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빌데야크트 (5)
「스킬: 환령보 LV.1 : 진(進). 퇴(退). 환(幻)의 묘리가 녹아 있는 보법. 귀신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상대의 감각을 농락한다.」
호진은 눈앞에 떠오른 창을 힐끗 바라본 후 옆으로 치웠다.
‘이게 되네.’
그저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보법을 익힐 수 있었다.
감시자의 눈을 활용하니 상대의 기의 흐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만큼 지겹도록 지켜봤다.
그러던 참에 놈이 승부수를 띄웠고, 호진은 머리로만 그리던 동작을 직접 사용했다.
‘환령보.’
슬쩍 흔들듯 뒤로 몸을 당긴 후, 천천히 움직이던 몸을 갑자기 가속하는 게 환령보의 요점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 발가락 끝에 모은 기를 폭발시키듯 몸을 움직였다.
멈춘 시간 속에서 호진의 몸이 내달렸다.
─서걱
하얀 가면이 호진의 잔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하얀 가면의 옆으로 이동한 호진은 놈의 팔을 잘라냈다.
‘죽으면 곤란해.’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호진이 하얀 가면의 팔을 잘라내자 잠시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놈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허.”
작게 터트린 하얀 가면의 한숨에선 아연함과 허탈함이 묻어났다.
이에 호진은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제 못다 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볼까?”
“……원하는 바를 이루소서. 우리의 인도자이시여.”
“뭔 소리를……!”
─푸욱
호진은 급히 뛰어갔으나 이미 늦었다.
하얀 가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을 심장에 찔러 넣었고, 그의 심장은 이내 완전히 멈춰버렸다.
“이런 젠장……!”
호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 정신 나간 광신도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툭하면 내던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듣기만 했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 순간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물어볼 게 많았다.
이전에 보았던 하얀 가면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계속해서 걸리던 놈에게서 느껴지던 기운.
그건 분명…….
‘내 고유의 격과 비슷했어.’
그건 단순히 불사의 신의 봉사자가 지닐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물었어야만 했다.
“쯧.”
호진은 소리 나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봤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길고 길었던 일행들의 싸움도 어느덧 끝에 다다라 있었다.
***
도훈과 울산 대표 지훈의 싸움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지훈이 초반에 발목의 힘줄이 잘려 기동성을 잃었음에도, 바람 마법을 통해 몸을 자유롭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A랭크 정도가 아니군.’
도훈은 바람 마법에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코트를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지훈은 마법으로 회피를 하면서도 도훈에게 공격을 이어 나갔다.
이는 쉬지 않고 더블 캐스팅을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지훈은 더블은 물론 트리플 캐스팅까지 사용했고, 심지어 캐스팅 시간 또한 짧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끝을 모르는 마나에 있었다.
S랭크인 협회장마저 여러 번 쓰기 버거운 수준의 마법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놈의 마나가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샘솟는다는 말이었다.
‘이게 불사의 신에게 받은 힘인가.’
생전과 비교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하지만 한참 지훈과 공방을 주고받은 도훈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됐다.”
도훈은 지훈의 발목을 잘라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음에도, 계속해서 공방에서 밀렸었다.
코트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몸에 난 상처들에서 타고 흐른 피들로 내의가 축축하게 젖었다.
이대로 공방이 이어진다면 5분 뒤쯤에 스스로 지쳐 쓰러질 정도의 출혈이었다.
그럼에도 도훈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은 흡사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지훈은 입술을 지근거렸다.
‘……뭐가 있나?’
이미 한 번의 방심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또 방심하다가 당한다면 그건 멍청한 거였다.
지훈은 거리를 좁히지 않고 멀리서 마법을 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무리긴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시간만 끈다면 자신의 승리였다.
도훈은 숨기려고 하지만 그가 꽤나 심한 출혈을 입고 지쳐 있다는 사실쯤은 진즉에 파악했다.
지훈은 뒤쪽에 있는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에게 마나를 추출해 손끝에 모았다.
검은색의 구가 몽글거리며 형태를 이뤘다.
“거인의 바람창.”
짧은 영창으로 구는 급속도로 팽창하며 바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 됐다.
이것이 지훈이 마법을 연사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구조.
마나의 추출과 스킬을 통한 마나의 변형, 즉 영창이다.
“꿰뚫어라.”
지훈이 손을 뻗으며 중얼거리자 창이 쏘아지듯 나아갔다.
─후웅 쾅!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도훈의 옆으로 창이 내리꽂히며 흙먼지가 터져 나왔다.
창이 터지며 일으킨 날카로운 바람들이 도훈의 몸을 난도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훈은 방심하지 않고 재차 마법을 준비했다.
“폭풍매의 날갯짓.”
흙먼지 위로 칼날보다 날카로운 바람의 폭풍이 소나기처럼 내리쳤다.
그 순간, 흙먼지를 뚫고 두 자루의 단검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칫.”
가볍게 혀를 찬 지훈은 단검이 날아드는 궤도의 공기를 바람으로 밀어내 일시적인 진공상태를 만들었다.
그러자 단검들이 급격히 힘을 잃고 흙먼지 안쪽으로 재차 자취를 감췄다.
단검의 돌아오는 특성을 사실을 파악한 지훈이 단검을 돌려보내지 않고 눈앞에서 떨어트린 것이다.
그러기도 잠시, 흙먼지를 뚫고 재차 날아드는 단검 두 자루.
“그건 이젠 안 먹힌다는 걸 언제쯤 깨달을 셈인가요!”
지훈은 냉소하며 준비한 마법을 준비했다.
도훈이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단검을 떨어트리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지훈은 단검을 맞춰서 떨어트리는 동시에 재차 범위용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폭풍매의 날갯짓.”
─캉 카강!
칼날 모양의 바람들이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며 날아들던 단검들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훈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떨어져 나가는 단검 사이로 날아든 둥근 물체.
‘돌…… 아니, 뭔가 다른…….’
─반짝!
지훈의 마법이 둥근 물체를 가른 순간 시야가 빛에 휩싸였다.
되살아난 이후 한 번도 고통을 느낀 적 없었음에도, 그의 눈에 화끈한 열감이 몰아쳤다.
“도대체 무슨…….”
지훈은 순간 말을 잃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섬광탄이었어!’
지훈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깨달았다.
후회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놈이라면 분명 이 틈을 노리고 공격해 올 거야!’
지훈이 재빨리 도훈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마법으로 몸을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튼튼한 줄 하나가 등에 부딪혔다.
‘설마…….’
지훈은 그 즉시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주변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스릉 스릉 스릉
사방에서 실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날카롭게 울어 댔다.
함부로 몸을 움직였다가는 거미줄처럼 쳐진 실들에 몸이 잘려 나갈 것이다.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여기던 그때, 도훈은 이미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훈은 이를 악물며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찾아온 위기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진정하자. 아직 마법은 멀쩡히 사용할 수 있어.’
지훈은 마나를 크게 끌어모아 몸에 폭풍과도 같은 바람 마법을 두른 후에,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어차피 자신을 끝내기 위해선 도훈도 가까이 다가와야 했다.
멀리서 날리는 공격으로는 자신의 바람 마법을 쉽사리 뚫을 수 없을 테니까.
지훈은 이어서 주변에 은은한 바람을 일으키며 귀를 기울였다.
다음 순간, 뒤쪽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인왕의 폭풍창.”
지훈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준비한 마법을 쏟아냈다.
아까보다도 수배는 거대한 창이 소리가 난 곳을 꿰뚫으며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퍽!
“잡았……!”
지훈이 좋아하던 그때, 옆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찰칵
그게 뭔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으니까.
희미하게 돌아오는 시야 속에 보인 것은 천 쪼가리가 되어 나풀거리는 도훈의 코트와 그것을 지탱하던 실 한 가닥이었다.
그때 지훈의 귓가에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안심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했다.”
“……기껏 되살아났는데 억울하네요.”
지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은 즐거웠을지도 모른다고.
무엇보다 자신의 손에 사람들의 피를 묻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타앙!
도훈이 들고 있는 핸드건에서 불이 뿜어지고, 공중에 떠 있던 울산 대표의 몸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훈은 재빨리 몸을 날려 떨어지던 지훈의 몸을 두 팔로 직접 받아들었다.
머리의 반이 날아갔지만,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만큼은 아직 알아볼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도훈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네게 존경을 표한다. 쉬어라.”
그것은 시민들을 위해 끝까지 책임을 다했던 이에게 표하는 예의였다.
***
─콰아아앙!
도끼에 스친 전봇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내딛는 걸음마다 아스팔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실금이 갔다.
그야말로 괴력난신.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용재의 육체는 점차 다른 무언가로 개화하고 있었다.
“…….”
말 채로 비틀거리며 물러난 흑기사는 침묵하며 용재를 응시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용재는 그런 기사를 보며 거친 음성으로 도발을 이어 나갔다.
“어째 점점 검이 가벼워지십니다? 고작 이 정도이신가?”
확실히 흑기사는 처음에 비하면 갑옷 이것 저곳에 상처와 흠집이 났다.
다만, 도발을 이어 나가는 용재의 몰골이 그보다 몇 배나 처참했지만 말이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축축해진 머리에서 쉴 새 없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지금 장면만 떼어놓고 본다면 누구나 의아해하겠지만, 둘의 결투를 계속 보아온 사람들이라면 용재의 도발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던 둘의 대결은 점차 균형을 이루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처음과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에 닿을 정도로 밀려났던 용재가 이젠 흑기사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푸르르륵
가볍게 고개를 털며 투레질을 하는 흑마.
지친 듯 입에선 쉴 새 없이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 흑마의 목 주위를 가볍게 툭툭 두드린 흑기사는 재차 고삐를 당겼다.
다음 순간 가속하며 미끄러지듯 달리는 말의 신형은 마치 유령처럼 흔들렸다.
이때껏 용재를 몇 번이나 상처 입힌 기마 돌격은 그 위력보다도 연기처럼 사라지는 능력이 몇 배나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용재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렸다.
“기다렸다고. 그거.”
작게 중얼거린 용재는 있는 힘껏 다리에 기를 끌어모아 발을 굴렀다.
그러자 수없이 충격이 축적되어 갈라지고 파헤쳐졌던 땅이 뒤집어지며 폭발했다.
정확히 전방만을 노린 기의 폭발은 흑기사가 달려올 길을 모조리 헤집었고, 끝내 기사는 흑마 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 순간 흑마가 일렁이며 신형을 감추었다.
그러나 용재는 기다렸다는 듯 뒤를 향해 손을 뻗었고, 놀랍게도 허공에서 칠흑색 갈퀴를 움켜쥐었다.
“타이밍만 알아차릴 수 있다면……!”
─휘릭
갈퀴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 용재가 소리쳤다.
용재에게 붙들린 흑마는 장난감 목마처럼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별거 아니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바닥에 메쳐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