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호오.’
황금의 기사는 자신의 검을 받아낸 상대를 보며 놀랐다.
전격이 담긴 검격이었음에도 조금도 경직되지 않았으니까.
‘장갑…… 은 아니고 장갑에 연결된 실 때문이겠군.’
검을 통해 전달한 전격이 장갑에 연결된 실을 통해 방출됐다.
얼마나 섬세하고 재빠른 마나 조작 능력이란 말인가.
황금의 기사는 놀람을 감추며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갔다.
그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두 손을 모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한줄기 번개가 상대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낙뢰(落雷).
방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
하지만 상대는 막아냈다.
‘이번엔 단검인가?’
실이 묶인 단검을 던져 내리치는 벼락의 방향을 바꿨다.
괴물 같은 반응속도였다.
─달그락
어깨가 가볍게 들썩이며 갑옷에서 소리가 났다.
만약 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혹시나 기대완 달리 허무한 싸움이 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제대로 해야겠군.’
황금의 기사의 손에서 돌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태양처럼 밝은 빛을 뿜어내던 그것은 점차 크기를 줄여 나가며, 푸른색의 빛을 띠었다.
뇌단(雷丹).
─스륵
파지직거리며 빛을 토해내던 뇌단이 반쯤 열린 투구의 바이저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전격의 구슬.
생전이었다면 온몸에 저릿한 감각이 휘몰아쳤겠지만, 피로 구성된 이 육신에 통증이란 불필요한 감각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황금의 기사는 자신의 손아귀를 쥐었다 펴며 감각을 몸에 익혔다.
실로 오랜만에 써보는 기술이기에 감각이 영 낯설게 느껴졌다.
몸이 붕 뜨는 듯한 부유감.
손과 발이 깃털처럼 가볍다.
‘지금이라면…….’
황금의 기사가 발을 구르는 그 순간, 기사는 이미 자신이 바라보던 위치로 이동해 있었다.
“……!”
계속해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상대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떠졌다.
경악. 상대가 보이는 그 감정에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란 전격이 담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단검을 들어 급히 검을 막아낸 상대의 손이 딱딱하게 굳는가 싶더니 옷에 불이 붙었다.
상대는 재빨리 불이 붙은 부분을 단검으로 잘라냈지만, 드러난 살결은 이미 검게 그을려있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공격과, 막았음에도 팔이 타 버리는 공격.
이에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황금의 기사는 차분히 상대를 지켜봤고, 그 끝에 고개를 갸웃했다.
“……속도가 빨라졌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군.”
상대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차분하게 뭔가를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속도로도, 위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
보통이라면 포기하거나,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듯, 상대는 조금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것도 잠시, 상대는 지금 차분하고 침착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뭔가 준비 중이군.’
그게 무엇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것은 옳은 대결이라 할 수 없었다.
준비 중인 걸 보지 못한다면 아쉽지만, 상대의 역량이 그것뿐인 것이다.
목숨을 건 대결에서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다.
‘상대를 죽인다면 지금.’
뭔가 준비가 끝나기 전에 전력을 다해 제압하는 게 옳았다.
황금의 기사는 재차 발을 굴렀다.
지면에 푸른 전기가 퍼지고 몸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가히 순간이동이라고 할만한 속도였다.
순식간에 도달한 상대의 뒤편.
상대는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몸을 돌리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칼리아오레스.’
황금의 기사의 독백과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서 황금색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머리뿐이었지만, 한번 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볼 수 없다던 전설 속의 고룡.
천둥과 벼락의 신이라 불리던 고룡들의 왕이 자신의 신자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금의 기사가 드라칸의 노예가 되어서까지 그를 섬겼듯, 그 또한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의 신자를 놓지 못한 듯했다.
용의 입에서 뇌염이 뿜어져 나왔다.
뇌성벽력과 함께 온 세상이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천지를 개벽시킬 만한 힘이 용의 입에 모여들었다.
그 강인하다던 여덟 선신조차 이 브레스에 직격당한다면 무사하지 못 하리라.
이젠 정말 끝…….
순간 황금의 기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던 상대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사방에 전기를 뿌려대는 자신의 기감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이런.’
하지만 이제와 적의 위치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용은 그저 상대가 있었던 곳을 향해 뇌염을 뿜어낼 뿐이었다.
그렇게 뇌염이 지나가고 나서,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뇌염이 아슬하게 빗겨 나간 자리에 선 상대가 자신을 향해 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아니, 지금은 우선 피하는 게 먼저다.’
창이 쏘아짐과 동시에 황금의 기사는 다급히 자신의 발을 굴렀다.
그리고.
─쿠당탕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른 황금의 기사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신의 발목에 걸린 은빛의 실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런 게 설치되어있던 걸까.
그런 의문도 잠시 고개를 돌린 기사는 깨달았다.
창의 궤적은 처음부터 이곳을 향해 쏘아졌다는 것을.
‘넘어질 것을 계산했다고?’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갑옷은 칼리아오레스의 비늘로 만들어진 신기.
얇디얇은 저 말뚝과도 다름없는 모양의 단창으로 뚫을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콰직
황금의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관통한 창을 내려다봤다.
그냥 창이 아니었다.
신성이 담긴 비늘을 허물 부수듯 가볍게 으스러트렸다.
그것은 신살을 품은 창.
‘아아. 이거야 원…….’
완벽하게 당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속도가 빨라졌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군.’
의도된 중얼거림.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 속아 자신은 모든 것을 꺼내 보였다.
이미 그때부터 상대는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후련할 정도로 깔끔한 패배에 황금의 기사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기사는 서서히 무너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고룡과 시선이 마주쳤다.
연민과 안타까움.
숨길 수 없는 슬픔이 두 눈에 깃들어 있었다.
저 인간다움에 홀린 듯 그를 신으로 섬겨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웠던 신.
황금의 기사는 힘겹게 손을 들어 바이저를 잡았다 놨다.
이에 용 또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사와 용은 거의 동시에 사그라지듯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