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81화 (180/241)

181화. 광신도의 믿음 (5)

─쿵

잘려 나간 트롤의 몽둥이가 땅을 흔들며 바닥에 떨어졌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단면엔 하얀 서리가 낀 채다.

‘새벽을 밝히는 청성.’

호진은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르바흐에게 받은 검은 너무나도 쉽게 단단한 바위기둥을 반으로 갈랐다.

─후웅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서늘한 기운이 주변을 흩뿌려졌다.

습한 습지의 습기는 푸른색 얼음 결정이 되어 햇빛을 반사하며 시리게 빛났다.

‘터무니없는 걸 받았네.’

호진은 숨길 수 없는 기쁨을 입가에 머금은 채, 트롤을 향해 걸어갔다.

“그어어어…….”

트롤은 알 수 없는 기세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이 터벅터벅 거리를 좁히자 트롤은 위협하듯 남은 몽둥이를 집어던졌다.

호진은 그것을 슬쩍 옆으로 몸을 움직여 피해내고는 계속 다가섰다.

“고오오오오오!”

트롤은 이번엔 입에서 초록색 숨결을 토해냈다.

숨결에 닿은 풀과 나무가 급속도로 시들어갔다.

“위험해요!”

뒤에서 들려오는 주미의 다급한 외침에 호진은 피식 웃었다.

다음 순간 트롤의 숨결이 호진의 몸을 뒤덮었다.

「중급 내성이 중독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창이 떠올랐다.

‘이 정도는 우습지.’

어떤 독을 들고 와도 호진에게는 통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온갖 내성 스킬들을 합쳐서 진화시킨 호진에게 이 정도 독은 따끔하지조차 않았다.

‘흠.’

호진은 독 안개 속에서 잠시 고민했다.

주미가 있으니 전력을 보여서는 안 된다.

A급.

딱 그 정도가 광신도들을 자극하지 않고, 욕심이 나는 등급일 테니까.

호진은 그 정도만 힘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푸르게 피어나는 기운이 검을 휘감는다.

다음 순간.

─화악

몸을 휘감고 있던 독 안개를 찢어발기며 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뒤에서 또다시 주미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뭘 조금 보여줄 때마다 놀라며 반응해 주니 확실히 재미가 있다.

‘이게 뉴비들과 함께하는 재미인가.’

호진은 고개를 들어 트롤과 눈을 마주쳤다.

“그어어어어!”

그러자 트롤은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겁에 질린 개의 짖음과 비슷했다.

적당히 싸우다 잡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적을 가지고 노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호진의 신형이 일렁인다 싶더니 어느 순간 트롤의 앞으로 이동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트롤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호진이 서 있던 자리가 깊게 파이며 흙이 튀었다.

하지만.

─타다닥

호진은 이미 뻗어진 팔을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서 놈의 어깨를 밟고 서 있었다.

그러곤 어렵지 않게 검을 트롤의 뒤통수에 물 흐르듯 검을 박아 넣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검 때문에 원래 그곳에 구멍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쿵! 쿠구궁

잠시 후, 트롤의 무릎이 바닥에 떨어지고, 이어서 머리도 진창 속에 처박혔다.

어느새 내려온 호진은 검에 묻은 피를 한번 털어냈다.

그러자 차갑게 얼어붙은 피들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주미의 입은 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있었다.

‘재밌네. 이거.’

호진은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이렇게 등급을 속이고 활동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진이 그녀의 반응에 재밌어하며 한숨 돌리는 사이, 용재와 도훈은 익숙하다는 듯 주변을 경계하고 트롤의 부산물을 챙겼다.

주미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확신했다.

‘A급. 그것도 합을 맞춘 지 오래된 베테랑 파티잖아.’

능숙한 연계와 사냥 솜씨.

그리고 무엇보다 침착한 움직임에서 그들이 쌓아 올린 경험들이 느껴졌다.

정부 소속 A급 헌터들과 함께할 때도 보기 힘든 숙련도와 강함에 주미는 전율했다.

‘근데……. 저런 A급 헌터도 있었던가?’

한국에 50명 정도 존재한다던 A급 헌터 중 호진 일행과 같은 인물들은 들어본 적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에게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광신도들에겐 등급을 숨겨놓고 자신한테는 이렇게 전부 보여주는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녀를 향해 호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짐작하셨듯이 저흰 A급 헌터 수준의 파티거든요.”

“예? 아니 저는 아무것도…….”

그 말에 주미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젓자 호진은 이어 말했다.

“딱히 숨기는 건 아니라 괜찮습니다. 그냥 눈에 띄기 싫은 것뿐이거든요.”

“아…….”

“그보다 신부님에게도 게이트를 클리어한 후 솔직히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이거, A급 던전이라니. 아마 신부님이 눈치채셨던 모양입니다. 하하!”

“아, 아하하하. 다행이네요…….”

호진이 소리 내어 웃자, 주미도 함께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보기엔 눈앞의 남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C급이라고 속이고 A급 게이트에 사람들을 밀어 넣은 인간을 옹호하다니.

‘분명 불멸……이 목표라고 했던가.’

저렇게 강하면서도 죽음이 두려운 걸까.

아니, 이유가 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만약 이런 강자들이 광신도 세력에 합류한다면 부산이 정말로 위험해진다.

게이트에서 나가자마자 협회에 최대 비상단계로 연락해야 했다.

‘어쩌면 부산은…….’

이미 폭풍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

「A급 던전 ‘아훅쉬툭의 금역 짐승의 숲’을 클리어했습니다.」

「늪지대의 지배자 만티코어를 처리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파티로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분배됩니다.」

「쉬운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쉽네.’

호진은 검을 납검하며 쓰러진 괴물을 내려다봤다.

이 던전의 보스는 만티코어였다.

사자처럼 생긴 놈의 머리가 얼어붙은 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검기를 약간 불어넣어 베었을 뿐인데 이 모양이 이 꼴이다.

솔직히 그 공격에 죽을지는 정말 몰랐다.

‘미리 작업해놔서 망정이지.’

미리 열심히 당하는 척 연기를 해둔 덕에 주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용재는 그냥 처맞기를 반복했고, 도훈은 실을 이곳저곳에 뿌리며 화려한 싸움을 연출했다.

그래도 그 연기들이 숙련도에 도움이 된 모양이다.

도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실을 회수하고 있었고. 용재 역시 내성이 올랐다며 싱글벙글했으니까.

호진도 레벨이 하나 올랐기에 만족스럽기는 했다.

‘새로 얻은 보상은…… 오.’

「백수의 왕의 이빨 목걸이」

「종류: 액세서리」

「정보: 짐승형 몬스터에게 추가 피해 및 공포 부여. 민첩 +3 증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굉장한 물건이 나와 버렸다.

착용하기 편한 액세서리 종류에다가 붙은 효과도 굉장하다

‘스탯이 붙은 아이템은 처음 보네.’

높은 레벨일수록 레벨을 올리기 어렵기에, 더욱 귀중한 보상이었다.

호진은 곧장 목걸이를 꺼내 착용했다.

옷 안에 착용하니 티도 나지 않았다.

화려한 걸 싫어하는 호진으로서는 만족스러웠다.

‘그래, 한 번쯤 터질 때도 됐지.’

서울에서 이곳까지 10개가 넘는 던전들을 돌며 얻은 보상을 떠올린 호진은 몸서리를 쳤다.

어디다 써먹을 수도 없는 그 쓰레기들은 인벤토리에서 조용히 썩는 중이다.

버리기는 아까우니 헌터 협회에 기부나 하면 되겠지.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만티코어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챙겼다.

“그건 부산물 정리 안 해?”

“이건 선물용이라서.”

그렇게 답한 호진은 상태창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게이트가 닫히질 않는다.

놈들이 뭔가 장치를 해놓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냥 이것도 두고 가도 되겠지만, 호진은 기왕이면 신부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돌아가죠.”

호진은 옅게 미소 지으며 일행들과 함께 광신도들의 교단으로 향했다.

***

“따라오시죠.”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신도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호진들을 강당 안으로 안내했다.

“음?”

강당에 들어선 호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세제 냄새?’

아침에 강당에서 빠져나올 때만 해도 나지 않았던 세제와 락스 향이 강당에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냄새를 빼기라도 하려는 듯 창문들도 활짝 열려있는 상황.

‘냄새가 나는 쪽은…….’

호진은 고개를 돌려 창고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문을 열어준 신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뭐가 있군.’

호진이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이에 신도가 그 앞을 가로막으려는 그때였다.

“형제님들 그리고 자매님까지 이렇게 다시 뵈니 기쁘군요.”

단상 뒤쪽에 난 문에서 신부가 반갑게 인사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신부는 한나절 만에 되돌아온 호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호진은 웃으며 신부에게 말을 꺼냈다.

“말씀하셨던 순교를 행하고 오는 길입니다.”

“순교요? 아 그럼 게이트를……?”

“네, 맞습니다. A급 던전이더군요.”

“A급? 정말입니까? 이거,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 할지.”

신부는 놀라는 척하며 호진에게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미묘한 실망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인자한 신부를 연기하며 호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치신 분들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던전은 다른 분들을 통해 처리하도록 하겠…….”

“아뇨.”

“……?”

말을 끊으며 대답한 호진의 말에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쿵!

호진의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짐승의 사체가 강당에 떨어져 내렸다.

호진은 당황한 신부를 향해 만티코어의 수급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던전은 클리어했으니까요.”

“……아니, 어떻게.”

신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과장해서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속엔 진짜 놀란 기색도 섞여 있었다.

클리어할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신부님. 사실 저희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A급 헌터 파티입니다.”

“……예?”

이번엔 신부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예상치 못한 호진의 언행에, 그가 연기하는 가면이 눈에 띄게 금이 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A급 인증은 못 받았으니 A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A급 던전이라면 몇 번이나 클리어해봤습니다. 정부와 협회의 감시를 피해야 했기에 이렇게 숨기고 다니는 거고요.”

“정부와 헌터 협회…….”

신부는 그 말에 다시 냉정을 되찾으며 호진들에게 말했다.

“왜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는 겁니까?”

“저희는 목적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신부는 호진의 단호한 대답에 멈칫하기도 잠시,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 인가요?”

이에 호진과 뒤에 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고 아픈 게 싫다.

허무한 죽음이 두렵다.

A급의 헌터라 해도 이는 다르지 않았으니까.

신부는 호진이 댄 이유에 납득은 했지만 신뢰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것은 눈앞의 헌터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였을 뿐.

이제 그 실력을 확인하였으니, 믿을 만한지를 알아볼 차례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불사의 신께 은총을 받기 위해선, 정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할 겁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진의 대답에 신부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부에서 심은 세작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임무.

동시에 A급 헌터는 되어야 가능한 임무.

“부산 캠프 지도자의 목을 가져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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