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05화 (205/241)

205화. 일인군단 (4)

‘무전이 끊겼다.’

감시단 조장의 마지막 무전은 기서의 불안함에 마침표를 찍었다.

“……추가 정찰 보내봅니까?”

부관의 물음에 기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찰 능력에 한해서는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감시단이 모두 당했다.

이런 상황에 누가 간들 다를 것이며, 또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정찰을 보내는 대신 경계 태세를 최대로 유지하죠. 중상자가 아닌 생존자들에게는 무기를 지급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부관도 기서의 판단에 동의한다는 듯 빠르게 답한 후 밖을 향했다.

기서는 가장 남쪽의 감시탑에 서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경계를 유지했다.

그런 그의 뒤로 백여 기의 골렘들과 헌터 마흔 명이 모여들었다.

특별히 전투력이 뛰어난 자들을 이쪽에 배치한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북쪽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적이 있는 남쪽이니까.’

시간을 끌면 된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노을이 진 저녁 하늘.

기이할 정도로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한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 입니까?”

“…….”

부관의 물음에 기서는 답하지 못했다.

피로 젖은 붉은 망토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오연했다.

망토의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저 굳지 않은 많은 선혈을 방금 뒤집어썼다는 의미인데.

지금 저 남쪽에서 저렇게 신선한 피를 묻힐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원군이…… 당했어?’

고작 한 명에게?

기서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정신을 차렸다.

상황을 예단하는 것은 자신의 나쁜 습관이었다.

“정지. 누구십니까?”

“음?”

확성기의 소리를 들은 적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헌터들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모으다 움찔했다.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상대의 웃음소리가 가까이서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웃음을 멈춘 상대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정중하게 물어봤으니 답해줘야겠지.”

“…….”

꽤나 중후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다.

기서를 포함한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할 뿐.

정적 끝에 남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불사의 신의 전 사도였다.”

“불사의 신……?”

기서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 말을 따라 했다.

상대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하지만 왜일까.

놈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기서가 자신의 상태에 의아함을 느끼던 그 순간에도 남자는 자신의 소개를 이어나갔다.

“또한 최초의 네크로맨서이기도 하지. 사람들은 나를 피의 공작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이명은 따로 있지.”

그 순간 기서는 자신의 다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이다.’

감히 자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서의 거칠게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일인군단.”

대지에 붉은색이 번져나갔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의심하게 하는 광활한 피의 바다가 펼쳐졌다.

붉은 하늘과 맞닿은 피의 바다는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저 피의 바다 깊은 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요동치고 꿈틀대고 있었으며, 그중의 일부가 피로 이루어진 육신을 이끌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저 일부조차 군단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인군단 드라칸. 그게 내 이름이다.”

적막이 흘렀다.

앞을 볼 수 있으나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귀를 틀어막았다.

입이 있지만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현실의 감각을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피부에 와 닿는 저릿한 감각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기서조차 감히 싸워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순간.

무언가 그의 눈에 밟혔다.

익숙한 늑대와 사람들의 복장이다.

‘감…… 시단?’

그 이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어떤 이는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엔 늑대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이는 늑대의 뒷다리를 옆구리에 달았다.

하반신이 늑대고 상반신만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늑대와 몸이 뒤섞인 감시단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형상이었다.

─콰직

기서는 볼 안쪽을 강하게 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조금이지만 정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것이 호진이 누차 경고했던, 정신오염이라는 것일 터다.

신적인 존재들을 조우했을 때 느껴지는 허탈함과 무력감 그리고 좌절까지.

호진은 그런 상대들을 만나게 됐을 경우 도망치라 했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다면…….

‘감정과 의지력. 이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정신오염에 당한 감정을 더 강한 감정으로 밀어낸다.

이를테면 분노 같은.

“집중!”

기서의 뇌성벽력같은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텅 비고 멍한 시선들을 둘러본 기서가 짓씹듯 말을 뱉었다.

“저 앞에 선 이들을 보십시오.”

피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그 형상들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감시단 그리고 수천에 이르는 군인들과 헌터들.

놈의 손에 당한 이들 모두가 놈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기서는 이 사실에 분노하며 소리쳤다.

“아침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놈의 손에 죽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에 기세를 몰아 기서는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놈을 내버려 둔다면 우리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나아가 강화도에 남겨진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놈의 손안에 떨어질 겁니다.”

고장 난 듯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수천의 군세.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그들의 면면이 자신의 소중한 인물들로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이를 악물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가 강해진 이유. 그리고 싸워야 할 이유를 떠올리십시오. 죽는 그 순간까지 그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게 있다는 것을 상기한 덕분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 한 이들은 결코 꺾일 수 없었다.

기서 자신은 몰랐지만, 그는 지금 호진이 연설을 할 때와 똑 닮아 있었다.

오주호를 비롯한 호진을 아는 모두가 무의식중에 그를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호오.”

이를 지켜보던 드라칸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탐나는군.’

가진바 무력은 그저 그렇다.

기껏 해봐야 소국의 기사단장 정도일까.

하지만 그에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무리를 이끄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군단으로 끌어들인다면 제법 쓸만할 터였다.

그 뒤에 모여 있는 이들도 제법 노는 재미가 있어 보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겠군.’

이곳으로 넘어와 무의미한 학살만 반복한 덕에 질리던 참이었다.

필요 없는 원혼과 생명은 없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질 좋은 것들을 얻는 기쁨은 가히 양적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라칸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라.”

수천의 군세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

─쾅 콰광!

물밀듯이 밀려드는 붉은색의 군세를 향해 대포의 탄환들이 떨어졌다.

일부가 그것에 맞아 으깨지고 터져나갔지만, 정말 일부일 뿐이었다.

상위급 괴물들이 그렇듯 놈들은 화기류가 영 통하질 않았다.

‘젠장.’

수가 많은 만큼 약하기라도 바랐는데 턱도 없었다.

“골렘들 앞으로! 헌터 2, 3, 4, 5조는 대열을 갖추고, 헌터 1조는 대기한다.”

“예!”

부관이 재빠르게 다른 쪽에 분산된 병력을 이곳으로 모아올 것이다.

지금은 이곳보다 중요한 곳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을 막지 못한다면 모두 각개격파당할 테니까.

‘병력이 모두 모일 동안 버틴다.’

약함을 인정하고 버티는 것.

전략이라기에는 초라한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기회가 돌아오길 웅크리고 기다릴 수밖에.

적의 선두가 가까워졌다.

다른 이들보다 유독 빠른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감시단.’

사람과 늑대가 뒤섞인 놈들은 얼핏 보면 늑대인간을 연상케 했다.

놈들은 탄탄한 다리로 땅을 박차며, 공기를 총알처럼 찢어발기며 내달렸다.

다가오기 전에 수를 줄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라.

“주호야.”

“준비됐어요.”

주호는 투창용 단창을 오른손에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창 하나만으로 1조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주호는 남들과는 재능부터가 남달랐다.

창의 어디를 파지해야 무게가 앞으로 잘 실리는지.

어느 만큼 도움닫기를 해야 하는지.

팔을 얼마큼 뒤로 빼야 하는지까지.

배우지 않았지만 이미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완벽한 그의 투창이 스킬의 보정까지 받았다.

“보여줘.”

“맡겨주세요.”

주호는 가볍게 도움닫기를 한 왼쪽 발로 바닥을 찍는 동시에, 크게 젖혀진 어깨와 팔꿈치를 전신의 탄력을 이용해 당겼다.

─투확

공기가 찢어지며 날아간 단창이 달려오던 감시단 시체 중 하나의 몸을 관통했다.

“모두 투척!”

주호는 자신의 창이 적중하는 것을 확인 후 소리쳤다.

자신의 투창 사거리가 남들보다 긴 까닭이다.

명령과 동시에 투창에 일가견이 있는 다른 헌터들도 동시에 창들을 내던졌고, 나쁘지 않은 결과를 거두었다.

“감시단, 아니 적 선두. 10명 남짓 제외하고 모두 쓰러졌습니다.”

“수고했어. 다음 투척 준비해줘. 흘린 놈들은 내가 상대할게.”

“알겠어요.”

주호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단창을 꼬나쥐었다.

이를 지켜보던 기서는 다른 1조의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나머지 적 선두는 우리가 털어냅니다. 그 후는 골렘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예!”

가장 정신을 먼저 차린 1조는 흩트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신의 강함이 정신오염 내성의 척도라 보긴 어렵지만, 얼추 맞아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가죠.”

기서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날 아파트 옥상에서 보았던 호진이 보여줬던 검술에 매료되어 연습한 지도 반년이 넘었다.

아직 그와 비교하자면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한 검술이지만, 그럼에도 모두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슈칵

늑대의 팔을 한 감시단이 기서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뽑혀 나온 검이 번쩍이자, 붉은색의 팔이 투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거기서 검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춰선 안 됐다.

상대도 고작 팔 하나 잘린 것으로 멈추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이어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적을 세로로 쪼갰다.

이후로도 검은 멈추지 않고 잇따라 3명의 선두를 더 양단했다.

적을 분쇄하는 우직한 중검의 묘리가 놈들에게 효과적으로 통했다.

기서로서는 호진의 화려한 검술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택한 것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에 감사했다.

‘통한다.’

다른 선두들은 1조의 헌터들이 각자 맡아 처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뒤에 몰려오는 괴물들 뿐.

“골렘들 앞으로…….”

도훈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직

언제부터였을까.

뒤돌아본 그곳엔 강화 캠프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

골렘들이 솟아오른 붉은색 말뚝에 꽂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던 도훈의 귓가에 자신을 드라칸이라 소개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감들은 치워라. 그런 건 볼 생각이 없으니까.”

그제야 기서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자신들이 아니라, 상대에게 달려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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