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빌데야크트 (1)
“생존자들 챙겨서 밖으로 나가!”
호진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녀석들은 신부가 죽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모습에 생존자들이 얼어 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만도 했다.
“쯧.”
달려드는 녀석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겨우 녀석들을 잡자고 심검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호진은 차선책을 선택해야만 했다.
─화악
호진의 주위로 무형의 기운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달려들던 감염자들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이…… 이게 무슨…….”
“멈췄어……?”
생존자들은 사방에서 몰려오던 감염자들이 석고상처럼 멈춰버리자 어안이 벙벙한 채 중얼거렸다.
왕의 위엄.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제압 기술이지만, 재사용 시간이 길기에 사용할 시점을 잘 판단해야 하는 기술이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겠지…….’
─까딱
그때 감염자 중 하나의 손가락이 가볍게 파르르 떨려 왔다.
놈들 사이에도 격이 높은 개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저는 강화 캠프의 지도자 이호진입니다. 헌터 협회의 요청으로 지원 왔습니다.”
호진의 설명에 부상을 입은 헌터로 보이는 사람이 중얼거렸다.
“이…… 호진이면…… 설마, 그 ‘측정불가’……?”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생존자들의 면면에 놀람과 동시에 안심이 깃든다.
“제 말만 잘 따라 주시면 모두 무사할 수 있습니다. 제 옆의 두 사람이 지상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서두르십시오.”
“네, 넵!”
부상 입은 헌터가 임시 지도자 역할을 했었는지, 그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르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 이분이십니다. 다들 침착하게 움직입시다.”
“오오……!”
얼어붙어 있던 생존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고,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좋아. 내 차례구만.”
도훈은 길 찾기 스킬을 사용해 감염자들의 파도와 어둠 속에서 정확하게 길을 찾아냈고, 용재는 기다렸다는 듯 도끼창을 휘둘러 감염자들을 분쇄하며 길을 열었다.
“우욱…….”
생존자들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피와 발에 밟히는 살점들에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한 명이라도 멈추면 다른 이들의 생존까지 위험하기에.
그리고 가장 후미.
─서걱 촤아악 촥
호진은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가차 없이 감염자들을 베었다.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후미를 자처했지만, 지금만큼 손쉽게 감염자들의 수를 줄일 기회도 없기 때문이었다.
감염자의 목을 베고, 어깨를 넘겨짚고 뛰어넘어 다른 감염자의 눈에 검을 꽂는다.
팔을 자르고 머리를 쪼갠다.
어설프게 상처만 입히지 않는다.
이들도 한 때는 인간이었던 이들.
그러나 호진은 감염자 한명 한명을 확실하게 죽음으로 인도했다.
검이 닿는 대로 베고 있지만, 우선적인 목표는 정해져 있다.
“키…… 륵.”
‘생존자들이 가는 방향의 왼쪽.’
소리를 흘리는 감염자를 발견한 호진은 감염자의 어깨들을 밟고 내달렸다.
울부짖기 시작한 녀석들을 가장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한다.
목이 풀린다면 움직이는 건 금방이니까.
호진이 날듯이 내달리며 진로상에 있는 녀석들의 머리를 모조리 쳐냈다.
그가 내달리는 길을 따라 피의 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자동차가 달리며 바닥에 고인 웅덩이가 물보라 치듯, 피들이 공중에 비산했다.
화려하지만 효율을 극대화해 움직이며 생존자들을 베는 호진의 모습은, 마치 살육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 같았다.
“아…….”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검광과 실루엣을 보며 생존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을 흘려야 했다.
까딱하면 생명이 위험한 순간임을 잠깐이나마 잊을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 호진의 움직임은 이미 하나의 예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 오랫동안 심취한 사람은 없었다.
호진이 이를 악물며 괴물들을 베는 게 누구를 위함인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밖…… 밖이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괴물들은 없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이 생존자들을 반겨주었다.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하늘을 조우한 생존자들의 눈에 눈물들이 차올랐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사람들은 그제야 단념했던, 내려놓아야 했던 삶의 의지에 천천히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올라오십니다!”
시민 한 명의 외침과 동시에 지하철 입구를 향해 피칠갑을 한 호진이 튀어 올라왔다.
호진을 마지막으로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지하철 입구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문제는…….
─오오오오오오오!
울부짖는 감염자의 포효와 내달리는 소음이 점점 커졌다.
왕의 위엄의 효과가 끝나자 감염자들이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은 눈앞에 나타난 먹이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도훈 씨, 캠프로 가는 길 찾으실 수 있죠?”
도훈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다.”
“좋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지하철 출구를 하나만 빼고 모두 무너트렸다.
그러곤 유일한 출구에 자리를 잡았다.
‘출구를 전부 막는다면 어떻게든 치우고 튀어나오겠지. 한 곳만 터주고 여기서 막는 게 좋겠어.’
좁은 출구에서 한 번에 튀어나올 수 있는 감염자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 놈들을 막아서는 건 호진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용재와 도훈도 그걸 잘 알기에 군말 없이 호진의 명령에 따랐다.
“아니, 하지만…….”
생존자들의 대표격인 헌터가 호진을 걱정된다는 듯 바라보자, 용재는 그를 질질 잡아끌며 말했다.
“저런 놈들은 형에게 손가락 한번 못 댑니다. 걱정 말고 따라오기나 해요.”
이번엔 길을 아는 도훈이 앞에 서고 용재가 생존자들의 뒤를 지키며 생존자 그룹이 출발했다.
직후, 그들의 뒤에서 호진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가 뼈를 끊고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에 생존자들의 걸음이 움찔거렸지만, 아무도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우리가 빨리 가야 형도 따라올 수 있습니다. 서두르세요.”
용재는 양치기 개처럼 생존자들을 이끌었고, 생존자들은 이를 악물고 다리를 놀렸다.
그들의 눈에 호진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영웅처럼 보였다.
몇몇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걸을 지경이었다.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영웅을 위해서라도 천근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사실…….
‘드디어 갔네.’
호진은 지킬 생존자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만끽하며 편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스륵
호진의 주위로 호진만이 느낄 수 있는 무형의 공간이 생겨났다.
검의 권역.
지하철의 입구 정도의 폭이라면 호진의 권역 안에 모두 들어오고도 남았다.
검이 닿는 거리를 의미하는 이 공간 안에서 호진은 실수하지 않는다.
상대의 호흡 하나, 날리는 먼지 한 톨조차 호진의 감각 안에 오롯이 들어왔다.
호진이 완벽하게 장악한 이 공간에서, 그는 매 순간 최선의 검로를 선정해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사람이 숨 쉬는 것을 까먹거나 잘못하지 않듯, 호진이 이 공간 안에서 휘두르는 검은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권역을 깨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
호진이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겐 결코 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오오오오오……!”
감염자들은 멈추지 않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지만, 그것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과 다르지 않았다.
호진은 그런 감염자들을 향해 장례를 치르듯 엄숙하게 검을 휘둘렀다.
원하지 않은 형태로 죽지조차 못해, 삶을 강제로 이어가고 있는 자들에 대한 호진의 마지막 배려였다.
슬슬 다른 감염자들이 올라오는 속도가 줄어들었을 무렵, 어느덧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검푸른 밤하늘 위로 달과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10분 정도 지났나.’
여기서 캠프까지는 걸어서 대략 20~30분 거리인데, 지치고 다친 사람들도 있으니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랐다.
대략 5분 정도 시간을 더 끌다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호진은 일행들이 사라진 방향에 짙게 깔린 안개를 발견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안개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뭔가…… 싸한데.’
호진은 빠르게 지하철 출구를 받치고 있는 천장을 무너트렸다.
오래는 못 버틸 거다.
일찍이 무너트렸던 지하철의 출구들 사이로 벌써 몇몇 손들이 비집고 올라오는 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호진은 일행들의 뒤를 쫓기로 마음먹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호진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
“……안개?”
길을 안내하면서도 주변을 주시하던 도훈의 눈이 커졌다.
저 멀리서 건물들을 집어삼키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안개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봐도 부자연스러운 짙은 안개를 조우한 도훈의 판단은 재빨랐다.
“안으로 들어가라. 서둘러!”
근처에 있던 교회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로 사람들을 안내한 도훈은 지척까지 다가온 안개를 노려봤다.
그리고 서둘러 뭔가를 준비했다.
그러기도 잠시, 용재가 사람들이 숨은 방에 임시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나오며 물었다.
“저건 또 뭔…… 아저씨 짐작 가는 거 있어요?”
“…….”
도훈은 입을 다물고 안개를 바라봤다.
어느덧 안개는 도훈과 용재조차 집어삼키고 교회까지 뒤덮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말의 투레질 소리와 갑옷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신부 놈이 말했다. 빌데야크트라고.”
“비데……?”
“비데가 아니라 빌데야크트다. 유럽 각국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민담이지.”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안개 속에 말을 타고 달린다.
안개 속에서 수렵견들이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냥꾼들이 무엇인가를 쫓듯 미친 듯이 질주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사냥꾼들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고, 말들은 허공을 밟으며 공중을 내달리고 있었다.
하늘을 질주하며 산 자들을 사냥하는 망자들.
“전설 그대로기는 하네.”
용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도끼를 꼬나 쥐었다.
상대는 신부가 말하던 불사의 신의 신관이자 이 일대의 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다.
모르긴 몰라도 쉽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사이로 무언가 내달리는 모습이 얼핏 보이고,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듯 커져만 갔다.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던 그때.
─뚝
굉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잠깐의 정적 후, 용재가 도끼를 슬그머니 내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사라졌…….”
─화악
그 순간, 짙은 안개 속에서 말을 탄 기수 하나가 튀어나오며 용재를 향해 창을 내찔렀다.
하지만 창이 용재에게까지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핑!
보이지 않게 설치한 실에 내달리던 기수의 목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으니까.
다음은 말의 다리가 실에 걸려 벌러덩 넘어지게 되며 목이 잘린 기수의 몸은 말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깜짝아.”
용재는 한껏 들어 올린 도끼를 꼭 쥔 채 허공에 피를 머금은 예리한 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건 또 언제 설치했데?”
“계단 아래로는 내려가지 마라. 교회 주변 곳곳에 설치했다.”
도훈의 말을 시작으로 안개 속 곳곳에서 뒹굴고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도훈은 기습을 얌전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적의 피와 비명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