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일인군단 (1)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저분들이 어느새 여기까지 밀고 올라오셨더라고요.”
도훈의 물음에 용재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군대와 헌터로 이루어진 무리가 남은 시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얼굴이 익었다.
“청양 대표?”
“역시 알아보네요. 저 아저씨도 많이 세졌더라고. 고생 좀 했나 봐요.”
전말은 의외로 간단했다.
정말 좋은 타이밍에 충청도의 헌터들이 학교까지 도착했고, 해안가 쪽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용재도 지원을 위해 온 것이다.
“고맙다.”
도훈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감사에 용재는 손을 내저으며 도리질했다.
“아니, 뭘 했다고 고맙대요.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보다…….”
용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훈을 바라보며 이어 물었다.
“설마, 아저씨도 전직을……?”
“했다.”
“벌써 따라잡혔다고…….”
용재는 당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겨우 벌려놨다고 생각한 간격을 단숨에 추격해온 라이벌에 용재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고요해졌다.
움직이는 시체들은 헌터들에 의해 대부분 죽었고, 의식으로 힘을 많이 써서 지친 노인은 깊은 잠에 빠졌다.
잘린 팔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근데, 쟤는 괜찮데요?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용재는 걱정된다는 듯이 가을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을은 지금도 반쯤 무너진 건물에서 정좌를 한 채 의식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이에 도훈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친 곳은 없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다.”
가을은 할머니가 살아난 것을 확인하고, 몇 시간째 의식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의식이 끝을 향해감에 따라 더욱 힘이 드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저거 언젠 끝나는 건데요?”
“노인의 말대로라면 오늘까지라 했다.”
정확한 시간을 몰랐지만 이제 자정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자, 한동안 고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투둑
“음?”
용재는 볼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에서 굵직한 빗방울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비?”
도훈과 함께 건물의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던 그때였다.
─쿠르릉 쿠릉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며 어두운 하늘에 노란색 빛이 번쩍였다.
그 찰나의 순간 용재는 구름 사이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을 본 것 같았다.
“……방금 봤어요?”
“뭘?”
도훈이 되묻자 용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방금 하늘에 뭔가가 지나갔다니까요?”
“안 보이는군.”
하늘을 한참 빤히 지켜보던 도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오!”
이에 용재가 가슴을 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네가 본 게 맞을걸.”
“아잇 깜짝아!”
어느샌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목소리.
호진이었다.
용재가 깜짝 놀라자, 호진이 그의 머리에 손을 턱 하니 올려놨다.
“고생했다. 도훈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보고 있었나?”
“이후의 상황만요. 가을이의 시야가 공유되더군요.”
호진은 멋쩍게 웃으며 아까의 기억을 되짚었다.
***
호진은 가을과의 빙의가 해제된 후에도, 가을의 눈을 통해 그쪽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호진은 등대에 더 머물기로 했다.
아직 드루이드와의 약속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잠시 후.
“고생하셨습니다. 호진님.”
“끝난 겁니까?”
호진은 등대에서 지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드루이드에게 물었다.
이틀 전에 비하면 얼굴이 반쪽이 된 드루이드는 힘들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저쪽인데. 아무래도 잘 마무리될 것 같군요.”
태안의 상공에 감도는 거친 기운에 호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호진은 새삼 다른 신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꽤나 불쾌한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뭘 불러낸 겁니까?”
호진의 물음에 드루이드는 웃으며 답했다.
“이 땅의 주인이죠. 일종의 지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땅을 지키기에 이만큼 적합한 존재들도 없을 테니까요.”
호진은 등대 위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다를 내려봤다.
드루이드의 말대로 이미 저 아래에 무언가 있었다.
잠시 후 하얀 포말이 무수히 바다 위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빠르게 바다 아래를 헤집으며, 침입자들을 찢어발기고 있는 것이다.
그 찰나에 호진은 보았다.
길고 가는 수염과 푸른 빛을 품은 안광, 기다란 거체까지.
‘용!’
호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이세계에서 돌아왔을 텐데, 현실 세상에도 용이 있다니.
심지어 미약하지만 신격이 느껴졌기에 호진은 기가 찰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호진은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을을 바라봤다.
“가을이가 고생했습니다. 저 애가 아니었다면 컨트롤할 수 없는 괴물을 풀어놓을 뻔했어요.”
“그렇군.”
도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을을 살폈다.
어느새 의식을 마무리한 그녀는 정좌를 한 채로 졸고 있었다.
용재가 이를 보더니 무섭다는 듯 말했다.
“……자는 거 맞지?”
입에 머리카락을 물고 눈이 희번덕거리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는 않았기에, 도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노인의 옆에 바로 눕혔다.
그럼에도 많이 지친 탓인지 가을은 눈 한번 뜨지 않았다.
잠시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도훈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잊었네요. ‘그 단검’은 어디에 있나요?”
“이쪽이다.”
도훈은 대충 덮어놓은 옷가지를 치우며 단검을 보여줬다.
주인이 사라지자 쥐 죽은 듯 잠잠해진 단검.
하지만 호진은 그것이 연기임을 알았다.
단검의 폼멜.
그곳에 박혀있는 검은색의 돌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띠링
「불사의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
「종류: 재료」
「정보: 무엇으로 만들었을지 모를 돌은 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주워 담는다. 누군가의 개입으로 돌에 의식이 깃들었다. 끊임없는 식탐은 불사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다.」
「진행률: 42%」
저번에 본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과 같은 물건이다.
다만 그것보다 한층 더 흉흉한 물건.
저 진행률이 다 채워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분명 좋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 듯했다.
호진은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돌을 바라봤다.
‘간단하게는 안 되겠네.’
굴라의 존재가 돌에 담긴 영혼들을 붙잡고 있었다.
우선은 굴라를 처리하고, 영혼들을 정화하는 건 그 후다.
호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제서야 돌은 연기를 집어치우고 본색을 드러냈다.
─화르륵
마치 주변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타오르는 검은색의 불꽃.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불꽃은 호진을 덮쳤다.
‘이 정도였군.’
과연 직접 마주하니 도훈이 애먹을 만도 했다.
어설프지만 분명한 격을 지닌 존재.
사도 후보에 준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존재들을 여럿 베어 온 호진이었다.
이제 와서 이 정도의 위협에는 경각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는 검에 자신의 격을 담는다.
‘나의 근원은 베는 것.’
그것이 사물이건, 현상이건 혹은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존재한다면 베지 못할 것은 없었다.
호진은 불꽃을 향해 검을 어슷하게 휘둘렀다.
마치 높게 자란 풀이라도 베는 듯, 가벼운 동작.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걱
검에 깔끔하게 절단된 불꽃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불타오르던 돌은 이내 물에 젖은 수건이 덮인 장작처럼 식어버렸다.
호진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엔 황금색의 빛이 형형했다.
‘한 번 더 빌리겠습니다.’
여신의 자비로운 신격이 담긴 힘에 돌의 원혼은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회백색으로 변해 버린 돌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보였다.
‘뭔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호진은 잠깐의 고민 끝에 돌을 재차 인벤토리에 유기했다.
분명 나중에 어떻게든 채울 방법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호진의 눈에 어떤 것이 들어왔다.
‘맞다. 이게 있었지.’
자신을 북부 검의 교단 교구장이라 소개한 재의 기사 호넷.
그의 애병인 검 한 자루가 인벤토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급하게 챙기느라 제대로 확인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분명 그 빛은…….
호진은 검을 꺼내 들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검은 익숙한 푸른빛을 형형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검의 정수.
수개월 만에 만난 정수에 호진의 가슴은 아이처럼 설레었다.
호진이 서슴없이 검을 쥐자, 머릿속에 낯선 검술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정수를 흡수합니다.」
「조영검 검식 파편을 얻었습니다.」
「검식 파편: 조영검(照影劒): 0/10000」
‘떴다!’
기대했던 기술 그대로였다.
혹시나 다른 기술이 나오진 않을까 떨렸는데, 원하는 기술이 나왔다.
호넷의 조영검은 배울 수 있다면 꼭 배우고 싶었다.
상대의 공격을 무로 되돌리며, 보이지 않는 검의 잔재로 상대를 예리하게 베어낼 수 있다.
만약 익숙하게 다루게 된다면, 지금보다 한층 더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진정한 호진은 차분히 정수를 흡수한 검을 확인했다.
「이스티리온」
「종류: 양손검」
「정보: 요정들이 벼렸다는 폭풍을 부르는 검. 사용자에게 바람처럼 가벼운 움직임을 제공함과 더불어 검을 부딪치는 횟수만큼 공격의 속도가 증가한다.」
“……대박.”
호진은 끝내 참지 못하고 멍하니 탄성을 내질렀다.
호넷과 싸우며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검의 고유 능력이 자신의 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바꿔들 만한 메리트가 있었다.
‘이번엔 건진 게 많네.’
비록 시스템이 따로 보상을 측정해주진 않았지만, 이미 얻은 게 꽤 있었다.
호넷에게 이긴 후 레벨도 3개나 더 올랐다.
검의 정수로 새로운 스킬과 괜찮은 검도 얻었고.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돌멩이도 주웠지.’
무엇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얀 가면 놈들이 검의 교단이라니.’
놈들은 어째서 불사의 신에게 복종하게 된 것일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정보들이 모이다 보면 안 보이던 진실이 보이기 마련이다.
북쪽으로 올라가기 전에 가볍게 들리려고 했던 것 치고는 충분한 성과였다.
‘아, 그러고 보니 성과 하면 역시…….’
호진은 고개를 돌려 도훈과 용재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자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는 이들.
부산과 태안을 거치며 둘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됐다.
2차 각성과 더불어 격을 깨우친 까닭이다.
처음에는 어렴풋했지만 이젠 확실했다.
‘내…… 신격이 느껴진다.’
용재와 도훈은 호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봤다.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다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끝내 호진의 발자취를 쫓아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만약 끝을 의심했다면 도달하지 못했겠지.’
호진과 같은 믿음을 공유했고, 호진의 말과 행동을 맹신했다.
자신과 같은 신격을 공유하는 자들.
‘이를테면…….’
사도.
이들을 호진의 사도라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호진은 차분히 두 사람을 살폈다.
‘나와 근원은 다른가.’
두 사람에게선 호진과는 다른 각자의 근원들이 느껴졌다.
검을 숭배하고 베는 것을 근원으로 삼은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슴에 품은 것이다.
다만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그 믿음만큼은 함께 공유하고 있다.
호진이 위기에 몰렸을 때, 이 둘은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줄 터였다.
“곧 자정이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호진이 중얼거렸다.
비구름이 사라지고 노란 달이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협회에서 불사의 신의 세력의 침공을 예상했던 날이 됐다.
마음 같아선 곧장 이동하고 싶지만…….
도훈도, 용재도 그리고 함께 끌고 온 드루이드도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자. 충분히 쉬어 둬.”
“아싸!”
호진의 말에 용재와 도훈 그리고 드루이드는 한껏 기뻐했다.
호진은 기뻐하는 일행들을 보며 마지막 말을 억지로 삼켰다.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