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빌데야크트 (6)
─끼릭 철컥
흑마가 바닥에 내리꽂히며 먼지구름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용재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징글징글하네.”
아무리 용재라고 해도 체력이 무한하지는 않았다.
무리해서 힘을 쏟아낸 탓에 아물던 상처들이 다시 터졌고, 이젠 온몸에서 피가 흘러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도저히 전투를 이어 나갈 상태가 아니었다.
─지직 지직
그러나 끝내 검은 갑옷을 두른 기사는 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기사도 무사하지는 못한 듯 왼쪽 발목이 완전히 돌아가 바닥에 질질 끌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까지 깊게 눌러썼던 검은색 망토도 찢어질 대로 찢겨 안쪽이 보였다.
이에 용재는 힘든 것도 잊은 채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얼굴 좀 보겠네. 어디…….”
순간 용재는 시간이 멈춘 듯 멈춰 섰다.
반쯤 가려진 망토 그늘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
“…….”
기사도 걸음을 멈춘 채, 용재를 응시했다.
방금까지 죽일 듯이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가운, 동시에 미안한 감정을 담은 채로 말이다.
“……어째서?”
용재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기사가 어색한 듯 미소 지었다.
뺨의 살이 떨어져 나가 훤히 드러난 이와 잇몸이 움찔거리며 끌어올려졌다.
“……오랜만이다. 아니,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
용재는 그 인사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도 용재는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일부러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거 걸려 버렸네. 아직 그래도 살점이 많이 붙어 있나 봐.”
기사가 어색하게 농담을 던지며 웃자, 용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일찍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뒀던 자.
전 푸른 늑대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
용재의 중얼거림에 데미안은 고개를 다시금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용재가 입을 열어 물었다.
“왜 다시 일어난 거야?”
그 물음에 약간의 씁쓸함과 노기가 묻어났다.
용재 자신도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지를 알고 있었다.
죽고 싶은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만약 죽어 가는 이에게 묻는다면 십중팔구 썩어 가는 육신으로라도 되살아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죄 없는 이를 해한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용재는 데미안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과 가족 같은 기사단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죄 없는 시민들을 우선했던 그의 죽음은 용재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자 울림으로 다가왔었기에.
용재의 공허한 눈과 마주친 데미안의 표정이 더더욱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그 목소리에는 묘한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어.”
“……해야만 하는 일?”
용재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되물었다.
저번에는 데미안이 죽는 순간까지 그를 몰아세웠었다.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고 싶었다.
아마 이것이 데미안에게도 자신에게도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지켜보고 있나.”
용재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데미안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용재와 눈을 마주쳤다.
“자세히는 답하진 못해.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할게.”
“……?”
의아한 표정의 용재를 바라보던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불사의 신을 따르지 않아.”
다음 순간.
─파스스슥
데미안의 발끝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치고, 갑옷이 녹슬며 검은 가루가 되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섬기던 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결과지. 불사의 신은 자신을 부정하는 종을 용서할 정도로 자비롭지 않아.”
데미안은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그러고는 준비했던 말들을 서둘러 뱉었다.
“경전을 지닌 하얀 가면을 찾아. 그와 이야기해야 해.”
“하얀 가면? 그놈은 왜……?”
용재의 질문에 데미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더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용재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은 용재가 침착해지길 기다려 주질 알았다.
“용재. 나를 죽여 줘.”
“……뭐?”
용재가 인상을 찡그리자 데미안은 더욱 강하게 말했다.
“나의 격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 그리고 내가 해야만 했던 일들을 대신해 줘.”
─우당탕
발끝에서 시작된 부식은 어느덧 허리까지 잠식했다.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진 하체가 무너지며 데미안의 상체가 바닥을 굴렀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용재는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도끼를 치켜올린 용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뻥긋거리다 물었다.
“……내가 계획을 방해한 거야?”
그 질문은 예상치 못했던 듯 데미안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기도 잠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전혀. 오히려 널 만나서 다행이야. 힘든 일을 맡기고 가서 미안하다.”
“아…….”
용재는 그제야 한결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전력을 다해 휘둘러진 도끼가 허공을 가르고,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조용히 진실한 믿음을 담아 기도를 올렸다.
“이 힘없고 못난 종을 용서치 마시고 부디 영원하소서.”
─콰직
누구를 향했는지 모를 기도는 뼈와 살이 부서지는 피륙음과 함께 끝이 났다.
고요한 적막 속.
뿌예진 용재의 눈앞으로 푸른 창이 어른거렸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매우 크게 오릅니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대전사(Champion)」
「등급: 레전더리」
「신의 이름 아래 명예를 드높이는 방법은 오직 피와 강철뿐. 피에 젖은 모래와 산처럼 쌓인 시체만이 전사의 명예를 증명해줄 것이다」
「획득 스킬: 투신전(鬪神殿)/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전장을 소환합니다.」
「획득 스킬: 트로피/ 투신전에서 승리한 횟수만큼 능력치와 격이 영구적으로 증가합니다.」
「획득 스킬: 무극(武極)/ 무에 정점에 달한 신체는 때론 자연의 법칙마저 비틉니다.」
「직업 획득 조건: 자신보다 강자를 상대로 승리해 그의 명예와 목적을 이어받기(1/1)」
그토록 기다리던 전직이다.
하지만 용재는 왠지 그것을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
이곳의 하얀 가면이 쓰러지자 안개는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휘자를 잃은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은 다시 한낱 몬스터로 돌아가 버렸다.
흩어져 도망가는 녀석들은 일반인들에겐 골칫거리였지만, 헌터들에게 있어선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나머지는 부산 쪽 헌터들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조금 거들어줘서 나쁠 건 없겠지.”
안 그래도 리치와 하얀 가면 그리고 수많은 감염자를 베었음에도 고작 2레벨밖에 더 못 올렸던 호진은 조용히 ‘청성’을 꺼내 들었다.
청성의 검신을 타고 터져 나오는 냉기가 공중에 하얀 서리를 흩뿌렸다.
“크르르르륵…….”
호진이 약간의 격을 드러낸 것만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괴물들의 시선을 그러모았다.
괴물들은 겁에 질린 채로 호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미지의 적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절벽으로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좋네.”
자신의 의도대로 적들이 몰려들자 호진은 옅게 미소 지으며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호진은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쩌적
그 순간 유령마를 탄 해골 기사들과 걸어 다니는 시체들을 향해 설한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냉기 폭풍이 그들이 선 공간을 베고 지나가자 세상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달리던 말도, 침을 흘리던 시체도, 검을 높이 든 해골도.
모두 하나 같이 일시에 멈춰 섰다.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움직이는 이는 오직 호진뿐.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지를 확인한 호진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용재와 도훈 둘 다 방금까지 싸우던 상대의 유해를 조심스럽게 수습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에 호진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용재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형, 나 할 말이 있는데.”
“그래? 나도 있는데.”
“나도 있다.”
“……어.”
세 사람은 누가 먼저 말할지 눈치를 보기도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가볍게 풀리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나 보네. 생존자들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해 보죠.”
“응, 좋아.”
“알았다.”
그제야 기운을 차린 용재와 도훈은 수습한 시체를 호진이 소환한 하야에게 싣고, 생존자들을 불러왔다.
교회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이 반파된 밖의 풍경에 기겁했다.
꽁꽁 얼어붙은 수많은 시체들을 보고 기절하는 사람들도 나왔지만…….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 급할 것이 없는 일행은 생존자들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길을 따라 이동했다.
해는 완전히 저버렸지만, 다행히 밝게 뜬 보름달이 도로 위를 환하게 비췄고 도로도 아직까지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지만, 의외로 뱉고 보니 간단했다.
복잡했던 건 이야기가 아닌 심정들이었으리라.
정리한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울산 대표와 데미안이 불사의 신과의 계약으로 되살아났었다는 것.
둘쨰, 하얀 가면이 집단일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데미안은 호진이 시리온의 하얀 가면과 이야기하기를 원했다는 것.
부가적으로 용재가 전직을 했다는 소득이 있었다.
‘나도 환령보를 얻을 수 있었고.’
고작 보법이라고 하기에는 전투에 상당히 많은 변주를 줄 수 있게 됐다.
어서 빨리 써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꽤나 많은 정보들을 얻었지만, 아직 뭘 해야 할지는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다들 지치기도 했고 우선은 정비가 우선일 것이다.
생존자들의 숨이 거칠어질 무렵,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네요.”
호진의 읊조림에 생존자들의 입에선 환호성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를 눈치챈 캠프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무장한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였지만.
끝내 부산 캠프에 닥친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