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빌데야크트 (3)
“고맙습니다, 덕분에 시간을 좀 벌었어요.”
용재는 자신과 마주한 기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앞서 보여준 기사의 행동들을 미루어봤을 때,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
“아하, 과묵하신 편이구나.”
용재는 혼자 중얼거리며 기사를 살폈다.
검은색 망토를 깊이 눌러쓴 기사, 비현실적으로 얼굴의 안쪽에 어둠이 드리워진 이 흑기사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움.
혹은 고양감.
뭘 기대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 급하시기는.”
용재가 도끼를 바로잡음과 동시에, 흑기사의 아래에서 칠흑색 말 한 마리가 솟구쳐 올랐다.
“저건 또 뭐야.”
─푸르륵
가볍게 투레질을 하는 근육질의 말은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 안광을 빛내는 말은 위에 탄 흑기사와 원래부터 짝이었던 것처럼 어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에 기승한 흑기사는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그것은 달린다기보다는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더럽게 빠르네.’
이에 용재가 이를 악물며 흑색의 도끼창을 휘둘렀다.
너무 빨라 어려웠지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으랴!…… 어?”
무슨 일일까.
도끼창이 닿는 순간 말이 물에 푼 먹물처럼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어디로…….’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라졌던 말이 어느새 용재의 등을 들이받고 있었으니까.
─쾅!
“크흑!”
용재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부유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만약 자신이 상대라면 지금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용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도끼창을 휘둘렀다.
─후웅!
“……어?”
손에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도끼창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그걸 놓칠 리가…….’
상대는 분명 높은 수준의 기사, 방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던 용재는 뒤늦게 고개를 돌리고서야 깨달았다.
“엇박자라고…….”
반격까지 예상한 흑기사는 그제야 도끼창이 허공을 가른 궤적을 따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걱
판금으로 된 갑옷이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가며 하얀 뼈가 드러났다.
─빠드득
오랜만에 느껴지는 고통에 용재는 자신의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정신 안 차리면 죽는다.’
용재는 몸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덕분에 이어지는 흑기사의 후속타가 허공을 갈랐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웬만한 곰 발바닥보다도 거대한 말발굽이 용재가 엎어진 바닥으로 내리찍었으니까.
‘왼쪽, 왼쪽, 오른쪽, 지금!’
세 번이나 몸을 굴려 발굽 세례를 피해낸 용재는 튕기듯 몸을 일으켜 말의 옆으로 빠져나왔다.
승마한 기사에게 가장 취약한 위치는 측면.
흑기사도 그것을 잘 알기에 뒤로 빠져나간 용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용재는 기껏 잡은 공격 기회가 사라졌지만 아쉽다고 느끼진 않았다.
─우물우물 퉤
아까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다가 부러진 어금니가 붉은색 침과 함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갑옷이 아니었으면 척추까지 칼이 닿았겠네.’
그랬다면 아무리 용재라도 전투를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방금 전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건 천운이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용재의 입가에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좋네.”
이런 상대를 기다려 왔다.
울그렉 이후트 같은 괴물들은 자신과 차이가 너무 났고, 다른 놈들은 또 너무 약했다.
반면 이 흑기사는 이길 수만 있다면 분명 자신을 성장시킬 상대였다.
「체력이 20프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스킬 광전사의 분노가 활성화됩니다.」
「일정량 이상의 피를 쏟았습니다. 스킬 전쟁의 신의 부름이 활성화됩니다.」
「상대를 상처입힐수록 체력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흥분으로 인하여 무감각이 활성화됩니다」
「출혈 내성이 활성화됩니다」
「자연치유가 활성화됩니다.」
‘나는…….’
꺾이고 부서질수록 강해지는 자.
상대의 피로 몸을 씻고, 살을 베어 물며 강해지는 광전사다.
“오오오오오오!”
어느새 등의 상처에 피가 멎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용재의 주위로 아까완 비교되지 않는 기세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
한편, 도훈과 이름 모를 헌터의 대치는 용재와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어라? 분명 제대로 말했을 텐데요? 설마 되살아난 지 얼마 안 돼서 발음이 안 좋나? 그러고 보니 사람이랑 얘기하는 건 처음인데.”
“……들린다.”
“아하. 그럼 대답을 해 주셔야죠. 섭섭하네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생글거리는 핏기 없이 창백한 헌터.
도훈은 그런 녀석을 질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분명 지닌 능력은 무섭도록 뛰어난데 하는 언행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그다지 만나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이었다.
그래도 마침 도훈도 궁금한 점이 있었기에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헌터였던 것 같군.”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헌터였다고요?”
헌터는 손가락으로 목 전체를 두르고 있는 상처를 가리켰다.
상처는 얼마 되지 않은 듯 새빨갰지만, 깔끔하게 잘려 나간 덕에 빨간 초커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깐…….’
도훈은 잠시 머리를 굴리며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죽은 지 얼마 안 됐다고?’
바람을 다루는 마법 계열의 A급 헌터.
오기 전 헌터 협회에서 전달받은 프로필에서 본 이미지가 눈앞의 남자와 일치했다.
“울산 대표?”
“어어? 저 아세요?”
도훈의 물음에 헌터가 눈을 크게 뜨며 갸웃했다.
그러기도 잠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전 울산 대표. 김지훈입니다! 알아봐 주시는 분이 있다니 이거 반갑네요!”
그 해맑은 인사에 도훈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역시 죽었었나.’
울산 캠프 생존자들의 흔적이 끊겼던 곳에서 보았던 전투흔.
누군가 싸웠으나 시체는 남지 않은 현장을 보며 혹시나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군.”
“예? 제가요? 왜요? 저는 지금 인생 최대로 행복한데요.”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의 지훈에게 도훈이 물었다.
“억울하진 않나?”
그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불사의 신의 세력에 동료는 물론 자신의 목숨마저 잃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는 되살려져 그들의 장기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 그가 행복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훈의 질문에 지훈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억울…… 했었죠. 목이 잘려 바닥을 구를 때까지만 해도 그랬어요.”
“지금은 아니다?”
“물론이죠. 어둠 속에서 다가온 그분의 음성은 정말이지 따스하고 포근하거든요. 그분과의 계약을 통해 죽음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순간 많은 게 사라졌습니다! 슬픔도, 공포도, 지겹도록 몸을 짓누르던 책임감조차도!”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도훈은 할 말을 잃었다.
울산 대표, 그러니까 지훈의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호진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볼 때의 그것.
맹신하는 자의 눈빛이다.
무엇보다 그의 말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계약…… 되살아난 건 자의인가?”
“그럼요. 계약을 맺지 않으면 이렇게 멀쩡하게 되살아날 수 없어요. 그쪽 정도면 그분과 직접 만나 뵙게 될 텐데 참고하세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도훈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검 두 자루를 날렸다.
이에 지훈은 싱글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단검들이 급격히 궤도를 잃더니 지훈을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이, 겨우 이 정도로 제 바람 마법을 상대하실 생각이시라면…….”
웃음을 흘리던 지훈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 줄의 실들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사방에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강한 풍압을 일으켜 그것들을 쳐내며 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강한 상대지만 자신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투사체를 다루는 상대라면 질 리가…….
─서걱
연이어 두 번 들린 절삭음과 함께 다리가 털썩 무너졌다.
“……어?”
발목에 힘줄이 잘려 나간 것이다.
‘어떻게?’
그 의문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발목을 벤 두 자루의 단검을 도훈이 막 회수하고 있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그래 보이시네요.”
도훈은 한눈에 봐도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예리한 실 수십 갈래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동시에 던졌던 단검을 회수하며 정확하게 발목을 노렸다.
믿기 힘들 정도로 능숙한 기의 활용 능력이다.
헌터 랭크라면 S급?
아니, 지금의 자신이라면 일전에 보았던 부산 대표도 어렵지 않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반면 눈앞의 남자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옆에서 폭음과 함께 흑기사가 말에 탄 채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둘이나 튀어나온 걸까.
“……이건 좀 억울할지도?”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
“…….”
전투를 지켜보던 하얀 가면은 허리에 찬 검집을 불만족스럽게 톡톡 두드렸다.
싸움의 양상이 전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필멸자들을 쫓아 온 사냥에서 조우한 두 인간은 놀랍도록 강했다.
강한 인간을 끌어들일수록 자신들의 세력은 강해진다.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은 좋은 일이었지만, 새로 얻은 두 신도가 다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기사와 마법사는 충분히 쓸 만한 신도들이었다.
하얀 가면은 능력과 실력을 쌓은 인간들을 존중했다.
필멸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
저런 능동적인 영웅의 행보야말로 그가 평생을 추구해 온 길이었으니까.
‘가세해야겠군.’
지훈의 발목이 잘려 나간 시점에 하얀 가면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의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했지만, 그것보다 목숨이 더 중요했다.
불사의 신의 축복은 사실 진정한 의미의 불사와는 다르다.
발목이 잘려 나간 정도야 금방 회복하지만, 다시 죽으면 영원히 영면하게 되니.
엄밀히 말하자면 부활에 가깝다.
‘우선은…….’
도끼를 든 놈 먼저다.
갑자기 강해진 녀석은 점점 기세가 좋아지고 있다.
빠르고 고통 없이 보내줘야 한다.
그것이 끊임없는 단련으로 신력을 쌓은 자들에게 자신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호의였다.
하얀 가면의 검이 용재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캉!
누군가 그의 검을 쳐냈다.
‘누구지?’
분명 교회 안쪽의 인간들은 단련하지 않은 녀석들뿐이었는데.
하얀 가면은 자신의 시야에 비친 인간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네. 설마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하는 짓이 여전히 더럽구나?”
자신의 검을 쳐낸 이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