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빌데야크트 (4)
“저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
호진은 하얀 가면을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용재와 도훈을 바라봤다.
─쾅!
무기와 무기가 부딪친 거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이 울려 퍼지며 공간이 잘게 떨려왔다.
이미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던 용재와 도훈이지만, 지금 그들은 그 앞으로 한 단계 더 내딛는 중이었다.
‘자신만의 격에 눈을 뜨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 인간으로서의 한계라는 벽과 마주한 후, 방법을 찾아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목표로 하고 쫓아가고자 하는 선망의 대상.
호진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찾은 답은 호진이 나아간 길과 닮아 있었다.
바로 스스로의 격을 쌓아 올리는 것.
다만 호진이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을 잡으며 격을 쌓을 단초를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본인들이 닿을 수 있는 한계에 다다라 우화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저 둘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앞으로도 말이다.
호진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바라보던 하얀 가면이 문뜩 입을 열었다.
“……아름답군.”
“……?”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호진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그러나 하얀 가면은 홀린 듯 용재와 도훈의 싸움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구역질 나는 선신의 봉사자들이라 할지라도, 저만의 강함을 얻기 위해 쉴 새 없이 단련했겠지.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 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얀 가면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호진도 그 사실을 느꼈기에 놈을 공격하거나 비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겠지. 아니, 그 이상인가.”
“…….”
호진은 미간을 구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대화에 호진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까부터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를 이제 와 깨달은 건.
“너…… 다른 놈이구나.”
눈앞의 녀석은 시리온에서 만났던 녀석보다 목소리가 굵었다.
자세히 보면 키도 더 크고, 말투도 영 달랐다.
불사의 신, 하얀 가면과 같은 공통점에 매몰된 까닭에 동일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에 하얀 가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나는 오늘 너를 처음 보니까.”
“도대체 너흰 뭐 하는…….”
호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카랑!
급하게 뽑아 든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을 휘둘러왔던 하얀 가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말로 할 건가.”
“……그래, 말이 좀 길었네.”
호진이 이를 악물며 검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싸울 의지가 충만한 적을 앞에 두고 입을 놀리는 건 시간 낭비다.
궁금한 게 있다면 싸워서 제압한 후 들어도 충분했으니까.
─저벅 저벅
하얀 가면이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그는 명백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분명 우세했던 흑기사와 울산캠프 대표가 용재와 도훈에게 밀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건 동시에 자신감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호진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
호진은 사납게 웃으며 하얀 가면을 향해 마주 걸어 들어갔다.
검을 늘어트리고 모든 급소를 훤하게 열어 놓은 채로 말이다.
“……뭐 하자는 거지?”
하얀 가면은 그런 호진을 보고는 우뚝 멈춰 섰다.
놈이 기분이 나빴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호진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답했다.
“무시는 그쪽이 먼저 한 것 같은데.”
“사람을 잘못 봤군. 실력자인 줄 알았는데 알량한 자만심에 취해있다니.”
하얀 가면은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네가 오늘 죽는 이유는 그 자만심 때문이다.”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이미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완벽하게 하얀 가면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전투 중 상대의 움직임을 놓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녀석의 검이 호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카랑!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공중에서 불이 번쩍하고 튀었다.
동시에 호진의 검에 공격이 막힌 하얀 가면이 충격을 받은 듯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걸 막은 거지?”
분명 호진은 그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하얀 가면의 움직임을 놓친 순간, 이미 그는 호진의 뒤에 있었으니까.
‘환영인가? 아니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호진은 자신이 본 것을 곱씹으면서 녀석의 물음에 툭 하고 답했다.
“말은 그만하자며.”
“…….”
놈의 검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검의 권역.
그것은 호진의 시야에 영향을 받는 능력이 아니다.
뒤를 포함해 위와 아래.
말 그대로 검이 닿는 모든 범위를 완벽하게 인지할 수 있고, 나아가 통제할 수 있다.
하얀 가면이 휘두른 검이 영역 안에 들어온 순간, 호진은 그것을 재빠르게 받아친 것이다.
‘조금 아쉽네.’
호진이 급소를 열고 다가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상대가 방심하고 다가왔다면 최소한 팔 하나쯤은 가져갔을 텐데.
예상외로 날카로운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반격에 그친 것이다.
‘분명 눈앞에 있는가 싶었는데, 뒤에서 공격해왔단 말이지.’
호진은 방금 전 공격을 곱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막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것은 아니었다.
‘비결은 발인가.’
호진은 놈의 움직임을 떠올리다가, 놈의 특이한 기 운용을 눈치챘다.
그러나 단순히 기의 흐름만을 파악하는 것만으론 따라 할 수 없다.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 시선을 통한 페이크, 한 치의 오차도 용서치 않는 기의 운용.
그 모든 게 모여 놈의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빠른 접근과 허를 찌르는 공격 타이밍.
배울 수만 있다면 써먹을 곳이 무궁무진한 기술이다.
이제껏 발놀림이라곤 단순하게 빠르게 접근하고 회피하는 것에만 신경 썼던 호진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반짝였다.
“그 기술 이름 알려주면 나도 알려 줄게. 어떻게 막았는지.”
호진의 물음에 하얀 가면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환령보(幻靈步)다.”
환령보라.
예상대로 보법의 한 종류가 분명했다.
물론 호진에게 가르쳐 줄 리는 만무.
‘싸우면서 훔치는 수밖에.’
호진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검의 권역으로 막았다.”
“……어떻게 막았는지 알려 준다 하지 않았나?”
“알려 줬잖아. 더 자세히 듣고 싶으면 너도 환령보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 줘야 수지가 맞지.”
“……됐다.”
하얀 가면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 넘어오네.’
호진은 아쉬워하며 검을 바로 잡았다.
이제 놈이 방심할 이유는 없으니 일부러 급소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조금은 진지하게 해볼까.’
사실 심검, 아니 새로 얻은 검인 청성만 꺼내 들어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환령보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선 박빙의 상황을 연출하며 싸울 필요가 있다.
‘청성과 심검, 그리고 권능은 모두 봉인한다.’
오롯이 기와 검술, 그리고 권역에 의지해 싸우면 적절할 터.
호진은 비릿하게 웃으며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
‘이게 말이 되나?’
하얀 가면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인간은 고작 단신으로 자신에게 대항했다.
분명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와의 싸움은 한 합, 두 합을 지나 점점 길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끝내 깨닫고 말았다.
‘한때는 오롯이 검만으로 신들의 영역을 넘봤거늘.’
─주륵
너무 강하게 아랫입술을 깨문 탓에 가면 속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자신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하얀 가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인간에게 인생과 신념, 그리고 긍지마저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잠시, 하얀 가면에 뚫린 눈구멍 안에서 귀기 어린 눈빛이 타올랐다.
─꾸욱
하얀 가면은 손에 쥔 검을 한층 더 강하게 그러쥐었다.
모두 잃어버렸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질 수 없었다.
검술의 경지가 낮더라도 이길 수만 있다면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켜낼 수 있을 터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상대는 높은 수준의 검술을 지닌 것과는 달리 움직임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는 분명 제대로 된 보법을 배우지 못한 탓으로 보였다.
‘그 점을 노린다면 아직 승산이 있다.’
하얀 가면은 더욱더 세심하게 발을 놀리며 환령보의 진수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속도에 중점을 두어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진(進).
회피와 시야를 확보하는 퇴(退).
그리고 상대의 시각을 농락하는 환령보의 정수인 환(幻)의 묘리까지.
하얀 가면의 예상대로 상대는 자신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검의 권역…… 이라고 했던가?’
하얀 가면은 슬슬 남자의 능력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놈은 눈으로 보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검에 반응했다.
‘대략 몸으로부터 2m보다 약간 더.’
그게 남자가 반응하는 변경이었다.
‘사기적이군.’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한 능력이다.
저 공간 안에서, 놈은 언제 어느 방향에서 오는 공격에도 반응을 할 수 있었다.
저 정도의 실력자가 왜 보법을 익히지 않았나 했는데, 이런 능력이 있다면 확실히 보법을 익히지 않을 만했다.
병기를 다루는 이들에게 상대로부터 자신한테 유리한 간격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공격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얀 가면은 싸우는 내내 사람이 아닌 요새를 공격하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이제 슬슬 남자는 한계에 다다랐다.
보법을 통해 꾸준히 대미지를 축적시킨 탓에, 남자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으니까.
‘끝내야겠군.’
하얀 가면은 잔상을 남기고 빠르게 뒤로 이동했다.
그러곤 남자를 향해 투척용 단검을 던진 후 재빨리 상대의 옆으로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보법의 환의 묘리와 진의 묘리를 뒤섞은 공격.
눈앞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옆에서 검을 휘둘러오고, 뒤에선 검이 날아드는 것이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못 막는다.’
아무리 남자라도 일시에 이루어지는 공격을 막아낼 순 없을 터.
타이밍도 완벽했다.
다음 순간.
─후웅!
하얀 가면의 검은 완벽하게 허공을 갈랐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분명 베었는데 연기처럼 흩어졌다.
하얀 가면은 흐릿하게 흔들리며 사라지는 남자의 신형에 사고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서걱
그 찰나의 순간 귓가에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핏물이 튀어 올랐다.
하얀 가면은 핏물을 눈으로 본 후에야 자신의 팔 한쪽이 잘려 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팔이 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구는 것을 지켜봤다.
“…….”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팔을 거둬간 남자가 언제 지쳤냐는 듯 검에 묻은 피를 여유롭게 털고 있었다.
이에 하얀 가면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인가.”
그 두서없는 질문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꽤 됐어. 다 배운지는. 혹시나 뭐가 더 있나 두고 봤는데 끝인 것 같아서.”
“……허.”
하얀 가면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소리를 터트리며 검을 바닥에 꽂았다.
더 이상 바닥을 딛고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싸움은 끝나 있었군. 그것도 한참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