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무녀와 신 (4)
“미친놈.”
호진은 호넷에게 차갑게 욕을 내뱉으며 검을 다잡았다.
그렇게 자신의 본심을 숨겨야만 했다.
사실 호진도 지금 이 시간이 즐거웠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야만 하는 상대와의 대결.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호넷은 호진이 여태껏 만났던 존재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였다.
신의 사도나 후보라고 불리었던 존재들과 비견되는 강함.
하지만 그들과 명백히 다른 점이 있었다.
‘어떤 신의 권능도 빌리지 않은, 순수한 강함.’
그는 불사의 신의 봉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권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만난 하얀 가면을 쓴 이도 그랬다.
환령보도 그랬지만, 놈들이 쓰는 기술은 모두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 분명했다.
‘그땐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는 당장 사도의 역할을 부여받아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권능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분명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터다.
어쩌면 그들이 검의 교단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더 알고 싶다. 그리고…… 더 싸우고 싶다.’
순수한 단련과 검의 실력만으로 호진을 몰아붙이는 호넷과의 싸움은 배울 점이 많았다.
즉, 이 대결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도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을 끌 여유는 없어.’
호진은 눈앞의 호넷을 바라보며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놈의 말대로 지금 군청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으니까.
놈의 기술도 모두 파악한 지금이 싸움을 끝낼 적기였다.
“끝내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패도 전부 깐 참이고.”
호진의 중얼거림에 호넷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러곤 검을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그 움직임. 눈치채셨죠?”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답했다.
“공간이잖아.”
“역시.”
호넷은 들켰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공간.
놈의 기술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검을 휘두른다.
그러면 짧은 시간이나마 현실에 흠집이 났다.
공간을 베어낸다는 불가능한 이적을 그는 오직 순수한 검술로만 해내고 있는 것이다.
‘내 심검과 비슷하다.’
호진은 그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었다.
나름 비장의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을 상대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리라.
물론 심검에 비하면 훨씬 약하고 가볍다.
발동하는 원리에도 큰 차이가 있고.
하지만 위력이 약한 대신 호넷은 훨씬 더 여유롭고 유동적으로 기술을 다루고 있었다.
호진의 공격은 놈이 그어놓은 공간에 족족 집어삼켜졌고, 나아가 호진의 검로를 방해하거나 보법을 제한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놈의 능력을 파악할 때까진 몸으로 부딪쳐야 했고, 그 값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주륵
호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어느새 바지춤을 모조리 적셨다.
천만다행으로 내장에는 검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살 부분이 움푹 잘려 나갔고 덕분에 비집고 나오려는 창자를 간신히 우겨 넣어놓은 상태였다.
만약 누군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호진이 지고 있다고 평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호진은 조금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고, 우습게도 그건 호넷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사의 각오로 임하고 있다지만 그도 자신이 수세에 몰렸다는 사실을 지극히 잘 알고 있었다.
“뭐 그래도 당신 같은 괴물한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하려나요.”
호넷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호진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기에 호넷은 곧바로 검을 다잡았다.
‘온다.’
눈에 익은 보법이다.
분명 환(幻)검으로 유명한 동부 검의 교단에서 사용하는 보법.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익힌 건지.’
호넷도 상대에 대해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의식이 위기에 빠진 순간부터 영 질문에 응해 주질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척으로 다가온 호진이 검을 휘둘렀다.
정면에서 내리치는 검을 호넷은 정확하게 튕겨냈다.
하지만 튕겨 나간 검은 기다렸다는 듯이 되감아져 호넷을 몰아붙였다.
‘단순히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내가 손해다.’
검이 교차할 때마다.
피부가 갈라지고 하얀 서리가 속눈썹에 끼었다.
지금은 이 수준이지만 조금만 더 합이 길어져도 동상으로 근육이 경직되고 몸이 굳을 것이다.
한눈에 알아보기는 했지만, 역시 저 대검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부러움도 잠시, 호넷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검에게 사과했다.
평생을 자신의 반려로 삼아온 애병.
상대의 것과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후세에 사람들에겐 자신의 이름보다 이 검의 이름이 더 알려졌을 정도의 물건이었으니까.
우직함을 신봉하는 북부에서 자신처럼 쾌검을 다루는 이단아가 나온 이유도 모두 이 녀석 때문이었다.
‘이스티리온’
요정이 만들었다던 이 검의 의미는 ‘폭풍을 부르는 자(Stormbringer)’.
사용자에게 바람처럼 가벼운 움직임을 제공함과 더불어 검이 부딪치는 횟수만큼 공격의 속도가 증가하는 검이다.
쾌검을 다루는 검사라면 누구나 욕심낼 법한 성능이지만, 아까도 말했든 검을 오래 교환하는 건 호넷에게 불리했다.
그렇기에.
‘동상으로 몸이 굳기 전에 속도를 끌어올려서…….’
호넷은 차분히 검을 맞받아치며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금!’
가장 완벽한 순간에 검을 휘둘렀다.
생전엔 완성하지 못하고 얼마 전에야 벽을 넘으며 간신히 완성한 기술.
조영검(照影劒).
그 진가는 검이 지나간 후 남은 공간의 비틀림에 있지만, 검 자체에도 그 공간을 가르는 힘이 담겨 있다.
‘닿았……!’
─스륵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일렁이는 상대의 신형.
환령보의 묘리가 극에 달한 자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환영이었다.
호넷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순간을 상대 역시 예측하고 함정을 판 것이었다.
‘미치겠군. 하지만…….’
호넷은 재빨리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쌓아 올린 그간의 경험으로 뒤를 돌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불꽃과 함께 손끝에 묵직한 검의 촉감이 느껴졌다.
기적적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순전히 경험과 감에만 의지한 도박에 성공한 호넷은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돌아본 호넷의 표정은 기이하게 굳어졌다.
‘검은색…… 안개?’
자신과 검을 맞부딪친 상대는 보이지 않고 남은 건 검은색의 안개뿐.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안개 속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은 도무지 어디서 날아들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환령보가 아닌 다른 능력.
기나 마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권능이 분명했다.
무슨 신과 계약한 걸까.
‘분명 예전 신들의 전쟁 때 들어본 적이 있는 능력이었는데. 남쪽이었나……?’
호넷은 사선을 넘나들며 검을 막으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곧 파훼의 길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움찔
상대의 권능을 떠올리는 것보다 한계가 먼저 찾아오고야 말았다.
자신의 생각보다 느리고 둔하게 반응하는 팔.
반응이 늦은 바람에 어깻죽지가 길게 베이고 말았다.
물론 출혈은 없다.
이미 죽은 시체라서 좋은, 몇 없는 장점이었다.
더 이상 아낄 수는 없었기에 호넷은 강제로 손패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서걱
검은 안개를 하나둘 베어 나갔다.
공간조차 가르는 조영검은 호넷을 감싼 안개들을 무(無)로 흩어 버렸다.
마지막 안개를 가르며 호넷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호진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런 영악한…….”
검은 안개들을 흩어버리며 조영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는 사실을.
─서걱
예리한 절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검을 쥔 자신의 손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대검을 집어넣고 도를 들고 있는 상대가 보였다.
“방금은?”
“절 베기. 내가 가진 기술 중 가장 오랜 기간 연마한 거야.”
“역시 당신이랑 싸워서 좋았어요.”
“나도 너와 함께 싸워서 즐거웠다. 그럼.”
일렁이며 사라진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호넷의 뒤쪽이었다.
“이만 쉬어라.”
베인지도 몰랐다.
호진의 말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목이 떨어진 후.
고통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받은 배려에 호넷은 생각했다.
마지막 상대가 그여서 다행이었다고.
***
비늘 자국이 선명한 하얀색 허물이 단검과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비등해 보이지만 검에 부딪힌 허물의 일부분이 검은 불꽃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허물 여기저기 난 구멍은 노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도우러 가야 하는데.’
도훈은 혀를 차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시체들을 베어 나갔다.
노인의 결계가 사라지면서 주변의 시체들이 몰려든 것이다.
충분히 수를 줄여놓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아직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빠져나가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노인과 가을이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도훈이 아직 살아 있는 것도 시간을 끌어 준 노인 덕분.
그러니 더더욱 혼자 도망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정작 도훈은 시체들의 방해 때문에 노인을 돕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도훈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눈여겨보던 노인은 가을을 불렀다.
“가을아. 할미가 할 말이 있다.”
“어어, 말해!”
가을은 할머니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에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보다시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한평생을 모셔 온 신의 신물까지 사용했지만, 상대는 무섭도록 강했다.
단검에서 솟아난 일렁이는 불꽃은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그건 신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이 용이 된 존재의 허물에 깃든 신은 불꽃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옛 저녁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아무리 희미한 희망에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렇기에 노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저 사람을 도와야 한다.”
“내가?”
가을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도훈이 다시 몸을 일으킬 때까지만 해도 뛸 듯이 기뻤지만, 그건 그거고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를 돕는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아니, 그보다 무슨 수로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자신은 이틀 전 각성한, 그전까지는 평범했던 여고생에 불과했다.
심지어 각성조차 써먹지 못할 반쪽짜리 각성이었다.
노인은 불안해하는 가을에게 말했다.
“할 수 있다. 너는 내가 보아온 어떤 이들보다 큰 그릇을 지닌 아이니까.”
“어?”
가을이 벙찐 표정으로 답하자 노인은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내림을 받아라.”
“내림? 설마……?”
“신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가을은 한층 더 동요했다.
이제껏 할머니는 자신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내림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왜, 이제 와서?”
가을의 물음에 노인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가 모실만한 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꼬이는 것이라곤 온갖 잡귀부터 격 떨어지는 신들뿐이었으니까.”
“지금은?”
가을의 물음에 노인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 한번 같이 찾아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