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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75화 (174/241)

175화. 지원 요청 (1)

“준비가 끝났다.”

그렇게 말하는 도훈의 뒤로 떠날 채비를 마친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호진의 차원 이동문을 이용해 시리온으로 이동할 이들이었다.

용재와 도훈은 기사단원들을 데리고 대망루로 향하기로 했다.

대망루엔 아직 수습하지 못한 기사들의 유해도 있고, 지키던 기사들이 모두 죽었기에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에우리우스는 홀로 계속해서 성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임무는 계속되어야 하니까.

다만 기사단 중에서만 혼자일 뿐, 엄연히 말하면 단신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하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꼭 쓸 만한 정보를 물어 올게요.”

예은이었다.

그녀는 에우리우스를 따라가, 이번 기회에 동부 왕국을 비롯해 성국의 정세를 살피겠다고 했다.

호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럼, 그래야 하고말고. 내게 맡기시게나. 다음에 또 보지, 귀공.”

에우리우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은은 에우리우스에게 내공심법과 기에 대해서 배우는 중이다.

아마 그 때문에 이번 임무를 자처한 것이리라.

이대로라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예은은 입술을 조용히 짓씹으며 결의를 다졌고, 호진은 그런 그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로써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이곳에 남은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뿐.

“떠나시는군요.”

아르바흐가 섭섭하다는 말투로 호진에게 말을 건네 왔다.

왕국 재건으로 정신이 없는 아르바흐와 여섯 가문의 가주들이 그를 직접 배웅하러 온 것이다.

아르바흐는 물론 여섯 가주들도 이제는 안다.

이 영광된 전투의 숨은 주역이 누구였는지.

호진과 그 일행들이 아르바흐를 돕지 않았다면 이 왕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말이다.

“고생했다. 언제든 편하게 돌아와라.”

구르드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옆에서 오웬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왜 네놈이 선심 쓰듯이 말하는 거냐. 포탈도 저자가 만들어 놓은 건데.”

“뭣…… 내 말은 언제든 환영한다는 의미다!”

“그러시겠지.”

냉소하며 고개를 돌린 오웬.

그런 그들을 보며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바흐는 밝게 웃으며 호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룩크툼 왕국은 언제나 호진 님의 편에 설 것입니다.”

호진은 그 손을 굳게 마주 쥐며 답했다.

“저 역시 바룩크툼에 또다시 위기가 드리운다면 얼마든지 검을 들겠습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듯 아르바흐와 가주들이 눈을 빛냈다.

“그럼…….”

호진이 목례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왕국의 은인께 경의를!”

왕실 근위대장 토그림 브론즈비어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척

대기중이던 근위대와 고위 전사들이 도끼를 이마에 가져다 대며 길을 열었다.

그러자 차원문까지 일행들이 떠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스륵

왕관을 벗은 아르바흐와 여섯 가주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왕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아르바흐는 그저 호진에게 은혜를 입은 한 명의 난쟁이일 뿐이었다.

“…….”

호진은 잠시 당황하며 멈칫했지만, 이내 옅게 웃으며 마주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들이 표한 예우는 호진과 그 일행들이 차원문을 건너는 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

“오랜만이네.”

호진은 강화에 발을 디디며 중얼거렸다.

이번 여정은 무려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했다.

아마 캠프의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

호진은 약간의 걱정과 설렘을 품은 채, 점점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게이트를 둘러싼 신전과도 같은 구조물이었다.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하얀색 기둥들과 높이 솟은 천장은 이전에 못 봤던 것들이다.

바위와 나무만이 울창하던 숲은 더 이상 없었다.

호진의 눈에 들어온 건 잘 닦인 도로와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 그리고…….

멀리 높이 솟아오른 성.

정확히는 거대한 요새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캠프라고?’

바룩크툼의 수도 카라즈 안코르와도 비견될 거대한 도시의 모습.

물론 아직 건축 중인지 형태 자체는 투박했으나, 크기가 주는 압도감 자체는 굉장했다.

이제는 예전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에 호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꽤 바뀌었을 거라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의 변화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고 있는 호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병사? 아니 근데…… 복장이 이상한데?’

철로 된 투구와 갑옷을 입은 병사의 모습에 이곳이 강화인지, 아직 이세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병사는 약간 놀랐지만 이내, 긴장을 유지한 채 호진을 향해 물었다.

“혹시 방금 ‘문’에서 나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병사는 갸웃하는 호진을 보고 급히 말을 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연락 없이 문이 열린 건 처음이라서요.”

호진이 없어도 이동문은 가동이 가능하다.

다만, 문을 이용할 때마다 호진의 격이 소모되므로, 일자를 정해 놓고 열어왔다.

그렇기에 병사의 반응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지는 병사의 질문에는 호진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호진 님이나 다른 분들에게 연락이 닿은 겁니까?”

“……?”

급하게 연락할 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호진이 시리온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건 한 달 전쯤이다.

아마 그사이에 급한 연락이 있었던 모양.

“제가 이호진입니다.”

“끕……!”

안 그래도 놀라 커진 병사의 눈이 이젠 툭 치면 튀어나올 지경으로 커졌다.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호진을 향해 쏠렸다.

소란스럽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십수 명이 이야기를 나누던 곳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이렇게 놀랄 일인가?’

그때 그를 홀린 듯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뗐다.

“호진 님……?”

“정말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자, 그제야 병사는 정신을 차린 듯 호진에게 경례하며 소리쳤다.

“수고하십니다! 호진 님의 경전은 매일매일 밤낮으로 읽고 있습니다!”

“……?”

호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수고하십니다.”

이에 병사는 감동에 찬 눈을 반짝이기도 잠시, 뭔가 기억난 듯 서둘러 말을 쏟아냈다.

“아 참, 이럴 게 아니라…… 그, 서둘러 방벽으로 가시죠!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 겁니다.”

“방벽? 아니지. 그보다 뭐가 늦었다는 겁니까?”

“지원이요! 정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누가, 왜, 무슨 일로, 언제까지 등 자세한 상황은 하나도 모르겠지만…….

급하다는 거 하나는 알겠다.

호진은 병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하야를 불러냈다.

─크륵

오랜만에 불러낸 게 기꺼웠는지,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호진에게 들러붙는 하야.

호진은 그런 하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곧장 위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미안하지만 서둘러줘야겠다, 하야.”

“크르르륵!”

하야가 맡겨 두라는 듯 그르렁거렸다.

“경전과 똑같아…….”

“오오, 호진 님이 돌아오셨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홀린 듯 호진과 하야를 바라볼 뿐이었다.

표정엔 안도와 반가움이 그리고 기쁨이 뒤섞인다.

‘나 없는 사이에 뭘 한 거야?’

좋아하는 영화배우?

최애 아이돌?

턱도 없다.

저 눈빛들엔 광적인 집착과 동경이 녹아들어 있다.

‘아아, 그렇지.’

기억났다.

이제는 익숙한 시리온, 그리고 신 아쉬나학 국민들이 호진을 바라보던 그 눈빛과 같았다.

호진은 쓰게 웃으며 고삐를 당겼다.

다음 순간 주변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눈앞의 풍경이 접히듯 다가왔다.

민망해서라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호진이었다.

하지만 호진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도착할 캠프, 아니 저 요새 도시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

“뭐? 정부가 어떻게 됐다고?”

용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보를 전달한 헌터의 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반쯤 공중에 뜬 헌터의 몸이 애처롭게 흔들렸지만, 아무도 말리는 이는 없었다.

“정부와…… 각 지역의 캠프들이…… 위, 위험합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그야…….”

헌터는 눈치를 살피다 말을 삼켰다.

‘네가 듣지도 않고 그냥 이쪽으로 달렸잖아…….’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딱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헌터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저 자신의 맡은 바를 다했을 뿐인 헌터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옆에 있던 도훈이 그런 용재를 막아섰다.

“이미 늦었다.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면 된다.”

“……그렇긴 하죠.”

용재는 헌터를 놓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굳게 닫힌 대망루의 문은 그날의 모습과 변한 게 없었다.

독무 때문에 미처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기에, 용재와 도훈은 기사단과 함께 서둘러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

입구를 지켜보던 기사단들은 소란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고적한 대망루의 풍경이 낯설기라도 한 듯, 기사단은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각오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안쪽을 보는 게 두려운지 그들의 동공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따라오시죠.”

혀를 가볍게 찬 용재는 기사단을 이끌고 망루 외벽을 타고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엔 막아둔 입구 대신 망루 안으로 드나들 수 있는 뚫린 벽이 있었으니까.

“저희가 먼저 들어갑니다.”

설마 아직까지 독무가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몰랐기에 가스 마스크를 쓴 용재와 도훈이 앞장을 섰다.

내부는 꽤나 밝았다.

저번 싸움의 여파로 이곳저곳이 부서지며 빛이 새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난번보다는 나으려나?”

용재는 달빛에 의존해야 했던 지난번보다는 상황이 나을 거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젠 말라비틀어진 핏자국들이다.

피와 함께 지저분하게 튄 무언가들이 벽과 바닥에 거무튀튀하게 묻어있다.

환한 덕분에 그런 곳들을 피해 발을 디딜 수 있었지만, 대신 참혹한 풍경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시리온의 날씨는 뜨거운 편이다.

이미 빠르게 부패한 시체들의 피부는 검고 푸르게 변해 가죽만 남았다.

“……아니네. 지난번이 열 배는 더 낫네.”

“……끔찍하군.”

도훈은 드물게 가시 돋친 목소리로 읊조린 후, 따라 들어오려는 기사들을 막아섰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내뿜은 가스가 내부에 가라앉았을 수도 있었다.

우선은 아래층에 막아 둔 문과 창문들을 여는 게 먼저였다.

도훈과 용재는 서둘러 입구로 내려갔다.

각종 망루 안의 자재들로 막아둔 입구가 눈에 띄었다.

둘은 그것들을 빠르게 허물고 닫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내부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신선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오후의 햇빛이 실내로 쏟아지며 아까보다도 망루가 한층 더 밝아 보였다.

“됐군.”

“이제 시체들만 수습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서던 용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지?”

“……없어요.”

용재의 두서없는 말에 도훈은 곧장 알아듣지 못하고, 용재의 시선을 따라가야만 했다.

검붉은 색으로 물든 벽면.

눈에 익은 풍경이지만 어딘가 다르다.

그제야 그 이질감을 눈치챈 도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감각에 쐐기를 박듯 용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미안의 시체가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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