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무녀와 신 (5)
“신을 찾다니, 뭘 어떻게 찾으면 되는 건데?”
가을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신내림이란 이렇게 졸속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림굿을 행하는 절차만 해도 며칠에 걸려 행할 만큼 규칙과 절차가 있다.
그런 가을을 향해 노인이 말했다.
“네가 큰 신들이 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네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뭐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믿음을 가지면 된다는 거야? 누굴 믿으면 되는데? 태상노군? 상제님? 설마 부처님이나 하느님은 아닐 거 아니야.”
가을이 호들갑을 떨자 노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입으로만 믿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애초에 네가 모시고 싶다고 오시는 분들도 아니고.”
“그럼 어떡하면 되는데!”
가을은 초조함을 못 이기고 목소리를 높였다.
용의 허물이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사라질 테지만, 하얀 가면은 계속해서 허물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아마도 그가 들고 있는 단검 때문으로 보였다.
하얀 가면이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일렁이며 흘러나왔는데, 그 불꽃이 탐욕스럽게 허물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당장은 허물에 집중 중이었지만 더 이상 먹어 치울 게 없다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일 것이다.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가을을 향해 노인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라. 그리고 떠올리거라.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하고 큰 존재를.”
“강하고…… 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을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이건 아니지. 다시. 다시.”
가을이 고개를 도리질하자 노인이 물었다.
“뭘 떠올렸느냐?”
“실수로 사람을 떠올렸어. 다시 할게.”
“사람 누구?”
노인의 집요한 질문에 가을은 답답하다는 듯 답했다.
“그게 왜 중요해. 에휴. 저번에 나랑 왔던 아저씨가 생각났단 말이야. ……그 아저씨 엄청 강했거든.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런 가을의 대답에 노인은 비로소 빙긋 웃음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내가 다시 물으마.”
“뭐? 뭘 다시 물어. 할머니.”
가을이 되묻는 것에 답하지도 않은 노인은 곧장 질문했다.
“네게 어느 신이 드셨느냐?”
“……어?”
가을은 당황했다.
이 맥락과 흐름 설마…….
가을은 홀린 듯 답했다.
“아저씨?”
그 순간, 강렬하면서 익숙한 신격이 온몸을 채웠다.
─띠링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신명이 없는 신의 무녀(巫女)로 전직합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결계 LV.1」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신내림 LV.1」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축마 LV.1」
「획득된 장비가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됐다…….”
가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난 며칠간 도훈의 지도 아래 레벨을 올리며 퀘스트까지 받았지만, 조건이 완성되지 못해 하지 못했던 전직이다.
선택지도 무녀라는 직업 하나뿐.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전직이 드디어 각성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가을은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뭘 해야 하는 걸까.
‘결계, 신내림, 축마?’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다름 아닌 노인이었다.
“잘했다. 그분의 신력이 느껴지는구나.”
“응, 근데…… 뭘 어떻게 해야…….”
가을이 노인에게 질문하던 그때였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강당 바닥에 너덜너덜한 비늘이 떨어졌다.
빛바랜 재만이 남은 용의 허물에서 신격이 소멸한 것이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허물일 뿐이었다.
발에 치일 가치조차 남지 않은 허물.
그리고 그 말은…….
“드디어 뒤졌네. 그나저나 우리 쪽 용이랑 비교하면 보잘것없는데? 길이만 엄청 길고. 사실 커다란 뱀인 건가?”
하얀 가면의 사냥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가을과 노인을 발견한 하얀 가면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네? 도망치지 않은 거는 칭찬해줄게. 귀찮게 했으면 곱게 죽이진 않을 생각이었는데.”
녀석은 딱딱하게 굳은 가을을 잠시 지켜보더니, 웃음기가 담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아까 책 던졌던 건 용서가 안 되네. 저 늙은이의 팔다리는 뽑아야 되겠다.”
“미친놈이…….”
가을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한 걸음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화가 났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힘을 얻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쓴다 한들 눈앞의 괴물을 상대로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그때 노인이 가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을 게다. 굿을 펼칠 시간도 뭣도 없으니.”
“그럼…….”
“그분을 불러올 수 있겠느냐.”
가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해 볼게.”
가을은 곧장 호진을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다.
자신의 목소리에 응답해주길 바라며.
반신반의한 기도.
그러나 그 결과는 의외의 것이었다.
[가을아?]
“호진…… 아저씨?”
가을이 얼떨떨해서 묻자 호진 역시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게 뭔……시스템이 너에게 강신을 하겠냐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아, 그게……!”
[그보다 군청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포탈도 안 열리고. 미치겠군. 내가 그쪽으로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호진의 말이 이어지던 그때, 하얀 가면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며 물었다.
“아까부터 뭘 혼자 중얼중얼. 듣고 있는 거냐. 저 늙은이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내가.”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 가을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설명하기 복잡한데 그냥 해 주세요! 저 죽어요!”
가을의 다급한 외침에 답이 없던 호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알겠다.]
다음 순간 가을이 머리를 툭 하고 숙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하얀 가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쳤거나 내가 우스운 모양인데. 팔 하나라도 날려주면 정신이 들겠지!”
하얀 가면은 들고 있던 단검을 가을을 향해 내던졌다.
노리는 건 오른쪽 팔.
자신에게 책을 던진 시건방진 팔이니 이쪽 먼저 잘라내는 게 도리에 맞았다.
가면 아래 비릿한 웃음이 내걸렸다.
약자를 유린하는 이 강함.
힘을 얻기 위해 평생 노력했으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와 차가운 죽음이었을 뿐.
하지만 재수 없던 자신의 삶에도 한 줄기 광명이 들었다.
불사의 신에게 선택받아 되살아난 것이다.
심지어 평범한 신도였던 자신이, 신의 은총을 받아 생전보다 몇 배는 강한 힘까지 얻었다.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내 앞길을 막을 수 없어. 그분일지라도…….’
하얀 가면이 기대에 찬 웃음을 짓던 순간.
─카랑!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투척용 단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비명과 절규를 기대한 그에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전혀 기대하던 장면이 아니었다.
뭐가 어찌 된 일인지, 소녀의 손에는 제단에 걸려 있던 환도가 들려있었다.
‘어느새?’
하얀 가면의 미간이 꿈틀거리기도 잠시 그는 더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가을은 옆에 선 노인에게 말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저도 놀라던 참입니다.”
가을, 아니 가을의 몸에 빙의한 호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정황을 살핀 뒤 말했다.
“오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가을이의 몸으로는 저놈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빙의한 그릇의 한계는 명확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들 방금 각성한 가을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도훈 씨와 함께 방법을 마련해 주시죠.”
“해 보겠습니다. 존자여.”
노인은 비틀거리며 도훈을 향해 걸어갔다.
이에 하얀 가면은 분노하여 소리쳤다.
“감히 날 앞에 두고……!”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목에 드리워진 예리한 검의 감촉.
급히 고개를 꺾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기에 목가에 기다란 상처가 났다.
“크윽!”
급히 물러나며 목을 더듬어 상태를 확인한 하얀 가면은 이를 뿌득 갈았다.
“네년…… 갑자기 무슨 수를 쓴 거냐.”
“글쎄. 그보다 경고 하나 할게.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살려주마. 하지만…….”
호진이 하얀 가면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을 해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죽일 거다. 새겨듣는 게 좋아.”
진득한 살의에 하얀 가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있는 것은 소녀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신격을 얻은 존재가 분명했다.
예전이었다면 두려움에 떨었을 존재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죽여주마. 우선은 그 몸뚱어리 먼저다. 그년이 의식이 돌아왔을 때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마.”
“…….”
호진은 놈에게 답하지 않고 검을 다잡았다.
놈과의 이야기는 무의미했다.
시간을 끌기 위해 더 떠들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놈도 이제 움직일 기세였다.
그 예상대로 하얀 가면은 휘어진 별 모양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끔찍한 기운.
수도 없이 경험한 불사의 신의 기운이었다.
그중에서도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호진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굴라(Gula)?”
시리온에서 만났던 식탐이라 불리던 존재, 사람들을 먹어 치우고 끝내는 자신의 아버지까지 먹어 치운 괴물의 이름이 호진의 입에서 되뇌어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하얀 가면이 경악하자 호진은 자신의 짐작을 확신했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시리온에서의 그것도 놈들이 준비하던 계획 중 일부였으니.
눈앞의 기운은 단검에서 느껴졌으니 완전히 같은 존재는 아닐 거고, 실패한 계획의 수정판 정도 될 것이다.
“가서 직접 물어봐.”
호진은 재빠르게 환령보를 밟았다.
순식간에 놈의 지척까지 다가선 호진은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젠장, 이게 왜 발동을…….”
이에 상대는 어렵사리 호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까와 같은 패턴임에도 상대는 쉽게 막아내질 못했다.
단검이 호진의 기운에 겁을 먹어 말을 잘 듣질 않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이 정도에 쩔쩔매는 것은 실력 문제였다.
자신과 싸웠던 호넷이라는 기사와 비교하면 하품이 나올 지경.
‘문제라면…….’
호진은 지금 무기도 아티팩트도 없을뿐더러,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몇 안 된다는 것.
고작 환령보를 펼치며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애초에 가을의 몸은 호진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한계에 가까웠고, 만약 신격까지 끌어다 쓴다면 가을의 속이 진탕이 될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환령보와 이화접목 같은 기술들뿐이었다.
그것들은 신격보다는 순수한 기술로 이루어진 묘리에 가까운 것들이었으니까.
‘죽이진 못한다.’
호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놈의 실력은 어설펐지만, 손에 들린 물건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은 호진의 기운에 겁을 먹고 조금 잠잠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회가 있다면 지금.
‘대신 팔 하나쯤은 가져가 줘야겠지.’
호진은 사납게 웃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