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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96화 (195/241)

196화. 무녀와 신 (1)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린 회색빛의 하늘.

한 사람이 여유롭게 해안가를 걷고 있었다.

─쩌적

그가 걸음을 내딛자 얼음판이 갈라지며 쩍 소리를 냈다.

깨진 얼음판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아. 진짜 싫어.”

분명 얼마 전까지만 따사로웠던 해안가는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어찌나 추운지 가만히 있어도 입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였다.

물론…….

“죽은 몸이라 입김은 안 나지만.”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얼어붙은 피딱지와 함께 머리 피부가 뚜둑 하고 뜯겨 나왔다.

“아, 이것 봐. 이래서 추운 건 싫다니까. 더운 것도 냄새나서 싫지만.”

남자는 혀를 차며 손에 엉겨 붙은 잿빛의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그러면서 남자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쪽은 춥지도 않습니까?”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방금 빙판을 밟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고개를 돌린 위치엔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호진이었다.

호진은 빙글거리며 웃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별로. 그보다는 찾는데 힘들었지.”

“뭐가 말입니까?”

남자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그 가면. 찾고 있었거든.”

“……이 가면을, 그러니까 저를 찾으셨다고요? 아, 하긴 당신 정도의 사람이면 알아도 이상하진 않겠네요. 이미 싸워 보셨나요?”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면을 더듬었다.

깨지고 갈라진, 마모된 가면의 촉감이 손을 타고 전해져왔다.

한때는 자신의 자랑이자, 모든 것이었던 가면.

하지만 이젠 가면의 깨어진 흔적처럼, 그런 기억 모두가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남자는 가면의 뒤에서 쓰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제가 궁금하네요.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분명 남자의 역할은 본격적인 점령에 앞서 침투한 유격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해안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솔직히 이런 작은 땅덩어리쯤은 자신의 힘만으로 삼키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문뜩 자신에게 경고하던 이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흔치 않은 일에 놀라기도 잠시,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고 손을 흔들었었다.

‘그분께서 이상하게 신경 쓴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때, 남자의 물음에 호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흠, 날 모른다, 이거지? 왜지? 서로 사이가 안 좋은가?”

“뭔 소립니까?”

“아냐, 아냐. 자의식 과잉이었나 봐. 부끄럽네. 난 또 그 녀석이 날 신경 써서 이러는 건가 했거든.”

“……더 모르겠습니다만.”

남자의 말에 호진은 재차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미안, 좀 뜬금없었겠네. 나는 이호진이라고 한다.”

“저는 불사의 신의 봉사자이자 한때…… 아니지. 그냥 재의 기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자신의 이명처럼 빛바랜 기억들일 뿐이다.

과거에 쌓아 올렸던 영광들도 명예들도 이제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예의가 바른 친구네. 여태 만난 하얀 가면들은 죄다 싸가지가 없었는데. 이러면 초면에 반말하는 내가 이상한 것 같잖아.”

호진이 곤란하다는 듯 말하자, 재의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호진이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보다도 꽤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생전에 만났다면 분명 어렵지 않게 친해졌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런 검은 어디서 얻는 겁니까? 아까부터 눈을 뗄 수가 없네요.”

가만히 있어도 냉기를 흘리는 고아한 자태의 검은 모든 검사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무기의 칭찬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친구가 선물해 줬지.”

“……그거야 참, 뭐랄까.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기사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답했다.

‘어지간한 왕국의 국보급 검을 선물로 주는 친구라…….’

하지만 기사는 이내 납득했다.

저걸 선물로 준 사람도 대단하지만, 다루는 이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검기만으로 바닷물을 얼리고 일대의 온도를 떨어트리는 게 가능하다니.’

검기에 일정한 성질을 담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뚝 떨어진 이 괴물은 지난 이틀간 쉬지 않고 불사의 신의 군단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쨍그랑

기사가 얼어붙은 채 서 있던 리자드맨 전사의 시체에 손을 대자,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순히 겉만 얼린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가 깨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젊어 보이는데. 이게 고작 수십 년 단련하는 것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라고?’

기사는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호진은 기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왠지 말이 좀 통할 것 같은데. 저기 등대에서 커피나 한잔 어때?”

“저야 마음 같아서는 열 잔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제가 까라면 까야 하는 말단이라서요.”

기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이에 호진은 예상했다는 듯 검을 마주 들어 올리며 답했다.

“아쉽네. 하다못해 너희들 목적이라도 말해주면 안 될까?”

“…….”

목적이라.

어차피 자신은 높은 확률로 이곳에서 눈을 감는다.

드디어 찾아온 두 번째 영면.

어째서인지 약간이나마 기쁘기까지 하다.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 정도의 장난이야 그분도 이해해 줄 것이다.

“큰 거요. 작은 거요?”

정말 말해줄지는 몰랐던 호진은 기사의 물음에 당황했다.

“……둘 다 말해주면 안 돼?”

“그건 좀 곤란한데요. 참고로 큰 거는 자세히 말씀 못 드려요.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러면 작은 거. 아니, 역시 큰 거로.”

호진은 신중한 표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기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그럼 딱 하나, 저희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너희?”

호진은 잔뜩 집중하며 기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당신이 하얀 가면들이라 부르는 이들이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불사의 신의 종들입니다. 데니토의 은총으로 되살아났죠.”

그렇게 말하는 기사는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호진은 어쩌면 기사의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희들은 생전에 하나의 단체였습니다. 검을 수련하고 단련하는 집단이었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숭배했달까요. 언젠가부터 다른 이들은 저희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수련과 단련, 그리고 숭배.

‘……설마?’

기사의 말이 이어짐에 호진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으니 그 이름은…….

“검의 교단이라고.”

***

검의 교단.

신성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인류 집단.

그들은 선신과 고대신의 전쟁에서 선신의 편에 섰던 종교단체이자 무력집단이었다.

그들이 섬겼던 것은 ‘검신’이라 불리는 선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존경을 담아 ‘검신’을 모방하던 인간들은 신보단 검을 더 숭배하게 됐다.

그렇기에 그들은 끝내 오만해졌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호진이 알고 있던 정보.

호진은 그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멸망했고, 어쩌다 불사의 신의 종들이 된 것인지.

그리고…….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말했잖아요. 자세한 건 말 못 합니다. 전 말단 부하일 뿐인걸요.”

“…….”

호진은 잿빛 머리의 기사를 노려보기도 잠시,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말할 리가 없나.’

애초에 정체를 밝혀준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단순한 변덕일까.

정체를 밝혔으니 목적은 알아서 짐작해보라는 것 같은데, 전혀 짐작도 가질 않았다.

‘재의 기사’는 그런 호진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고쳐잡았다.

“시간이 되었네요.”

“……?”

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워낙 구름이 많이 끼어 있어서 해가 지는지도 몰랐다.

“계획대로면 슬슬 시작될 텐데요.”

재의 기사가 중얼거리던 그 순간.

─우웅

진동과 함께 거칠고 사나운 마나의 기운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너, 뭔 짓을……?”

“화내지 마시죠. 저건 저희가 아니라 그쪽들이 하시던 겁니다.”

미간을 와락 구겼던 호진은 그제야 마나의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루이드의 마나다!’

호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등대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등대는 아무런 이상 없이 고요할 뿐이었다.

‘잠깐, 그쪽들이 하던 거……?’

놈이 그렇게 말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드루이드와 만신이라 불리는 노인의 의식.

문제는 그 의식이 지금 정상적으로 작동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아직 드루이드가 요청했던 이틀이 다 지나지 않았다.

시기가 이르다는 말이었다.

의식에 있어서 드루이드에게 문제가 없다면, 다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군청 쪽을 공격했나?”

“정답. 그게 아까 말씀드리려 했던 작은 목표였습니다. 뭐 조금 빨리 아셨더라도 별다른 수는 없으셨겠지만요.”

기사가 웃으며 답하자 호진은 이를 뿌득 갈았다.

지금이라도 군청으로 향해야 했다.

의식에 문제가 생겼다면 노인이 당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도훈까지 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

호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사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한기를 품은 검기가 얼음 폭풍과 같이 기사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륵

“사이 좋게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너무하네요.”

“……어떻게?”

호진은 눈 녹듯 사라진 자신의 검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에 기사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호진에게 답했다.

“패를 다 드러내고 게임하는 겜블러도 있나요? 직접 알아맞혀 보시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호진은 사나운 기세를 끌어올리며 검을 고쳐잡았다.

땅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려왔다.

마치 신이 진노한 것처럼.

─꿀꺽

재의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말로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그래도 상관은 없나.’

노인이 당한 이상 저 의식은 완성되지 못하고 폭주할 것이다.

그걸로 자신의 역할은 끝이었다.

지금부터 벌어질 싸움은 그저 자신의 신념에 대한 관철일 뿐이었다.

기사는 망가진 가면을 고쳐 쓰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잿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거칠게 흩날렸다.

“오십시오. 구(舊) 북부 검의 교단 교구장, 재의 기사 호넷. 당신을 막아서겠습니다.”

낡아빠진 갑옷과 가면과는 달리 잘 관리된 오래된 검 한 자루.

그 검을 치켜든 기사가 내뱉은 말은 평생토록 자신보다 소중히 여긴 맹세였다.

“검의 명예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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