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거미줄 위에서 춤을 (3)
울타가 이끈 곳은 호진이 방금까지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나무문이었다.
“그쪽은 시험장 아닙니까?”
“그렇단다.”
“……?”
호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설마하니 시험을 모두 이겨내면 울그렉 이후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걸까?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그녀가 만들어놓은 세계란다.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시험을 통과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
“…….”
단순한 규칙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대기실에서 포기하고 주저앉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 규칙을 착실히 지키며 정해진 길을 따라간다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게다.”
“그렇군요.”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시련의 던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탈출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시험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
이 세계를 만든 울그렉 이후트라고 해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규칙들은 지켜야만 한다.
시험을 모두 완수한 자는 보상과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거미줄과 같이 섬세하게 짜인 이 세계는 먹잇감을 낚기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허점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란다.”
울타는 반쯤 열린 나무문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첫 번째 허점은 인과율이다. 그녀라 한들 참가자가 결코 해낼 수 없는 시험은 낼 수 없지.”
“그 말씀은…….”
“아까 전의 시험들보다 난이도가 줄어들 거라는 말이란다.”
울타의 말에 호진은 다소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호진의 물음에 울타가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길을 안내하는 이유란다. 아이야, 너는 거미줄에 가로줄과 세로줄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들어본 것 같습니다.”
거미는 집을 지을 때 가로줄과 세로줄을 이어서 면을 만들어낸다.
이때 세로줄은 점성이 없지만, 가로줄은 점성이 있기에 벌레들이 그것에 낚이는 것이다.
“그녀가 내주는 시험은 가로줄이란다. 그 길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얽혀들고 끝내는 그녀에게 신격을 바치는 형태지.”
“그 말씀은…… 세로줄이 있는 거군요.”
집을 만들어낸 주인이 밟기 위해 만들어놓은 점성이 없는 거미줄.
즉, 그녀에게 향하는 길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울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잃어버린 힘도 되찾고, 이곳의 주인과도 만나게 될 게다. 하지만…….”
말을 멈춘 울타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호진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길의 안내까지다.”
걱정과 미안함.
이에 호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너무 자만했던 것이 문제다.
이곳에 들어온 것도, 울그렉 이후트를 없애기로 한 것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전에 준비도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들어온 것.
즉, 자만했던 것만큼은 아무리 후회해도 모자랐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솔직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기에.
호진은 천천히 손에 든 나무 막대기를 힘주어 쥐었다.
고작 허리 높이까지 오는 막대기일 뿐인데 묵직함이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자신이 약해졌다는 의미였다.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네.’
게이트가 터졌던 그날과 같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어리와 몸에 새겨진 기술들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자만했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죽고 말 것이다.
‘지금 내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호진은 반쯤 열린 나무문을 닫았다.
분노로 뜨거워진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몸은 얼마든지 달궈져도 좋다.
하지만 머리는 늘 차갑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호진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울타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호진은 천천히 기억을 되새기며 걸음을 밟았다.
초인 같은 힘을 만들어주던 스탯도 스킬도 없다.
가진 거라고는 오롯이 평범한 몸 하나뿐.
그렇기에 기억해내야만 했다.
예전엔 어떤 식으로 움직였고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둘렀는지.
이 몸이 가능한 것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지.
막대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일으켰다.
예전보다 느리다.
화려한 기교들은 쓸 수조차 없다.
작금의 힘과 능력으로는 투박하고 필요한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그럼에도…….
─쒜엑
호진이 휘두른 검이 허공을 예리하게 수놓았다.
투박한 나무 막대기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검이었다.
검로를 따라 움직이며 상대를 베는 이것이 검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용재와 도훈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릴 정도였다.
30분가량이 흘렀다.
고작 그 시간 동안 가볍게 움직이고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호진의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고작 이 정도로 땀이 이렇게 나다니.’
숨이 거칠고 입안에서는 달큰한 침이 고인다.
오래된 것도 아니고 고작 1년 전의 몸일 텐데, 한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막대기를 벽에 기대어 세운 호진은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묻어났다.
이렇게 땀을 흘려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형 괜찮아?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옆에서 호진과 함께 몸을 풀던 용재가 물었다.
그 질문에 호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오히려 기분이 너무 좋은데.”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수련을 한 기분이었다.
‘예전엔 늘 이렇게 땀을 쏟으며 검을 휘둘렀는데.’
과연 최근의 자신은 이렇게 수련에 진심이었을까.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그 핑계로 수련을 게을리했던 것은 아닐까.
문뜩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돌아가면 수련 시간을 더 늘려봐야겠다.’
이젠 필요 없다고 느꼈던 기본 수련들에서조차 분명 얻을 게 있을 것이다.
호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울타에게 말했다.
“가시죠.”
“준비는 충분히 됐느냐.”
“각오는 다졌습니다.”
“그럼 됐구나. 따라오거라.”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 문이 활짝 열렸다.
울타는 짧은 통로를 지나 석문 앞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우선은 이곳을 통과해야 한단다. 그래야만 내가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호진은 막대기를 고쳐 잡고는 석문을 열어젖혔다.
석문은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드르륵 밀려났다.
그리고 그 희미한 빛 아래에 익숙한 형체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칵차칵 차칵
“울타 님……?”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구나.”
호진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분명 울타는 전보단 시험의 난이도가 낮아질 것이라 했다.
지난번 첫 시험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고, 그렇기에 첫 번째 시험도 분명 어렵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것은…….
조랑말만 한 칠흑색의 개미는 카타나처럼 길고 날카롭게 벼려진 두 턱을 까딱거렸다.
예전의 처음 조우했을 때와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모습이다.
“이것도 개미라면 개미긴 한데.”
호진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웃음이 흘렀다.
상대는 무려 개미굴의 보스인 칠흑색 개미였다.
녀석을 상대할 때 호진은 레벨 5 정도에 스탯과 스킬도 여러 개를 얻은 뒤였다.
‘무기도 진검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막대기 하나와 평범한 신체가 전부다.
‘가능할까?’
호진은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해야지.”
호진은 손에 쥔 막대기에 힘을 꽉 주었다.
그때 용재와 도훈이 뒤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도울게.”
“아니, 잠시만 기다려줘.”
호진은 그런 그들을 멈춰 세웠다.
오래간만에 만난 극한의 상황.
예전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다.
호진은 이런 기회가 쉽게 찾아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혼자 해보고 싶어.”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련을 뛰어넘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정말 오래간만에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투쟁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불이 지펴진 호진의 눈동자를 보며 용재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렇게 된 이상 호진을 말릴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끼어들 거야.”
“그건 알아서 해.”
그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굴 생각도 없었고.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에 반응하여 칠흑색 개미 역시 천천히 호진과 거리를 좁혀왔다.
놈의 잘 벼려진 날카로운 턱과 번들거리는 외피가 눈에 들어온다.
부딪쳐봐서 잘 안다.
저 매끈하면서 단단한 외피엔 쇠로 된 진검조차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
그리고 저 턱에 스치기만 해도 쇠로 된 검에 이가 나가고, 살이 종이처럼 찢겨나갈 것이다.
호진은 놈과의 싸움을 천천히 머리에 그려 나갔다.
그사이 어느새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무기가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이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뚝 멈춰 섰다.
예의는 차리지 않는다.
이건 친선 경기가 아닌 목숨을 건 투쟁이니까.
녀석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렇기에 호진은 어떠한 신호도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늘 몸의 움직임을 매끄럽게 제어해주던 검술 스킬의 보정은 없다.
하지만 몸에 익은 동작은 누가 보아도 박수를 칠 만큼 깔끔하게 개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섬전과도 같은 일격에 개미는 황급히 물러나며 턱을 치켜들었다.
고작 나무 막대기가 자신의 외피를 뚫을 리 없을 텐데도 개미는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날카로운 턱에 막대기가 박혀 들기 직전.
호진은 물 흐르듯 막대기를 몸쪽으로 끌어서 휘둘렀다.
막대기는 턱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며 바닥을 향해 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춤을 추듯 막대기를 회수한 호진이 개미의 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리리릭!”
개미는 예상치 못한 접근에 놀라 황급히 몸을 빼며 앞발을 휘둘렀다.
개미에게도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덩치가 조랑말만 한 칠흑색 개미의 발톱은 이미 작은 낫과도 같았다.
하지만 호진은 사뿐히 걸음을 밟으며 그 공격을 물 흐르듯 넘겼다.
그리고 어느새 호진은 개미의 머리 옆까지 이동해 있었다.
개미가 황급히 몸을 비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우지끈
호진은 막대기를 개미의 머리와 몸이 연결된 가느다란 부위를 향해 휘둘렀다.
체중을 실은 완벽한 내려치기.
호진은 막대기가 놈의 목에 닿기도 전에 이미 확신할 수 있었다.
‘베었다.’
─툭 투둑
초록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개미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냈다.
분명 막대기로 베었을 텐데 베인 단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리했다.
그 단면을 살펴본 용재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형, 힘 잃은 거 맞아?”
기를 쓰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믿기지 않는 기예.
용재의 의심은 분명 타당한 것이었다.
그 물음을 들은 호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본인이 했음에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
“아니, 분명 힘은 잃었는데…….”
호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태창 하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