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일인군단 (5)
‘지루하군.’
오랜만에 꿈틀거렸던 흥미는 끓어올랐던 시간보다도 더 빠르게 식어버렸다.
잠깐이나마 기대했지만, 고작 몇천도 되지 않는 잡병들에 둘러싸여 간신히 버티는 모양새가 그의 기분을 잡쳤다.
드라칸의 입에서 긴 한품이 흘러나왔다.
‘결국은 저자도 그저 그런 인간이었을 뿐.’
잠시나마 눈길을 사로잡았던 이도 이를 악물고 분전하고 있지만 그뿐이다.
일찍이 구국의 영웅으로 불렸던 자이자, 신의 눈에 들어 사도가 된 이가 보기엔 다른 인간들은 대부분 버러지에 불과했다.
선택받은 빛나는 육신과 영혼을 타고난 자들은 지극히 일부.
넓게 펼쳐진 사막의 모래 한 줌과 같은 존재다.
새로운 넘버링 기사를 만들 생각에 설렜던 드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저 정도로는 자신의 컬렉션에 들 가치가 없었기에.
‘합성이나 시켜야겠어.’
각기 다른 생명을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내는 합성은 쓰레기들을 처리하기에 딱이었다.
가끔이지만 대작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까.
저 정도 인간도 재료로 따진다면 나름 상급이다.
주변의 인간들도 못 써먹을 정도도 아니고.
한데 뭉쳐놓는다면 나쁘지 않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드라칸의 시선이 거대한 철제 골렘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쿵
골렘이 발을 구르자 수십의 병사가 납작하게 짓눌렸다.
거체를 움직이며 몇백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는 골렘이 아니었다면, 저들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만약 거대한 풀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거인 기사가 있다면 저런 모양새일까.
흥미가 일 뻔했지만, 저것의 강함은 탑승자가 아닌 골렘 자체에 있다.
생명체가 아닌 철쪼가리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드라칸은 왼손 약지에 낀 황금색 손톱 장신구로 자신의 손에 생채기를 냈다.
그러자 피 한 방울이 흘러 손끝에 맺히더니 바닥을 향해 똑하고 떨어져 내렸다.
“옭아매라.”
낮은 읊조림이 그의 주위를 감싸듯 퍼졌고, 다음 순간 타이탄의 발아래로 가시 달린 넝쿨들이 솟아올랐다.
─콰직
고작 넝쿨에 불과하지만, 타이탄은 고장 난 듯 미동도 할 수 없게 됐다.
붉게 물든 핏빛 가시넝쿨은 점점 타이탄의 외골격을 좁히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탑승자가 타고 있는 부분을 으스러트렸다.
찌그러진 철골 밖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간들의 표정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지켜보던 인간도 마찬가지.
그는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로 분해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진짜 영웅이라면 이런 수세에 몰린 순간에 진가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걸 드라칸은 잘 알고 있다.
신들의 전쟁을 몸으로 겪고 수천 년을 살아온 자신조차 이 정도의 상황을 극복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좌절이 선사하는 무력감과 절망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칸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점점 수가 줄고 있었고, 자신이 눈여겨보던 이는 한쪽 눈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분명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하지만, 그의 다른 쪽 눈에서는 여전히 결여한 의지가 형형하게 빛을 냈다.
그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곳에 모여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는 인간들 모두에게서 희망이 느껴졌다.
‘어째서……?’
고개를 갸웃거려봤지만 그렇다고 답이 나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봐야 할 듯했다.
드라칸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인간들이 모여있던 곳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수천에 달하던 자신의 병사들이 굳은 듯 멈춰 선 것이다.
얼어붙어 석고가 되어 버린 듯 멈춘 피의 군세.
두려움에도 몸이 부서지는 고통에도 불사의 병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었다.
수천 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야 할 만큼 오래전의 기억.
‘그래, 본 적이 있다.’
패왕의 위엄.
자신에게 패배를 선사했던 인물이 지녔던 기술이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일인군단이라더니.’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굴욕적인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미묘한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진 드라칸은 새롭게 나타난 세 명의 인물을 눈에 담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인간들이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저들일 터다.
그중 가장 앞에선 자가 자신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놈입니까? 이 난리를 쳐 놓은 놈이.”
왜인지 기억 속의 그놈과 오버랩되어 보이는 남자.
이에 드라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기술을 썼기 때문일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저놈을 찢어 죽이지 못한다면……. ’
또다시 잊지 못할 굴욕이 새겨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
예상치 못한 참상에 호진은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100여 기가 넘는 골렘이 부서졌고, 엘리트로 분류되는 상위 헌터조 인원들 중 많은 수가 죽거나 다쳤다.
강화의 결전 병기로 분류되는 타이탄조차 파일럿이 죽어 운용이 불가능한 상태.
먼저 출발했다던 지원군은 적의 손에 되살아나 아군을 공격 중이었다.
옆에 선 용재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지랄 났네.”
이에 기서의 고개가 한층 더 푸욱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자라서…….”
“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저씨가 뭔 잘못이 있다고요.”
용재는 허겁지겁 기서에게 사과를 건넸다.
호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기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어 말했다.
“용재 말이 맞습니다. 기서 씨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셨어요.”
호진의 말에 위로나 과장은 없었다.
정말 기서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이 참상이 귀엽게 보일 정도의 괴물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띠링
「일인군단의 드라칸」
「전(前) 불사의 신의 사도」
「종족: 언데드」
「특징: 최초의 네크로맨서, 피의 공작, 일인군단 수많은 이명을 지닌 초월자. 한때는 인간의 영웅이었던 그는 불사의 신의 봉사자로서 수천 년간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어째서 사도급 괴물이…….’
굳이 감시자의 눈으로 정보를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지닌 격은 이미 사도 그 자체였다.
심지어 샴을 압도하는 고결하고 강력한 기운.
놈이 모시는 신, 데니토가 얼마나 강력한 신격인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쉽진 않겠네. 하지만…….’
호진의 시선이 죽어간 헌터들을 향했다.
마지막의 순간까지 물러섬 없이 적들과 싸운 흔적이 역력했다.
이에 호진은 어금니를 힘주어 물며 다짐했다.
‘약속했듯이, 대가를 받아내겠습니다.’
호진은 다시 시선을 돌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이를 노려봤다.
우연일까, 놈도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호진이 물었다.
“남길 말은?”
“없다. 그냥 뒈져라.”
드라칸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 장신구로 손바닥을 길게 그었다.
그러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붉은 바다와 같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곳에서 솟아오르는 핏빛의 기사단.
호진은 몰랐지만, 한때 인간 시절의 공작을 섬기던 왕국 최강의 기사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섬세한 조각처럼 검을 이마에 붙인 채 솟아난 기사들이 검을 바로 쥐었다.
그러곤 딛고 있던 곳을 폭발시키는 기세로 땅을 박찼다.
붉은 빛이 늘어나며 허공에 붉은 줄이 생겨난다.
잔상이 남을 속도로 놈들이 거리를 좁혀왔으나 호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놈들이 호진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스륵
그리고 놈들의 몸이 조각나며 돌연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달리던 속도를 줄이지 못했기에 호진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콰드득 우직끈
목뼈와 팔다리의 뼈가 부러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넓은 공간에 오직 적막만이 남은 순간 드라칸의 입이 열렸다.
“뭘 한 거지?”
“말해 줄 이유는 없겠지.”
호진은 짓씹듯 말을 뱉었다.
놈의 목에 칼을 박은 후라면 모를까, 지금 놈과 나눌 대화 따윈 없었다.
‘……그건 그렇고.’
새로 익힌 기술이 생각보다 더 쓸 만했다.
이번에 사용한 것은 조영검.
정수를 통해 습득한 기술을 틈틈이 익혀 습득한 것이다.
허공에 그어 놓은 검로는 분쇄기처럼 그곳을 지나던 놈들의 몸을 산산조각 냈다.
그런 호진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녀석은 돌연 입을 열었다.
“신들의 전쟁 시절. 북부 검의 교단에서 그런 검을 쓰는 놈이 있었지.”
“…….”
순간 호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녀석이라더니, 통찰력이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했다.
호진은 뭔가 기술을 하나 파훼당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재밌는 검을 쓰는군.”
말과는 달리 여전히 표정을 일그러트린 드라칸은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에도 저 검을 다루는 주인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끝내 손에 넣지는 못했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드라칸은 생각을 달리했다.
‘손에 넣어야겠어.’
그놈을 떠올리게 하는 녀석의 언행이 거슬렸지만, 생각해보면 그놈의 절반만큼만 해도 자신이 지닌 어떤 기사보다 강할 것이다.
“좋은 걸 보여줬으니, 나도 아끼면 안 되겠지.”
드라칸은 처음으로 호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여유로움과 오만함.
그것이 드라칸이라는 인물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들일 터다.
드라칸은 날카로운 손톱 장신구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러자 피가 쏟아지며 바닥을 적셨다.
“나오거라.”
아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드라칸이라해도 아무 적이나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피의 군세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들이 자신에게 귀속되는 주술이니까.
눈앞의 남자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재료다.
그렇기에 자신의 패를 전부 꺼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제국을 최강의 국가로 만든 푸른 사자 기사단.
고룡을 사냥하던 고대 바룩크툼의 용 사냥꾼.
성국의 가장 강력한 수호신 영묘의 기사들까지.
수십 개의 무력 집단이 드라칸과 호진의 사이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드라칸의 뒤로 백 명의 기사들이 나열했으니.
숫자가 붙은 기사들.
드라칸의 기사들이었다.
100부터 1에 이르는 넘버링을 달고 있는 이 기사들은 하나같이 한 시대를 호령한 영령들, 혹은 드라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합성의 산물들이다.
수천 년간 모아온 그의 군세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망을 선사했다.
땅끝에서 땅끝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을 붉은색의 군세로 가득 채운 그의 세계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드라칸은 낮게 웃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
호진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기다리던 많은 이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들의 눈동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 들어차 있었다.
“이거야 원.”
최대한 힘을 아끼려고 했는데, 그러다가는 장기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사람들의 믿음, 즉 격은 호진의 강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방금 전 동료들을 잃었다.
그들은 복수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호진이 해야 할 것은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부수는 것.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어설픈 방법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저 눈을 감았을 뿐이다.
격동적인 기의 흐름도, 요란한 소리도 없다.
하지만 이 공간의 모든 이들의 눈이 호진을 향했다.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존재감에 드라칸은 웃음을 멈췄다.
아니, 웃음을 얼굴에 지우지도 못한 채 굳어졌다.
세상이 온통 적막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일던 그 순간.
호진이 입이 작게 달싹거렸다.
“심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