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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95화 (194/241)

195화. 신앙과 의식 (4)

“굿판?”

호진의 중얼거림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엄구마든 축사든 뭐라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노인의 말은 간단했다.

의식을 준비 중이니 시간을 끌어달라는 것.

지금 그녀는 자신의 지인과 함께 망자들을 쓸어낼 의식을 준비 중이라 했다.

“의식의 대부분은 그 녀석이 담당하겠지만, 노구도 의식에 한 축을 맡고 있어서 자리를 옮길 수 없습니다.”

“흠, 말씀하신 분은 믿을 만한 분입니까?”

호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얘기를 듣자 하니 노인만큼 뛰어난 무속인이 여럿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있다고 한들 단둘이 저 많은 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다릅니다. 분명 이전까지는 이 노구와 같이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습니다만……하나 확실한 것은 믿을 만한 놈이라는 겁니다.”

“그분을 만나야겠군요.”

호진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태안항 쪽에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으실 겝니다. 녀석이 거기서 저 추물들의 수를 줄여주지 아니했다면 진즉에 모두 죽었을 테니.”

확실히 예상했던 것보다 괴물들의 수가 적었다.

그것이 노인이 말하는 ‘녀석’ 덕분이라면 노인의 계획도 신뢰해볼 만했다.

“바로 가보겠습니다.”

계획을 세웠으나,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수정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선생님, 그리고 가을이는 이곳에 남으시죠. 도훈 씨도 어르신과 함께 이곳을 지켜주십시오.”

“알겠다.”

도훈은 늘 그렇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비에 능한 도훈이라면 이곳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계획의 핵심은 항구에 있는 그 사람이야.’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전장도 그곳이 될 것이다.

“아저씨 혼자 가도 괜찮아요?”

가을이 미안하다는 듯 묻자, 김 선생이 대신 답했다.

“가을아. 너는 밖에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아.”

고개를 돌려 군청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가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수 분.

수백의 괴물을 베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 후 호진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게 안 오르네.’

뭐가 안 올랐다는 건지는 몰라도, 호진에게 저 괴물들이 개미와 같은 존재들이라는 거 하나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와 씨 위험한 건 우리였네. 빨리 다녀오세요.”

순식간에 변한 가을이의 태도에 호진은 피식 웃으며 도훈을 가리켰다.

“저 아저씨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저 아저씨도 엄청 강하거든.”

“……저 아저씨요? 아, 네.”

가을은 도훈을 못 미덥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원래 길 안내를 담당했어야 할 도훈이 일행들의 뒤만 졸졸 따라온 건, 안내를 대신한 가을 때문이었다.

도훈은 억울한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다물었다.

변명은 자신을 더 초라하게 할 것이었기에.

***

태안항에 도착한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괴물들의 수도, 그 위험도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어르신의 말이 맞네.’

도착하자마자 눈에 띄는 선착장에 등대.

그 아래엔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쌓여 탑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체들을 만든 이가 누구든,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닐 게 분명했다.

한 차례 호진이 날뛴 덕분에 근방에 괴물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호진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등대를 올랐다.

상대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듯, 등대를 오르는 데에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등대의 꼭대기에 도착한 호진은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드루이드, 아니, 김진섭 헌터님?”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곳에 있던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으니까.

S랭크 헌터, 김진섭.

한국 최초의 S랭크이자 뛰어난 주술사인 그는 협회의 주요 인사였다.

“편하게 드루이드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아, 네. 한데 여긴 왜? 분명 협회에서는…….”

“아무 말도 못 들으셨겠지요. 그럴 만도 합니다.”

드루이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랜 지인이 있어서 방문한 차였습니다. 한데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경황이 없었다고 할까요.”

“지인이라면…… 만신님 말씀이십니까?”

“이런, 이미 만나고 오신 모양입니다. 설명할 거리가 줄었군요.”

드루이드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분이랑은 게이트 이전부터 업무적으로 여러 번 뵈었지요. 그분의 그릇이라면 모시던 신을 바꾸기만 하셨어도 저보다 크게 되셨을 분입니다.”

드루이드가 모시는 것은 여신이 아닌, 선신 중의 하나라는 게 호진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 또한 원래 무속인이었고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 모시던 신이 있었던 모양.

드루이드는 게이트 이후 이계의 신을 모시기로 했고, 노인은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재밌네요.”

호진은 자신이 모르던 세계의 이야기에 대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점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이 세계에도 신적인 존재들이 있다면, 어째서 이렇게 허무하게 이계의 신들에게 밀려났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호진의 질문에 드루이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정작 자신조차 헷갈린다고 말이다.

“이계의 신들을 보면 이 세계에도 신적인 존재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게이트 이전까진 신적인 존재나 정령을 제대로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이제껏 해왔던 주술들이 단순히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죠. 신앙이란 원래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니까요.”

“그런가요?”

호진은 노인이 펼쳤던 진을 떠올리며 그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노인과 함께 의식을 치르는 드루이드가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고, 깊게 들어갈수록 호진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들을 믿고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

‘결국은 내가. 그리고 인간들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호진은 각오를 다지며 드루이드에게 물었다.

“대충은 들었지만 그래서 지금 상황이랑 계획이 뭡니까?”

“사흘만 말미를 주시면 의식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태안에 있는 삿된 존재들을 모두 쓸어낼 수 있을 겁니다.”

“사흘이라…… 그냥 저와 함께 토벌하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

드루이드는 호진을 잠시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수천의 군대도 그의 앞에서는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할 터.

그의 자신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됩니다. 저들이 끝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놈들을 서해 앞바다에 모두 수몰시키기 위해선 의식이 필수 불가결합니다.”

앞으로 사흘 동안 아무리 태안을 이 잡듯이 털어도, 결국 호진이 자리를 비우면 말짱 꽝이었다.

그러나 이번 의식이 끝나면 어지간해선 서해로 적들이 넘어오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이에 대해 전해 들은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다만 의식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십시오. 이틀로요.”

“예? 하지만…….”

“북쪽에서도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늦지 않으려면 이틀 후에 출발해야 합니다.”

“이런, 역시 북쪽에서도 오는군요.”

드루이드는 침음을 흘렸다.

분명 지금의 상황으로 봐선 그쪽이 진짜 노림수일 터였다.

태안 쪽은 기껏해야 판을 흔들기 위한 전초전.

그렇기에 호진은 북쪽으로 향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틀은 무리인데…….’

드루이드가 고민에 빠진 그때 호진이 말했다.

“의식에만 전념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괴물들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해드리죠. 가능하시겠습니까?”

‘의식에만 전념이라.’

사실 그것까지 감안해서 사흘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드루이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

호진과의 대화 후 드루이드는 곧장 의식에 전념했다.

룬문자로 짠 진에 들어간 드루이드는 곧장 눈을 감고 낮은 노랫소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움───.”

낮게 진동하는 드루이드의 목소리.

이어 나오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높고 낮은 음률을 따라 작아지고 커지는 노랫소리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말소리는 어떤 때는 짐승 소리, 또 어떤 때는 바람 부는 소리같이 들리기도 했다.

고조되었다 차분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주술의 힘이 호진에게는 보였다.

폭풍처럼 거칠게 일었다가도 봄날의 정오처럼 한적한 분위기가 되기도 했다.

‘신기하군.’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서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드루이드에게는 드루이드의 일이, 호진에게는 호진의 일이 있었으니까.

호진은 조용히 일어나 등대 밖으로 나섰다.

“저기 오는군.”

호진은 일반 사람이라면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바닷속을 손쉽게 꿰뚫어 보며 중얼거렸다.

셀 수 없이 많은 죽은 자들이 바닷속을 가로질러 해안가로 올라서는 중이었다.

“하얀 가면은 여기도 없나?”

하지만 그 숫자로도 호진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진은 드루이드가 영향을 받지 않게 주의하며 기감을 퍼트렸다.

희미한 장막과도 같은 기운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장소까지 모두 훑으며 항구 전체를 휘몰아쳤다.

그런데도 하얀 가면과 비슷한 기운을 지닌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흠.”

호진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정보들을 정리했다.

대신 몇 군데 이상한 기운들이 감지됐다.

“하얀 가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밌어 보이는 녀석들이 있네.”

부산에서 용재와 도훈이 상대했던 수준의 강자들이 느껴졌다.

의식도 있는 모양인지, 등대로 곧장 달려오거나 하지 않고 이쪽의 상황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놈들과 싸운다면 레벨이 하나쯤 오를지도 모르는 일.

호진은 모처럼 의욕을 내며 걸음을 떼었다.

─사락

해가 저물며 군청색이 된 하늘 아래.

등대의 꼭대기에 올라선 호진의 신형이 바람에 흩날리듯 모습을 감췄다.

물에 푼 먹물처럼 일렁이면서 퍼지는 어둠만이 호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무슨……?”

호진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기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한때 동체시력만으로 로드윈 왕국제일검이라 불리었던 기사는, 되살아나기 이전에 단 한 번도 상대의 움직임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어디로 간…….”

주변을 급히 두리번거리던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흐릿하게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옷차림의 사내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상대였으니까.

“젠장……!”

기사가 급히 검을 뽑아 들던 그 순간, 시야가 번쩍하고 점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리기도 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조금 바빠서.”

“…….”

기사는 호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에 대해 되묻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기사는 그저 천천히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당한 건지 그것만이 궁금했다.

그러나 호진은 짧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좀 서둘러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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