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신앙과 의식 (3)
“이쪽!”
가을은 거침없이 길을 안내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뒤로 물러나.”
고개를 끄덕인 호진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의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순간, 골목에 늘어선 괴물들의 시선이 모임과 동시에 호진의 검 끝을 타고 한 줄기 검기가 흩뿌려졌다.
“키이익…….”
─서걱
차마 다 나오지 못한 울음소리를 머금은 채로 시체들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수가 많군.”
뒤따라 골목으로 들어선 도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골목길에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인간뿐만이 아닌 다양한 이형의 시체들.
물론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호진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생존자들이 버티기에는 가혹한 환경이야.’
더 서둘러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생존 가능성은 희박했다.
군청은 학교보다도 해안가에 훨씬 가깝게 위치해 있다.
사정이 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호진은 한층 더 걸음걸이의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안내하던 가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있어요.”
“음?”
호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번째 이유요.”
호진은 그제야 가을이 뭘 말하는지 눈치챘다.
그건 그녀가 따라와야 하는, 아니 따라오고 싶어 했던 이유.
“실은 가족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에 호진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 있는 생존자들 중 그녀의 가족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왜 그녀가 따라오려고 했는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다만.
“……그럼 아깐?”
왜 아까는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호진의 물음에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미안해서.”
“미안?”
“거기 있는 애들 중에도 있거든요. 저 같은 애들이.”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괴물들의 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때에 시작됐다.
학교로 대피한 시민들은 학교 근처에 있던 시민들뿐.
이런 때에 가족끼리 모인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만 걱정되는 게 아닐 텐데. 다들 꾹 참고 있는 거잖아요. 괜히 가족 얘기 꺼내면 다들 불안할 거고.”
호진은 놀랐다.
밝게만 보이던 그녀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 고등학생치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언행도 호진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적어도 나는 그러지 못했었으니까.’
고등학교 때의 호진은 그저 세상에서 숨기 급급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친구들 앞에서 말을 고른 건 자신의 말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한 까닭이다.
그녀는 분명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타인에게 신경 쓰고 공감하는 게 습관화된 거겠지.
호진에겐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대단하네.”
“네? 아니, 갑자기요?”
가을은 호진의 칭찬을 예상하지 못했던 듯 흠칫 놀랐다.
“친구들을 신경 쓴 거잖아. 원래 힘들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
민망한지 입을 뻥긋거리던 가을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그리 진지해져요. 아저씨 같아.”
“아까부터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어.”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가을은 찾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반색하며 소리쳤다.
“앗, 저기 군청……!”
하지만 그 반가움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군청 주위로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우글거렸으니까.
“……늦어버렸어.”
조용히 뒤따르던 김 선생이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외벽이 무너지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군청 주위는 사람 한 명 살지 못할 폐허처럼 보였다.
“……헛수고했네. 돌아가죠?”
가을이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충격이었을 텐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까지 함께 와준 호진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아니, 그대로 가겠습니다.”
호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하지만 군청은 이미…….”
김 선생이 당황하며 답하자 호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군청 안쪽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괴물들이 안쪽으로 못 들어가고 있어요.”
“……정말요?”
호진의 말에 가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따라오기나 해. 도훈 씨, 제가 길을 열 테니 뒤를 부탁합니다.”
“맡겨라.”
도훈은 단검을 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봐도 수백이 넘어 보이는 괴물 무리.
그것들과 호진을 번갈아 본 가을과 김 선생은 그가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정작 호진은 저걸 다 죽여도 레벨이 오르긴 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조용한데요?”
“지나간 건가?”
군청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의 이상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군청에 들어오지 못하던 괴물들은 애꿎은 주변 건물들을 부수며 소란을 피웠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돌연 밖이 조용해진 것이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적막을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히익!”
정중한 노크 소리에도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문에서 떨어졌다.
밖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들이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 열지 마십시오! 사람인 척하는 괴물일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의심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다들 문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을 향했다.
“열어도 되네. 애초에 내가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마, 만신님.”
붉은 소맷자락에 화려한 두루마기.
무복을 입은 노인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여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모두 그녀 한 명 덕분이었다.
그런 노인이 막을 수 없는 상대라니…….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노인은 담담하게 소리쳤다.
“들어오시게.”
─덜컹
그 말소리에 문이 저절로 밀려났다.
진(陣)의 특성상 내부에서 출입을 허락하거나 문을 열어주면 열리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기하네.”
그러자 누군가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아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찌하여…….’
귀(鬼)는 물론 괴(怪)도 망량도 아니다.
신내림을 받은 박수는 더더욱 아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 들어온 자는 누구를 모시는 것이 아닌, 그저 오롯한 자신만의 신격을 지닌 자.
‘어찌하여 신이 지상을 거닌단 말인가.’
노인은 기겁을 하면서도 침착하게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 천한 것이 감히 귀한 분의 존함을 여쭙습니다.”
“…….”
느껴지는 기운이 이질적이다.
신장은 물론이요. 팔선과 태상노군과도 또 달랐다.
‘그놈이 모시는 신과 비슷하면서 다르군.’
노인은 문득 자신의 오랜 친우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노인의 물음에도 남자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뭐라 대답해야 하지.’
자신을 높여 부르는 노인에게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호진은 진땀을 흘렸다.
동방예의지국이자 100년 전까지만 해도 유교를 신봉했던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호진이다.
까딱 잘못 답하면 사회적 매장이 예약된 상황에 호진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뒤따라 들어온 김 선생과 도훈의 시선이 싸늘하다.
“저…… 어르신. 우선 일어나셔서 이야기를…….”
호진이 그런 노인에게 말을 건네던 그때였다.
“할머니! 밖에 저거 할머니가 한 거야? 그게 미신이 아니라고?”
“……가을이?”
뒤에서 불쑥 나타난 가을이 노인을 향해 달려갔다.
노인은 그녀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일행들은 물론, 군청 안에 있던 사람들 역시 당황할 뿐이었다.
***
“이쪽은 저희 할머니. 나름 유명한 무당이세요.”
“손녀를 지켜주셨다니. 존자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노인의 감사에 호진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 답하면서도 호진은 노인을 차분하게 살폈다.
노인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플레이어가 아니야.’
노인은 분명 여신과의 계약을 맺지 않고 있었다.
호진이 감시자의 눈으로 봐도 그녀에게선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알 수 없는 격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오롯이 호진이 신격을 얻었기에 느낄 수 있는 그 이질감은 분명 신적인 무언가의 존재였다.
불사의 신의 괴물들이 군청으로 들어오지 못하던 것도 그녀의 작품일 것이다.
노인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무형의 기운이 군청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호진은 힐끔 시선을 돌려 건물에 둘려진 붉은 실과 방울들을 살폈다.
그건 호진의 성역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세상이 되었기에 능력을 얻은 걸까.
아니면 원래 호진이 살던 세상에도 존재했었던 걸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의 노인은 분명 특별한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호진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 놀라웠다.
호진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노인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뭐 하시는 분입니까?”
“허…….”
그 물음에 노인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이 노구의 정체가 궁금하셨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지요. 용왕님을 모시는 보잘것없는 무속인일 뿐입니다.”
“아니, 어느 굿판에서도 경관만신을 하는 할머니가 보잘것없으면 다른 분들은 뭐가 돼?”
옆에 있던 가을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노인이 여전히 웃으며 답했다.
“반딧불이 아무리 빛나봐야 태양 아래에선 보이지조차 않지 않겠니.”
“뭐, 설마 이 아저씨도 무당이야?”
“그럴 리가.”
가을이 쳐다보자 호진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노인은 뭐가 웃긴지 끌끌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호진은 그런 노인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런 힘이 있으신데 왜 이제껏 가만히 계신 겁니까?”
“별것 아닌 재주를 높이 쳐주시니 감사하긴 합니다만, 이 노구의 몸으로는 도깨비나 귀신도 아닌 저것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어째선지 밖의 저놈들에겐 제 주술이 어느 정도 통하는 듯하지만 말입니다.”
“도깨비나 귀신…….”
그런 게 있단 말인가.
‘뭐 이제 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호진은 고개를 흔들어 노인에 대해 정리했다.
한마디로 노인이 지닌 능력으로는 게이트를 넘은 몬스터들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는 듯했다.
다만,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을 상대로는 술법이 먹혔다는 것인데, 그 이유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저것들이 망자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들이 죽은 자들이었기에 귀신을 쫓는 노인의 주술도 효과를 발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여 납득하며 노인에게 말했다.
“어쨌든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하시죠.”
생존자들을 모두 모아 보호하며, 이곳에서 발견됐다던 하얀 가면을 찾아 처리하면 될 것이다.
노인이 있다면 다른 학교에 있는 생존자들도 한층 더 안전해질 테니 일거양득일 터.
호진이 계획을 말하자 노인에게선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노구, 존자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