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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07화 (207/241)

207화. 신화 속 결투 (1)

세상이 갈라졌다.

바다를 연상시키던 피에 젖은 대지도.

붉은색의 하늘도 반으로 양단됐다.

어스름한 푸른 하늘과 땅만이 남았다.

그리고.

─툭

피로 이루어진 육신을 지녔던 수천의 군세.

고장 난 듯 멈춰 선 망자들의 육신이 바닥을 향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진 피로 이루어진 육신은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호진은 휘둘렀던 검을 천천히 당겨와 검 끝을 바닥으로 늘어트렸다.

그러곤 쓰러지는 적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족한 점이 많아.’

사실 검을 휘두를 필요까지는 없었다.

심검이란 의지를 구현하는 것.

휘두르는 동작이 없더라도 상대를 베려고 한다면 벨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아직 호진은 그 개념을 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에게 있어, 벤다는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새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동작이 없다면 그것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무엇보다…….

─저벅

‘전부 베지도 못했고.’

호진은 쓰게 웃으며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는 3개의 인영을 바라봤다.

여섯 개의 손을 가진 붉은 덩치의 괴물과 검을 든 기사.

그리고 일인군단 드라칸까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장 강한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쯧.”

호진은 아쉬운 마음에 가볍게 혀를 찼다.

사실 한 번에 모든 적을 섬멸할 생각이었다.

아끼고 아꼈던 비장의 수였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신을 베었던 기술이지 않은가.

‘……빠트린 게 있군.’

심검은 자신의 기술이지만 아직 몇 번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만큼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 까닭에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힘이 분산된 탓일 지도 몰랐다.

호진은 적들을 천천히 살폈다.

조금씩이지만 베인 자상들이 보였다.

빗나간 것이다.

‘심검도 만능은 아니라는 말이겠지.’

강한 상대일수록 파훼할 방법이 있는 것이다.

호진은 문득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이 아닌 더 강한 상대와 싸울 때, 심검이 통하질 않았다면 더 위험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드라칸이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네놈,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냐.”

“…….”

호진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드라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오만함을 거둔 지 오래였다.

“이곳에서 신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력들을 허무하게 소모하진 않았을 텐데.”

드라칸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수백 수천만의 생명력은 놈이 지닌 힘의 원천이었다.

그는 신들의 전쟁 시절 불사의 신의 아래에서 다른 신의 사도들을 사냥했었다.

심지어 그 강대하다던 선신 중 하나에게 상처를 입혀 패퇴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 그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선 정체불명의 사내는 어지간한 신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라고.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전력으로 상대해주겠다.”

드라칸은 손에 피를 흘리는가 싶더니 기다란 창 하나를 만들어냈다.

꺼내 든 것만으로도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붉은색의 단창.

그의 옆으로 육비의 괴물과 기사가 호진을 둘러싸듯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난 일대일을 선호하는데 말이지.”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닌 나다. 이들 또한 내 능력으로 만든 녀석들이니 불만은 없겠지.”

“불만은 없어. 다만…….”

호진의 시선이 뒤를 향하자, 드라칸도 그 시선을 쫓았다.

시선의 끝엔 두 사람이 무기를 꼬나 쥐며 호진의 옆으로 다가와 서는 중이었다.

“친구를 잘 사귀는 것 또한 능력이겠지.”

“…….”

드라칸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호진을 노려보다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애초에 결투도 아니고 전쟁 중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뭘?”

드라칸은 꽤나 자신에 찬 모습으로 육비의 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수천 년간 전투를 반복해온 투귀다. 내가 만들어 낸 합성의 산물이지만 두 번은 못 만들어낼 기적의 산물이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 더욱 강한 힘을 얻었다.”

고개를 돌린 드라칸은 이번엔 망토를 휘날리는 기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쪽은 검 하나로 악룡을 베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국했으며, 수십 년간 제국의 공격을 단신으로 막아온 소드마스터다. 말 그대로 신화를 이룩한 영웅이지.”

그들을 소개하는 드라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둘에게서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들의 강함이 느껴졌으니까.

당장 심검을 버틴 것만 보아도 그들의 강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호진도 자신이 있었다.

“이쪽도 그리 만만치는 않아서,”

용재와 도훈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라칸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호진에게 가려져 몰랐지만, 그들이 지닌 힘 역시 결코 보통 인간의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도인가.”

“뭐 비슷하다고 보면 될 거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군.”

드라칸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창을 꼬나 쥐었다.

그러기도 잠시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창을 거두며 말했다.

“……제안할 게 있다.”

드라칸의 말에 호진은 계속해보라는 듯 검을 슬며시 내렸다.

“기왕이면 정말 결투방식을 취하는 건 어떻겠나?”

“일대일로 붙자고? 왜지?”

“우리 신께서 그걸 바라시니까.”

“……!”

불사의신 데니토.

그가 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호진은 빨리 눈앞의 놈을 죽여 그 손에 죽은 이들의 한을 달래주고 싶었기에.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것은 뭐지?”

검에 손을 올린 호진이 차갑게 되물었다.

그 물음에 드라칸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결투에서 내가 진다면 다시는 이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순간 호진은 귀를 의심했다.

고작 결투 한 번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말인가?

호진은 그 말의 진의가 의심스러웠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일대일 승부로 간다고 불리해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받아들이지.”

“좋다. 신의 이름 아래 계약은 성립했다.”

양쪽의 동의하에 첫 번째 대결의 막이 올랐다.

***

용재는 도끼날을 손끝으로 쓸면서 앞으로 나섰다.

맞은편에는 육비의 괴물이 섰다.

타오르듯 붉은 피부는 온통 근육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마음에 드네.”

용재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호진에게는 감사했다.

결투만큼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대도 없을 테니까.

이차 전직을 한 이후로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기에 차고 넘쳤다.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도 나팔 소리도 없었다.

“스읍.”

숨을 깊게 들이쉰 용재가 벼락같은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길이로 늘어난 도낏자루가 상대에게까지 뻗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피하지 않고 여섯 손 중 하나로 도끼날 부분을 후려쳤다.

그러자 궤적이 틀어진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일대의 땅을 뒤흔들었다.

─콰아앙!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였다.

육비의 괴물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신형이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용재의 뒤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있었다.

‘빠르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민첩함에 용재는 이를 악물었다.

─쾅!

짧고 굵은 주먹질 한방.

도낏자루로 그것을 받아낸 용재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괴물은 방금 공격은 인사에 불과했다는 양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힘은 그보다 더하네.’

느릴 것이라 예상하지는 않았다.

발달한 근육은 폭발적인 힘을 내게 해 주는 동력이라 볼 수 있다.

느린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 속도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쳐도, 동체시력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결투 중에 조절하지 못하는 속도로 움직이는 건 일종의 자살행위였다.

제어력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면 땅을 헛디뎌 바닥을 구르거나,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상대를 타격하지 못하고 허공에 헛손질을 해댈 테니까.

그래서 용재도 최근엔 속도 제어를 위해 민첩 스탯을 꾸준히 올린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상대는 터무니없는 괴물이었다.

놈은 속도, 힘, 방어력 어떤 면에서 보든 용재를 아득히 압도하는 피지컬을 지녔다.

다행인 점은 용재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법을 이미 몇 번이나 익혀왔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간단했는데…….

‘맞아가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익힌다.’

자신은 다칠수록, 부서질수록 강해진다.

반면 상대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자신에게 패턴을 읽히게 될 것이다.

용재의 역량은 전투의 끝에 도달해야 절정에 이른다.

그렇기에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 용재는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해보자고.”

용재는 거인 잡이의 도끼창을 채찍처럼 횡으로 휘둘렀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도끼가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벼락이 되어 상대에게 쏟아졌다.

이에 육비 괴물은 그것을 모조리 여유롭게 흘렸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걸어 용재와 거리를 좁혔다.

명백한 도발.

자신을 더 즐겁게 해보라는 일종의 시위에 용재는 이를 악물었다.

용재의 도끼를 휘두르는 손이 한층 더 빨라졌다.

이미 그것은 도끼라기보단 피륙을 갈기갈기 찢는 폭풍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육비의 괴물은 멈출 수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도끼를 흘리며 유유자적하게 걸어온 녀석이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뻔히 보이지만 막을 수가 없다.

놈의 나머지 손들 때문이다.

완벽한 공방일체를 이룬 녀석의 손들.

그건 마치 여러 명의 사람과 결투를 하는 느낌을 줬다.

─콰직

놈의 주먹이 용재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몸을 얻어맞은 용재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아찔한 통증을 느끼기도 잠시, 허공에서 용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높이 뛰어오른 괴물이 발을 높이 들어 용재를 내리찍은 것이다.

수직으로 내리꽂힌 용재의 몸이 땅과 부딪치며 바닥의 땅이 움푹 파였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의 발목을 그러쥔 거친 손아귀였다.

몸이 허공으로 재차 떠오르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한번, 두 번, 세 번, 끝도 없이.

그리고 공중으로 붕 띄워진 용재에게 소나기 같은 주먹 연타가 쏟아졌다.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멍청했어.’

희미한 정신 속에서 용재는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접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상대는 용재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익힐 시간 따위를 주지 않았다.

놈의 압도적인 힘과 속도는 용재를 한순간에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둘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난 것이다.

“……꺼억.”

육비 괴물의 발차기에 멀리까지 날아간 용재가 넘어갈 것 같은 숨을 토해냈다.

늑골과 손목뼈 그리고 정강이뼈가 한순간에 나갔다.

내장의 일부도 진탕이 되었는지, 목구멍을 타고 붉은색 피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죽을 뻔했다.

아니, 상대가 방금 전 그대로 끝내고자 마음먹었다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히죽

육비의 괴물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상대로 여유를 부려? 넌 진짜 뒤졌다.”

용재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많이 다치긴 했지만, 자신의 싸움은 지금부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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