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무녀와 신 (2)
─삐이이이이
먹먹함이 가득한 귀에 이명이 울려 퍼졌다.
도훈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쿨럭!”
멈췄던 숨이 터지며 입안에서 무언가 뿜어져 나왔다.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흙과 먼지들을 뱉어내자 공기가 폐로 유입됐다.
“커어어억, 컥!”
도훈은 공기에서 단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뇌부터, 장기 나아가서는 피부의 세포 하나까지 서로가 먼저 공기를 달라며 아우성쳤다.
도훈은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켰다.
탐욕스럽게 산소를 갈구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정신이 돌아온 도훈은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필름이 끊긴 듯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 준비는 충분했다.
호진이 떠나고 도훈은 쉬지 않고 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왜…….
─아드득
‘생각은 나중에.’
도훈은 어금니를 소리 나게 악물었다.
준비가 어쨌건 자신이 지켜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계속 이렇게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움직여야…….’
도훈이 이를 악물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그 순간 이명이 옅어지며 주변의 소음이 조금씩 고막을 울렸다.
“……니! ……할 ……니! 할머니!”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피를 쏟아내는 노인과 우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 장면이 도통 현실 같지 않아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TV 속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아득했다.
도훈은 두통이 이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동시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방금 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
“……저게 다 괴물들이라고요?”
“준비는 충분하다.”
“아니, 하지만…….”
가을은 불안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도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장난을 치긴 했었지만, 침착하며 진지한 도훈은 의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군청의 옥상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누구라도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끝이 없는데요?”
어디서 저렇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건지.
호진이 향한 해안가의 반대쪽에서 적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미 군청의 사람들은 김 선생님의 안내 아래 학교 쪽으로 대피한 지 오래다.
반대로 말하면 군청에 남은 사람은 가을과 가을의 할머니, 그리고 도훈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의식인가 뭔가 한다고 하는 중이고…….’
결국 남은 건 도훈 하나.
그가 저들을 혼자서 막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가을은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이제 막 각성한 참에다가 얻은 능력들은 죄다 못 써먹는 것뿐이지만, 혼자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었기에.
“됐다. 거기서 지켜보기나 해라.”
도훈은 단호하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가을은 지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옥상에서 돌을 던지는 건 어떨까요? 저 이래 봬도 캐치볼 좀…….”
“캐치볼은 상대가 공을 잡으라고 던지는 거다. 머리를 터트리는 거랑은 다르지.”
“……그렇긴 하죠.”
도훈은 시무룩해진 그녀를 뒤로하고 군청 정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자잘한 적들은 노인의 결계를 뚫지 못했다.
괴물들의 수를 줄이며, 위험한 녀석들을 처리하는 게 도훈의 역할이었다.
‘몇 명 보이는군.’
부산에서 보았던, 불사의 신과 직접 계약한 계약자들.
노인에 의하면 저들은 결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무리의 선두에 서서 소리쳤다.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투항하라. 이리 걸어 나와. 신의 자비에 감사하라.”
‘우선 한 놈.’
도훈은 미리 설치해 두었던 트랩의 실을 당겼다.
─끼릭
활의 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은빛의 실들이 교차했다.
그러자 정문에서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던 녀석의 머리가 그대로 뽑혀 나갔다.
녀석의 주위에 있던 녀석들까지 함께 피 분수를 뿜으며, 정문은 말 그대로 피에 젖어 들었다.
─ 멈칫
잠시 멈칫거렸던 시체들은 정문의 함정을 피해 벽을 부수고 담을 넘었다.
텅 빈 동공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의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안개가 끼었으면 좋았겠군.”
지난번 안개 속 도훈은 자유로웠다.
원하는 대로 모습을 숨기고, 적들을 기습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사방에 설치해 둔 실들이 적들의 위치를 알려줬지만, 상대 역시 도훈의 위치를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도훈의 아쉬움은 짧았다.
“결과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도훈은 미리 설치해 두었던 백 개가 넘는 트랩들과 늘어난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뽑은 단검 두 자루가 예리하게 빛났다.
도훈은 숨을 깊이 들이쉬곤 번개 같은 속도로 단검들을 쏘아냈다.
그러곤 곧장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은색으로 빛나는 수십 개의 선이 허공을 수놓는가 싶더니, 피 보라가 퍼져나갔다.
***
“……미쳤네.”
옥상에서 바라보는 가을은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괴물들 한가운데 선 도훈은 자신을 중심으로 붉은색 피 보라를 일으켰고, 한겹 한겹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피들은 장미의 꽃잎을 연상케 하기 충분했다.
또한 던진 단검들은 반드시 하나 이상 괴물의 목을 꿰뚫었고, 곳곳에 설치된 트랩들에 괴물들은 죽거나 돌아가느라 군청 본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언제 저런 것까지…….”
가을은 도훈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무엇인지는 자세히 몰랐기에 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십 개의 줄을 몸의 일부처럼 다루며, 돌아오는 단검들을 낚아채 다시 던지는 기예는 어느 서커스보다도 화려했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혼자 다 잡는 거 아니야?”
벌써 수백의 괴물들이 도훈의 발아래 쓰러졌다.
고작 수 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종종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강해 보이는 적들과도 맞붙었지만, 도훈은 매번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적들을 쓰러트렸다.
위험하다 싶으면 대포를 닮은 총을 쏘거나.
섬광탄을 터트리거나.
코트 속에서 매번 기발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도훈은 어떤 적을 만나도 기다렸다는 듯 대책을 내놓았다.
“……뭐야. 괜히 걱정했네.”
가을이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서려는 그 순간, 뭔가 이질적인 장면이 눈에 밟혔다.
‘가면?’
하얀색 가면을 쓴 사람 하나가 자신처럼 도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그시 움직이지 않고.
마치 바라보는 게 그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
왜인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도훈을 지켜보는 것뿐인데, 그 사실이 너무나 불안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훈을 지켜보던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녀석은 곧장 도훈을 향해 다가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뭐야? 괜히 걱정한 건가.’
저렇게 다가가면 도훈이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가을은 계속해서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됐다.
‘왜……?’
왜 모르는 걸까.
이젠 정말 위험한 위치까지 놈이 다가섰는데도, 도훈은 하얀 가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줘야 해.’
고민은 짧았다.
가을은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냉큼 아무거나 주워들었다.
‘책은 무기다’
하드 커버가 씌워진 양장본의 인문학 서적.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묵직한 느낌이 손에 감기는 느낌이었다.
될지 안 될지 고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을은 일단 저지르고 봤다.
‘작가님이 이런 의도로 쓰신 책은 아니겠지만…… 뒤져라!’
─휘릭
그녀의 손끝에서 날아간 책은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낙하했고.
그 결과…….
─콰직
목표에 명중했다.
책에 맞음과 동시에 비틀거리는 하얀 가면의 인물.
“됐다!”
가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책 제목이 제목이라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캐치볼 실력이 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됐다.
덕분에 도훈도 하얀 가면의 존재를 눈치챘는데, 그는 가을이 책을 던져서 놈을 맞춘 것을 깨달았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도훈은 가을을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여 감사를 표하곤 하얀 가면의 상대를 마주 봤다.
***
“이런…… 개 같은. 있는지도 몰랐던 버러지 년이.”
하얀 가면을 쓴 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한 게 분했는지, 욕을 거칠게 지껄이고 있었다.
이에 도훈은 덤덤하게 답했다.
“본인이 당해 놓고 그렇게 말하면 스스로를 욕하는 거 아닌가?”
“…….”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하얀 가면은 침묵했다.
그러기도 잠시, 녀석은 재차 분노를 토해냈다.
“그러는 네놈은 운 좋게 살아 놓고선 뭐가 그리 잘났지? 어디 더 지껄여봐라. 내가 그 아가리를 찢어놓으며 더 하고 싶어도 못 할 테니.”
하얀 가면은 두 개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삐죽삐죽한 날붙이가 붙은 단검은 마치 휘어진 별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단검?’
보조 무기라면 모를까, 단검을 주 무기로 쓰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세웠다.
어찌 됐든 상대는 호진이 찾아 헤매던 하얀 가면이다.
물론 시리온에서 만난 녀석과는 달랐다.
눈앞의 녀석은 놈보다 체구가 작고 말랐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충분히 위험한 녀석들이었다.
‘전력으로 간다.’
도훈도 단검 두 개를 빼 들었다.
투척과 동시에 실들을 최대로 전개.
마침 놈이 선 위치도 트랩의 위다.
‘그것까지 모조리 사용해 휘몰아치듯 압박하며 근접해 핸드건을 쏜다.’
도훈은 상체를 튕기듯 단검을 빛살처럼 쏘아냈다.
상대는 그것을 귀찮다는 듯 한 손으로 쳐냈지만, 낙심하진 않았다.
아니, 낙심할 시간조차 없었다.
실들을 최대로 뽑아내 상대의 급소 스물네 군데를 단숨에 찔러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아껴뒀던 트랩을 발동시켰다.
하얀 가면의 발밑에서 뼈조차 녹일 수 있는 난쟁이들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도훈은 방심하지 않고 그대로 핸드건을 당겼다.
─콰앙
여느 때와 같이 공기를 떨게 하며 불을 뿜는 핸드건을 보며 도훈은 생각했다.
‘큰일 났군.’
상대의 무기만 보고 잘못 판단했다.
분명 방어력이 약하고 공격에 특화된 암살 타입의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피식
하얀 가면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놈이 주위에 두른 이글거리는 검은색 장막이 사라졌다.
아마 저 장막에 모든 공격이 가로막힌 것이리라.
“아등바등. 광대짓 해 대는 꼴이 볼 만했다. 그나마 쓸 만한 공격도 남이 만들어 준 화기라니……부끄럽지도 않나?”
“…….”
도훈은 답하지 못했다.
강력한 공격 수단이 없다는 것.
스스로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던 문제였기에.
“어떻게 한 거지?”
도훈은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흘려낸 장막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에 하얀 가면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나도 놀라는 중이야. 이렇게 쉽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뭐 하러 그 고생을 했던 거지? 그분이 틀렸어. 고작 고개만 약간 숙이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데.”
“무슨 소린지…….”
“네가 알 필요는 없어. 버러지.”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날아든 공격.
급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핸드건은 부서지고 내장이 뒤집히는 통증이 몰려들었다.
짧은 부유감과 불에 지지는 듯한 등의 통증.
무너지는 건물의 외벽.
그것이 도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