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빌데야크트 (2)
짙게 깔린 안개 속.
도훈은 그 속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달리며 움직였다.
─핑
손가락을 타고 함정에 묶어두었던 실의 흔들림이 전해져왔다.
‘슬슬 바꿔야겠군.’
도훈은 몇 번이나 부딪쳐 위치가 파악된 함정의 실을 회수해 위치를 바꿨다.
─이히히히히힝!
그러자 재차 함정에 걸려드는 적의 수가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은색의 실은 안개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오로지 도훈만이 지천에 깔린 함정 사이를 재빨리 오가며 적들을 베어 낼 뿐이었다.
‘저쪽인가.’
도훈은 함정을 설치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검 한 자루를 던졌다.
─휘리리리릭 퍽
안개를 가르며 날아간 단검은 적에게 정확히 꽂히기도 잠시, 도훈을 향해 빠르게 돌아왔다.
이를 어렵지 않게 받아낸 도훈은 재차 단검들을 안개 속으로 던져댔다.
이곳은 도훈이 만들어낸 사냥터였다.
실로 이루어진 함정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실시간으로 적의 위치를 도훈에게 알려줬다.
도훈의 단검들은 안개 속에서 날아다니며 적을 꿰뚫었고, 가까이 있는 적들은 채찍처럼 날아드는 수십 개의 실에 조각이 나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지켜보던 용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물 만난 물고기네. 얼마나 강해진 거야.”
공방에서 새로운 무기를 얻은 도훈은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도훈 스스로도 그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체감하고 있었다.
손과 손가락에 연결한 실들이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움직였다.
평소라면 애먹을 만큼 강한 적도 새로 얻은 무기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후웅!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도훈은 순식간에 건물 위로 날듯이 올라가며 검을 피해냈다.
실을 건물의 외벽에 박아 넣고 자신의 몸을 당긴 것이다.
목표를 놓친 기사가 재차 도훈을 향해 뛰어오르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솟아 낸 실 한 가닥이 다리를 묶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급히 기를 둘러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움직임이 봉쇄당한 기사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다리, 무릎, 손목, 팔꿈치, 목.
움직일 수 있는 관절이란 관절엔 모조리 실들이 날아들어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갑옷들도 움직여야 하는 관절 부분은 방어가 취약하기 마련이다.
─끼긱 끼기기긱
끼릭 거리며 기분 나쁜 금속음을 내던 갑옷은 끝내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기사의 몸 또한 사방으로 뜯겨나갔다.
이를 무덤덤하게 지켜보며 도훈은 다른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훈은 자신이 강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무기 덕분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당장 방금 전의 기사만 해도 근접전을 벌였다면 결코 쉽게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후우.”
가볍게 숨을 토해 내는 도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오만해지지도, 무리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보완하는 싸움.
그것이 도훈이 싸우는 방식이었다.
도훈의 활약으로 적들은 교회를 향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흐름을 통제당하고 있었다.
만약 교회로 향하는 길을 전부 틀어막았다면 적들도 희생을 감수하며 사방에서 들이닥쳤을 것이고, 그렇다면 도훈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훈은 오직 한 군데.
교회의 정문만은 막아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들은 정문을 향해 몰려들었고, 정문은 몰려든 적들로 인해 정체가 발생했다.
호진이 지하철 입구에서 택한 것과 같은 전술이었다.
그리고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드루와, 드루와!”
검은 도끼창을 휘두르고 있는 용재였다.
용재가 도끼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타고 있던 말 채로 반 토막 난 기사들이 바닥을 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정문 앞은 시체들이 쌓여 벽이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쿵쿵!
육중한 땅울림과 함께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르륵!”
전신에 갑옷을 두른 콜드 블러드.
리자드 맨들이 타고 다니는 것으로 공룡과도 같은 생김새를 지닌 녀석들이다.
강화도에서 지겹도록 상대한 녀석이지만, 어딘가 다른 모습에 용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크고 위협적인 생김새.
하얗게 드러난 얼굴 뼈 위로 푸른색으로 귀기 어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용재는 몰랐지만, 이는 고대종 콜드 블러드를 되살린 것이었다.
─콰직
녀석은 한가득 쌓인 시체들을 한 움큼 물어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아이씨. 간신히 막아 놨더니. 그걸 치우면…….”
눈살을 구긴 용재는 도끼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아래에서 위를 향해 대각으로 크게 휘둘렀다.
아무리 도끼창이라지만, 서 있는 크기만 몇m에 달하는 콜드 블러드에겐 이쑤시개만 한 크기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서걱
그러나 상식과는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절삭음과 함께 거대한 콜드 블러드의 몸이 대각으로 양단되어 무너진 것이다.
─쿵!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교회의 정문은 한층 더 커다란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치웠으면 네가 다시 메워야지. 안 그래?”
용재는 중얼거리며 피식 웃어 보였다.
잠깐이지만 안개를 완전히 날려버린 도끼의 풍압에 용재가 들고 있는 도끼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봇대보다도 높이 솟은 도끼창은 무기라기보단 건축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러기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도끼창은 용재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확실히 큰 거 상대할 때는 좋네. 이름값 하는구만.”
용재가 새로 얻은 무기인 ‘거인잡이의 도끼창’.
도낏자루는 물론 도끼의 날조차 크기가 변경 가능한 이 무기는 대략 10m까지는 너끈하게 늘어났다.
“좋긴 한데…….”
용재는 어깨가 결리는 느낌에 한 손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무기를 내려다봤다.
“겁나 무겁네.”
크기가 늘든 줄든 무게는 변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원래 도끼 자체의 무게가 무겁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용재는 바닥을 짚고 있던 도끼를 어깨에 들쳐 메며 중얼거렸다.
“뭐 이것도 수련이지.”
근력 스탯이 50이 넘고 나서 무언가를 무겁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거인잡이의 도끼창은 꽤 무거웠다.
분명 휘두르다 보면 더 강해질 수 있을 터.
마침 수련을 도와줄 적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콜드 블러드가 쓰러지고 잠시 있던 공백기가 사라지고 재차 적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쾅! 콰직!
어김없이 말을 탄 해골 기사들을 베어 내던 그때였다.
“그만.”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에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음들이 뚝 하고 그쳤다.
말들의 발굽 소리도 갑옷이 덜컥이는 소리도 모두 멈췄다.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점점 소리가 가까워짐에 용재와 마주하고 있던 해골 기사들도 옆으로 비켜섰다.
─저벅 저벅
양옆으로 갈라진 불사의 신의 군대 사이로 세 명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기사와 헌터로 보이는 창백한 남자.
그들의 앞에 선 건 다름 아닌…….
“하얀 가면?”
일전에 시리온 왕국에서 하얀 가면과 조우했던 용재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얀 가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좋군.”
“뭔 소리……!”
용재가 표정을 구기며 되물으려던 순간 번뜩이며 검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막기는 했지만, 반쯤은 우연에 가까운 결과였다.
막은 시점에서도 용재는 자신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호오. 그걸…….”
반면 하얀 가면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설마하니 막을 줄은 몰랐기에.
한층 더 흥미가 동한 하얀 가면은 움직임을 멈추고 용재를 가만히 지켜봤다.
마치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왔을까 하는 시선으로 말이다.
정작 그 시선을 받고 있던 용재는 쓰게 웃었다.
‘……저건 못 이기겠는데.’
한 합 만에 깨달을 수 있었다.
우연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 차.
힘, 속도, 기술까지 밀린다.
무기끼리 부딪치는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은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괴물이 또 있었네.’
그리고 하얀 가면의 뒤에 선 인물들도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저 기사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기사를 바라보던 용재는 움찔 몸을 떨었다.
망토를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기사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선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네.’
기계적이고 명령대로만 움직이던 다른 해골 기사들과는 달리, 명백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용재만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하얀 가면도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꼭 해야겠나?”
─끄덕
기사가 고개를 주억이자 하얀 가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락했다.
“그리 호전적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하얀 가면이 허락하자 헌터로 보이는 남자도 기사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기사가 검을 뽑아 남자에게 겨눈 것이다.
명백한 나서지 말라는 경고에 헌터는 손을 들어 보였다.
“저쯤 되면 그냥 살아 있는 거 아닌가.”
용재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해 주지. 결투.”
오히려 시간을 끌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호진이 오기까지 버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하얀 가면은 용재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기사와 대치한 용재를 그대로 둔 채, 교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잠깐 어딜 가는…….”
이에 용재가 다급하게 하얀 가면을 불러 세우려는 때였다.
─쾅!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터져 나오는 격발음.
실을 타고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도훈이 하얀 가면을 향해 핸드건을 당겼다.
위치, 타이밍, 위력 모두 완벽했다.
도훈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적중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서걱
공중에서 잘린 탄환은 정확히 반절로 잘려 하얀 가면을 빗겨 지나갔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도훈의 뺨이 화끈하더니 뜨뜻미지근한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바람?’
도훈은 무덤덤하게 피를 닦아내며 하얀 가면과 재차 거리를 벌렸다.
핸드건의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귓가에 바람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가면의 앞으로 헌터 복장을 한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도훈을 겨냥하고 있었다.
‘저놈이군.’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한 상대가 누군지 파악한 도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얀 가면에게 닿으려면 녀석을 먼저 쓰러트려야 했기에.
도훈은 시선을 돌려 용재와 눈을 마주쳤다.
“망했는데요.”
“……동의한다. 살아남아서 보자.”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도훈의 등장에 하얀 가면은 한층 더 흥미로워하더니 팔짱을 꼈다.
원래의 목표였던 생존자들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이다.
하얀 가면을 멈춰 세우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도훈도 용재와 생각하는 바가 비슷했다.
시간을 끄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목표였다.
호진이라면 분명 이곳의 이상을 눈치채고, 도우러 와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