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무녀와 신 (3)
‘어떡하지……?’
가을은 도훈이 삽시간에 당하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새하얘졌지만, 다행히 다리가 먼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던 가을은 심호흡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곱씹었다.
지금 도훈을 도우러 가는 건 무리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구하러 가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어버릴 터였다.
갈 곳은 오직 하나.
할머니가 있는 강당이다.
‘할머니에게 위험하다고 알려야 해. 가장 안전하기도 하고.’
가을은 어렵지 않게 바리케이드와 잠금장치들을 작동시키며 강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잠깐 시간은 끌겠지만,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을 터.
“할머니 밖에……!”
“조용.”
가을이 가쁜 호흡에 가슴을 들썩이며 다급하게 소리치려던 그 순간, 할머니는 단숨에 말을 끊었다.
“밖의 상황은 알고 있으니 소란 떨지 말거라.”
“……어어.”
가을은 침착한 할머니의 모습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쿵 소리와 함께 군청의 건물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동시에 강당 안에 쳐놓았던 붉은 색의 줄들이 빠르게 검은색으로 삭기 시작하자,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쯧. 도대체 얼마큼…….”
낮게 중얼거린 노인은 가을을 향해 말했다.
“축귀경을 기억하느냐.”
“어? 어 대충은…….”
가을은 할머니의 성황에 못 이겨 외웠던 경전들을 빠르게 되짚었다.
미신이라고 생각해 진지하게 배운 적은 없지만, 할머니랑 싸우느니 해준다는 느낌으로 주입식으로나마 외웠었다.
“어설프게 할 거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 할 수 있어!”
가을의 대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내가 옥갑경을 외는 동안 옆에서 축귀경을 외거라.”
“응!”
노인은 가을의 대답과 동시에 작지만 또렷한 소리로 경을 중간부터 읊기 시작했다.
“……뇌부총명 사자신장은 요귀 사귀 흉귀 악귀 이매망량 범사귀신 등물을 개개결박 착래하야 이법신병들은 대도로 요참하라.”
경을 외우며 노인은 한치의 흩트림 없이 북을 두들겼다.
이에 질세라 가을도 재빨리 경을 외기 시작했다.
“청사원사진군 육정육갑제대신장 오방영신사자 동방청제사자 남방적제사자 서방백제사자 북방흑제사자 중앙황제사자등은 각솔귀병하야…….”
강당에 경이 맑은 울림으로 퍼져나가며, 붉은색 줄은 더 빠르게 삭아갔고 방울은 요란을 떨며 울려댔다.
한 겹 두 겹.
어느새 강당 안에 꼼꼼하게 둘렀던 붉은 실들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강당은 온통 붉은색으로 빛났다.
─덜컹!
이젠 아예 강당의 문이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가을은 이를 악물고 경을 외웠다.
‘거의 다 했어. 거의…….’
그 순간.
“천지일월 오방오제 백만대신 제성신 일체신장개래권희 수봉행 강현선생 오법정행 착례이거 화이미진 옴 급급 여율령 사바하.”
노인의 경이 마무리됐다.
─쿵!
그러자 밖에서 큰 소리가 한 번 난 뒤 사위가 고요해졌다.
완벽한 적막.
비단 적막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과 외부가 완전히 단절된 듯한 감각에 가을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노인이었다.
“도망치거라.”
“……어?”
“이 정도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다.”
“뭐? 그럼 같이 도망쳐야지!”
“할미는 의식을 완성하는 대로 따라가마.”
가을은 할머니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도훈도, 할머니도 걱정되었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느니 차라리 항구나 학교 쪽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노인은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내가 손주 하나는 잘 키웠군.’
만약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의식? 제 시간까지 마칠 수 없다.
분명 그전에 결계가 깨질 것이다.
그렇기에 노인은 소녀만이라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고얀 것. 금방 따라간다니까. 할미를 못 믿는 게냐.”
“이때까지 할머니 말 한 번도 믿은 적 없었는데? 스무 살 되면 신내림이고 나발이고 서울로 튀려 했지.”
“……빨리 가기나 하거라.”
“응!”
가을이 힘차게 끄덕이며 비상구 문을 열려던 그 순간.
─쿵!
강렬한 진동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설마……?”
가을이 고개를 돌리는 그때 강당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벌레들이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리는 꼴이란. 그 건방진 팔다리를 뜯어내 주마.”
예의 하얀 가면이 비릿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
“뒤로 오거라.”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싸운다 한들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터이나.
지금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진다면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죽고 말 것이기에, 노인은 가을을 불러들였다.
‘도대체 어찌 이리 삿된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매망량을 쫓는 경을 중심으로 수일간 준비한 진을 펼쳤다.
수천의 군대를 농락했다던 진법이 이 짧은 시간에 깨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뭐야, 도망 안 쳐?”
하얀 가면은 강당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뭐가 우스운지 키득거리더니 손에 든 단검을 공중으로 띄웠다 받기를 반복했다.
“어떤 걸 먼저 죽일까? 역시 이쪽이지.”
떨어지던 단검을 낚아챈 하얀 가면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단검을 내던졌다.
단검의 형태를 띠고 있던 그것은 날아오는 사이 점이 됐고, 점은 선이 되어 어느새 가을의 지척까지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가을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단검을 보며 죽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쩌엉
귀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단검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
“……어?”
가을은 이에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얀색의 흐릿한 형체가 단검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거북이?”
단단한 견갑과 머리에 삐죽 솟은 뿔,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부리한 눈까지.
거북이보단 용과 비슷해 보이는 흐릿한 형체가 자신과 할머니를 지키듯 서 있었다.
“용귀야.”
저 삿된 것을 물어뜯거라.
노인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거북의 목이 쑤욱 늘어나 하얀 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하얀 가면은 여유롭게 뛰어올라 거북의 목을 피한 뒤 단검을 내리그었다.
“이깟 파충류로 뭘 해보겠다고…….”
하지만 하얀 가면은 차마 그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카각
단검이 거북의 비늘을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얀 가면의 기세가 한껏 더 사납게 날뛰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래서 검 따위는…….”
하얀 가면은 손에 쥔 단검을 내던지더니, 희한하게 생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저건……?’
노인은 그 단검을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별처럼 휜, 칼이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까운 예식용의 검.
그것에는 정면에서 바라보기에도 힘든 부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한번 공격에 실패했던 거북이 다시금 하얀 가면을 향해 돌진했다.
노인은 그런 거북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용귀야 위험……!”
“먹어 치워라. 탐.”
─으직
한순간이었다.
단검에서 검은색의 그림자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거북의 머리가 싹둑 잘려 나갔다.
비틀거리던 거북은 그대로 허공에 흩날리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런.”
노인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하얀 가면의 단검이 휘둘러졌다.
─으지직
마치 인형의 팔이 뽑히듯 노인의 팔이 뜯어졌다.
거북과 달리 살아있는 몸에선 붉디붉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하, 할머니!”
이에 가을이 사색이 되어 할머니를 향해 달려가 붙들었다.
입에선 쉬지 않고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짖으면서.
비틀거리던 노인은 그런 가을에게 안심하라는 듯 손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노인은 말과는 달리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준비해 둔 것을 모조리 사용했다.
무엇보다.
─우웅
진동과 함께 거친 기운이 공중에서 터져나갔다.
방금 수일간 준비했던 의식이 흐트러진 것이다.
‘이대로는 실패는커녕 역살이 온다.’
드루이드와 준비 중이던 의식은 삿된 존재들을 물리치는 의식.
그것이 폭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으로선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의식을 준비하던 자신과 드루이드는 죽고 말 것이다.
‘그 녀석까지 죽게 만들 순 없지. 무엇보다 가을이만은…….’
노인이 한 줄기 희망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강당의 문밖.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한 인물이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살아 있었나.’
호진만큼은 아니었지만, 도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의 힘도 분명 인간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저 자라면 변수를 만들고 기적을 일으켜줄지도 모른다.
노인은 가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을아.”
“할머니, 어떡해. 피! 우선 피를 멈춰야 하는데…….”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네가 이어 나가야 한다.”
“뭐, 뭘 이어 나가?”
“의식 말이다.”
의식만 완성할 수 있다면, 눈앞의 괴물은 물론 이곳을 지켜낼 수도 있을 터다.
“저 초록색 가닥이 보이느냐.”
강당의 외벽을 뚫고 밖과 이어지는 초록색의 실 가닥.
가을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손주. 저걸 어떻게든 붙잡거라.”
재능만이라면 자신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보인다면 어찌 붙잡고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드루이드가 해결해 줄 테니까.
부족한 것은 시간인데…….
부디 도훈이라는 사내가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 다음은 어디를 먹고 싶니. 탐?”
하얀 가면은 싱글거리며 단검에게 말을 걸었다.
이에 단검은 휘어지며 노인과 가을을 동시에 가리켰다.
“욕심 하나는 알아 줘야겠네. 근데 그건 안 돼. 재미가 없거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성정.
그러나 그렇기에 아직까지 노인과 가을이 살아있을 수 있었다.
만약 놈이 평범하게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둘 다 죽었을 거다.
노인은 용의 허물로 만든 신물을 집어 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신이시여.”
이를 지켜보던 하얀 가면은 질린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꿈틀거리는 거야? 늙어서 그런가 끈질기네.”
“네놈 하나 데리고 가기에는 부족함 없을 게다.”
노인은 하얀색 천을 어깨에 둘렀다.
그러자 두둥실 떠오른 천이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노인은 자신의 신과 마지막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의식이…… 다시 이어졌다고?’
북부 검의 교단의 교구장 호넷은 거친 숨을 터트리며 경악했다.
폭주시킨 의식은 분명 등대에 있는 주술사 혼자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군청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노인을 죽이지 못한 걸까?
“왜? 뭐가 생각대로 잘 안 되나 봐?”
그때 호진이 차갑게 웃었다.
그도 의식이 진정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허세군요.”
“……뭐?”
호넷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왜 의식이 다시 시작됐는지, 그쪽도 이유를 모르잖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뭐,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싸움에 집중해 주시죠. 제 마지막 싸움을 다른 것에 방해받고 싶진 않네요.”
임무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물론 임무를 완성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런 대결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는 것에 호넷은 충분히 만족했다.
‘강해. 너무나.’
인간의 시절에 수십 년.
되살아나서 수백 년.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낱낱이 파훼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수 분에 지나지 않았다.
호넷은 눈앞의 상대와의 싸움이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친놈.”
그런 호넷을 바라보던 호진은 욕을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