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광신도의 믿음 (4)
─띠링
「A급 던전 ‘금단의 늪지’에 입장합니다.」
「난이도 : 쉬움」
“흠.”
호진은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예상대로 A급.
호진들을 시험해보겠다는 의도가 훤히 드러났다.
아마 헌터 등급을 속인 게 들통난 모양이다.
‘쉽게 보면 안 되겠어.’
호진은 의미심장하게 웃던 신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이미 걸렸다면 어쩔 수 없다.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한다.
A급 던전을 클리어하면 등급을 속였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지 못한다면 교단의 내부로 파고들 수 없을 테니까.
‘등급을 속여 말한 이유야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어어?”
뒤늦게 따라 들어온 주미가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반쯤 비명을 터트렸다.
“A, A급? ……무, 무무, 무리예요!”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재빨리 호진의 팔을 잡고 게이트 쪽으로 몸을 끌었다.
“돌아가요! 어서! 여기 있는 것만으로 언제 죽을지…….”
─부스럭
그녀는 우거진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부스럭 부스럭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지만, 팔을 잡아끌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미는 크게 확장된 동공을 굴려 점점 가까워지는 수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접근해 오는 무언가.
미처 경고하기도 전 모습을 드러낸 그 무언가에 주미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티이타틀란!’
도마뱀과 같은 머리에 사자와 같은 몸을 초록색 털로 뒤덮은 밀림의 공포.
독침이 달린 꼬리와 송곳니,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은 강철조차 가볍게 찢는다.
밀림 지형의 게이트에서 종종 발견되며 C급 게이트에선 보스로도 등장하는 녀석이다.
‘끝났다.’
주미의 머릿속엔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쳤다.
우연한 각성 이후, 먹고 살기 위해 헌터 협회에 취직.
사무직을 지원했으나 인력 부족으로 등 떠밀리듯 현장직을 뛰기 시작했다.
죽을 위기를 넘기며 그만둘까도 여럿 고민해봤지만,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구해낸다는 사명감과 고양감이 그 발목을 붙잡았다.
‘아아, 이번 달 월급도 못 받았는데.’
이번 임무만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기로 약속받았는데.
그간 쓰지도 못하고 모아둔 월급이 눈에 아른거렸다.
‘음? 근데 왜…….’
주마등치고는 너무 긴 후회와 상념을 끝마친 주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타이타틀란은 공격성이 너무 높아 인간을 보며 그 즉시 달려들기로 유명하다.
즉, 진즉에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물고 씹고 뜯고 즐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녀석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거 왜 저래……?’
파충류 특유의 세로 동공은 긴장한 듯 잔뜩 좁혀져 있고,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다.
‘저건 마치 겁이라도 먹은 것 같은…….’
주미가 그런 생각에 다다른 그때, 또 무엇인가 수풀 사이로 불쑥 튀어나왔다.
“찾았다.”
한 손에는 피 묻은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덜렁거리는 타이타틀란 머리를 한 꾸러미 들고 있는 피를 뒤집어쓴 인간의 모습.
꿈에 나올 것 같은 공포스러운 형상에 기절할 것 같았다.
“어딜 도망가?”
“쉬이이이익!”
공포에 질린 타이타틀란의 단말마와 붉게 터져 나오는 선혈.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으음…….”
“오, 뭐야 금방 깼네.”
용재는 피를 닦아내며 눈을 끔뻑거리는 주미를 향해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살폈다.
“타이타틀란은? 마지막에 그 괴한은?”
“…….”
용재가 피를 닦던 채로 멈춰버리자.
도훈과 호진은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미의 얼빠진 모습을 보며 호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 도마뱀 닮은 괴물이라면 전부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괴한은…….”
호진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영혼이 가출한 용재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에?”
누가 뭘 정리했다는 걸까.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던 그녀를 향해 용재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무해. 나만 맨날 이런 오해를 받고……. 나도 딱히 피를 뒤집어쓰는 걸 즐기는 건 아닌데.”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주미는 마지막에 나타난 괴한과 눈앞의 남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일행들보다 고작 1분 남짓 먼저 게이트로 들어갔을 뿐이다.
그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타이타틀란의 머리는 여러 개.
B급 상위, 어쩌면 그 이상이다.
근데 아까 자신이 그를 가리켜 했던 말.
‘피를 뒤집어쓴 괴한이라고…….’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주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이에 용재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누나.”
“……?”
주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잠시, 뒤에 들린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 뭐?’
눈앞의 남자는 대충 봐도 서른 초반.
머리나 수염을 정리한다고 해도 스물 중반 아래로는 보기가 어려운 얼굴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도훈과 호진은 허벅지까지 꼬집어가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무리 용재라도 상처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저 이제 막 스물한 살이거든요. 아까 소개하실 때 분명 스물셋이시라고.”
“맞……습니다.”
“말 편하게 해요. 괜찮죠. 누나?”
“어어. 물론……이지.”
삐걱이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를 향해 호진이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으신 것 같으니 계속 진행해도 될까요?”
“네? 아니…….”
주미는 대답을 하려다 입을 뻥긋거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B급과 C급들이라고 소개했다.
원래라면 A급 던전을 죽어다 깨어나도 깰 수 없는 전력들이다.
하지만, 용재라는 사람이 보여준 믿을 수 없는 위력.
나아가 여유롭기 그지없는 두 사람을 보며 주미는 불가능할 거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주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무기인 창을 꼭 쥐었다.
그녀에게도 목표가 있었다.
울산캠프를 휘젓고 나아가 이곳 부산 캠프에 뿌리내린 광신도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것.
해결은 다른 고위 랭크 헌터들이 하겠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다.
나아가 눈앞에 등장한 수수께끼의 지원자들의 정체 역시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 광신도들에게 합류한다면 부산도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조심히 따라오시죠.”
호진은 그렇게 말한 후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밀림처럼 빽빽하게 우거진 풀과 나무들을 헤치고 나아가기도 잠시, 일행들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멈춰서야 했다.
90도에 가까이 깎아지른 듯한 벼랑.
높이만 수십 미터라 헌터들이라 해도 뛰어내릴 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바위를 타고 내려가거나 크게 우회해 내려가는 것이었다.
“우선 안전하게 돌아가시는 게…….”
주미는 조심스레 손을 들며 의견을 피력했다.
절벽에 매달려 내려가는 사이 몬스터에게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벽에 매달린 상황이라면 손도 발도 못 쓰는 상황일 테니까.
하지만 호진은 생각이 다른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훈 씨.”
“가능하다.”
호진의 부름에 도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품에서 은빛의 구를 꺼내 들었다.
다음 순간 구에서 뽑혀 나온 한 줄기의 실이 근처 나무를 휘감았다.
“……저걸 타고 내려가자는 말씀이신가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은 실.
주미는 그것을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도훈은 실을 힘껏 잡아당기며 말했다.
“걱정 마라. 튼튼한 실이다.”
그때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묶인 나무가 우직 소리를 내며 깔끔하게 밑동이 잘려 나갔다.
“…….”
“…….”
잠깐의 정적 후 도훈은 근처 바위에 실을 묶으며 말했다.
“썩은 나무였나 보다. 어쨌든 실은 튼튼하다.”
다른 의미로 불안해진 주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지만, 일행들은 의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돌아서 내려가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고, 여기를 그냥 뛰어내리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짓이니까.
─슈르르륵
망설일 시간은 없었기에 도훈은 그냥 그녀의 허리에 실을 묶었다.
“잠…… 잠시만요!”
“간다.”
“나도 간다!”
동시에 줄을 타고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세 사람과 강제로 끌려가는 사람 하나.
“꺄아아아악!”
잠시 후.
절벽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내려올 수 있었다.
사실 이쯤 되면 거의 뛰어내린 거나 다름없었지만, 어질어질한 주미의 머리론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일행들을 따라 걷기도 잠시, 또 무언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쿵! 쿵!
무겁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
대충 들어도 그 덩치를 짐작할 수 있는 괴물이 하늘 높이 솟은 나무를 이쑤시개 부수듯 부러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늪지 트롤이에요!”
주미는 창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상대는 명실상부한 B급 게이트 보스 몬스터다.
트롤은 개체 수가 드물지 않아, 보고된 사례만 수십 건이 넘는다.
‘하지만 아까 전 용재와 도훈 씨가 보여준 실력이라면…….’
힘을 합치면 못 잡을 것도 없을 터.
늪지 트롤은 바위처럼 질긴 가죽과 독성을 띤 숨결로 유명하다.
하지만 움직임이 둔하고 체력회복은 일반 트롤보다 더딘 편.
도훈이 실로 움직임을 묶고 용재와 자신이 기다란 창과 도끼로 조금씩 체력을 깎아낸다면 충분히 할 만했다.
자신의 계획을 말하려던 순간, 여태 가만히 있던 호진이 앞으로 나섰다.
아까부터 팀의 리더의 역할을 맡던 사람이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피하세요!”
호진은 산책하듯이 여유롭게 트롤에게 다가갔다.
트롤은 고개를 갸웃한 뒤 포효를 내지르며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둘렀다.
말이 몽둥이지 건물을 받치는 돌기둥과 같이 거대한 흉기가 거리낌 없이 호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아.’
주미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곤죽이 되어버릴 남자를 지켜보며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조금만 더 빨리 계획을 브리핑했다면.’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봤던 걸까.
그 순간이었다.
─서걱
“어?”
짚단을 베는 듯한 깔끔한 절삭음에 주미는 눈을 깜빡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었으니까.
“그어?”
트롤은 잘려 나간 몽둥이를 들어 올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호진은 어느새 뽑아 든 검을 들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물 고맙다, 아르바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