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약속과 보상 (3)
그렇게 노인을 따라 도착한 공방의 안쪽에 위치한 방.
“우와…….”
용재를 비롯한 일행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무구들이 길게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끼, 창, 검, 활.
채찍과 방패, 전투 망치부터 갑옷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무구들이 아쉬나학에서 보았던 국보들과 비교해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니, 무구의 상태와 내구도를 생각하면 그보다 뛰어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검이 전시된 곳을 둘러보던 호진은 검을 하나하나 들어 살피며 눈을 빛냈다.
「이스칸르의 단검」
「종류: 단검」
「정보: 검의 소유자가 검이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단검.」
“미쳤군.”
지금에야 라멜의 권능이라는 상위 호환격인 접근 및 회피기가 있지만, 권능을 얻지 못했다면 다른 무기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능력이다.
만약 게이트 사태 초반에 이 검을 얻을 수 있었다면 호진의 전투 메커니즘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호진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계속해 무기들을 살폈다.
모든 무기가 군침이 날 만큼 뛰어난 성능과 외관, 그리고 무엇보다 매력적인 고유능력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던 중 호진은 한 검 앞에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아니, 누구라고 하더라도 그 검 앞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벽을 밝히는 청성」
「종류: 대검」
「정보: 별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이 검은 오랜 기간 킨드문드의 달빛을 머금으며 제작되었다. 마나와 신성력의 전도가 뛰어나며 뛰어난 경도와 강도를 자랑한다.」
「속성: 냉기.」
전체적으로 청회색을 띤 검에선 은은하고 시린 푸른색이 묻어났다.
주변에는 하얀색의 결정이 흩날리는데, 아마 얼음이나 서리인 듯했다.
유리 안에 홀로 보관된 까닭도 그 때문이겠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그 검은 얼어붙은 호숫가에 떠오른 별을 연상케 했다.
호진이 검을 넋 놓고 바라보자, 노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마음에 드나?”
“아름……답습니다.”
“그렇긴 하지.”
노인은 자부심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호진처럼 뛰어난 검사에게 받는 칭찬은 노인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노인의 헛기침을 한 후, 묻지도 않은 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운철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검이다. 천 일 동안 킨드문드의 달빛만을 입히고 미스릴로 날을 덧씌웠지. 강도와 경도만큼은 어떤 검과도 비교할 수 없어.”
노인의 시선은 달빛이 내리쬐는 모루를 향해있다.
아마 그곳에서 달빛을 입힌 모양.
“튼튼해 보입니다. 마나나 신성력도 잘 견딜 것 같군요.”
호진의 말에 노인은 한층 더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알아봤군. 검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자 주술이다. 부적이나 지팡이 이상으로 마나와 신성력을 검에 담기 쉽겠지.”
호진은 노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쉽사리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호진을 보고 노인은 툭 던지듯 말했다.
“가져가게.”
“예?”
그제야 호진은 정신을 차리고 노인을 바라봤다.
아무리 무기를 하나 가져가겠다고는 했지만, 눈앞의 검은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장 제작 기간만 3년이 넘게 걸린 작품이 아닌가.
그럼에도 노인은 후회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도 그쪽만 한 검사가 내 앞에 나타날 일은 없겠지. 써준다면 검도 기뻐할 거야.”
“그건…….”
호진은 말끝을 흐리며 검을 바라봤다.
더 이상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아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검을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호진은 천천히 손을 뻗어 검을 손에 쥐었다.
손끝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전해졌다.
푸른색 빛을 한층 더 은은하게 주변에 흩뿌리는 대검은 새로운 주인을 반기는 듯했다.
호진은 검에 자신의 격을 가볍게 불어넣어 보았다.
흘러드는 물을 받아들이는 강처럼 막힘없이 흐른다.
하지만 조금도 허투루 흐르진 않았다.
호진이 찾던 검이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진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이에 노인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아까 전 호진이 관심 있게 보았던 이스칸르의 단검.
“이것도 가져가라.”
“예? 하지만 전 이미 이것을…….”
“그건 왕이 주는 것이고, 이건 내가 주는 것이다.”
호진은 망설이다가 단검을 받아들었다.
안 그래도 욕심이 났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를 지켜보던 아르바흐가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잘됐습니다. 호진 님. ‘새벽을 밝히는 청성’이라니. 설마하니 노야가 자신의 마스터피스 중 최고로 꼽는 무기를 주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주는 대로 덥석 다 받기는 했지만, 아르바흐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얻은 무기들의 값어치만 해도 울그렉 이후트를 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노인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른 일행들에게 무기들을 골라주길 시작했다.
“네놈은 이거다.”
용재에게 던져준 것은 자루가 무척이나 긴 흑색의 도끼 창.
글레이브라고도 볼 수 있는 무기였다.
“이름은 거인잡이의 도끼창이라 붙였다. 자루의 길이나 도끼날 크기를 조절할 수 있지.”
“신기하네. 여의봉 같은 건가?”
“……그게 뭐냐? 싫으면 도로 주거라.”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자 용재는 도끼를 품에 끌어안고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든 모양.
노인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도훈을 바라봤다.
“네놈은 희한하구나. 그 정도 실력이면서 주 무장이 없는 게냐.”
“……맞다.”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 상대가 사용하는 무기를 알아맞히는 노인.
노인은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몇 가지 무기를 집어 들었다.
“실패작들이다. 이름도 붙이지 않은 것들이지. 하지만 왠지 네놈은 다룰 수 있을 것 같구나.”
“…….”
도훈은 무기들을 조용히 받아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실과 장갑 그리고 단검 두 자루.
“실은 장갑으로 조작이 가능하다. 마나에 따라 형태와 위치를 바꿀 수 있지. 실은 깨진 유리처럼 예리하지만 강철보다도 몇 배나 강하니 조심히 다뤄라.”
도훈은 장갑을 낀 채, 실에 마나를 실어 움직였다.
다음 순간 실들이 살아 숨 쉬듯 움직였다.
그 모습에 노인도 예상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더 잘 다루는군. 단검은 문제도 안 되겠어. 단검들은 투척 후 주인에게 돌아오는 능력이 있다. 잘못 받으면 황천길을 가겠지만.”
노인의 말에 도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져보지도 않았지만, 잘 다룰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도 그런 도훈의 모습이 자만이 아닌, 자신감으로 여겨졌는지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다음 노인은 예은에게 한 자루의 활을 건넸다.
뱀 모양이 조각된 나무 활은 활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워 보였다.
“히드라의 독니. 그 활의 이름이다. 보아하니 아직 기를 익히지 못한 모양인데. 일반인이 기를 다루는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독뿐이다.”
“기라면 지금 배우기 시작하긴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좋지. 사실 네게 주기엔 아까운 활이다. 기를 다루게 된다면 진가를 발휘할 게다. 조금 번거로운 점이 있다면 매번 독화살과 함께 써야 한다는 거다만…….”
아무래도 독화살은 관리가 어렵다.
우선 독의 수급부터가 쉽지 않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던 호진은 문뜩 자신에게 알맞은 아이템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거라면 어떻습니까?”
호진은 아이템 두 개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검은 뱀을 잡고 얻은 ‘바실리스크의 송곳니’ 그리고 단탈렉트를 잡고 얻은 ‘아라크네의 고독 주머니’다.
어차피 얻어놓고 독 내성을 위해 자해할 때 사용한 것 외에는 영 쓸모를 찾지 못했던 물건들이다.
‘더 이상 이런 독으론 내성이 안 오르기도 하고.’
중급 내성에 오른 호진은 이 정도 독으로는 내성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그 두 개를 받아든 노인은 흥미롭다는 듯 소리를 냈다.
“호오. 상태들이 아주 좋구나. 간만에 아주 괜찮은 재료들을 받아보는군. 둘은 합친다면 분명 괜찮은 물건이 나오겠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은에게 말했다.
“그 활과 세트로 화살통을 하나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덤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예은이 입꼬리를 부르르 떠는 것을 보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기쁜 모양이다.
아마 조금만 힘을 풀어도 입가가 헤벌쭉하게 올라갈 듯했다.
예은은 고개를 돌려 재료를 제공해준 호진을 향해서도 감사를 전했다.
“감사해요. 제가 받아도 될까요. 보통 물건들이 아닌데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호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일행들의 전력 증가는, 자신의 전력이 증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오히려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일행들이 감사할 뿐이었다.
“다 됐으면 이만 나가거라. 작업을 시작해야 하니.”
노인은 이제 귀찮다는 듯 일행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건 왕인 아르바흐도 예외가 없었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순식간에 일행들을 반쯤 끌다시피 문 너머까지 끌고 온 노인이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화살통은 완성하는 대로 위로 올려보내마. 그럼.”
─드드드득
노인의 그 말을 끝으로 닫혀버린 석문.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일행들은 손에 들린 무기들을 보며 행복하게 웃을 뿐이었다.
“좋으신 분이네요.”
“괜찮은 사람이군.”
“다음에 또 뵈러 와야겠어요.”
그런 노인에 대한 평가에 아르바흐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저 괴팍한 노야를 좋은 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앞으로도 보기는 힘들 광경이군.’
어찌 됐든 왕국의 은인들에게 괜찮은 보답을 하게 된 것 같았기에.
아르바흐는 마음 한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세상의 이면에 둥지를 짓는 자의 파편」
「종류: 재료」
「정보: 고대신의 파편이다. ■■■ ■■의 ■을 ■■ 수 있다」
“또 이건가.”
보상을 열어 확인 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고대신을 죽이고 받아낸 보상이다.
그럴듯한 걸 기대했으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이템이 튀어나왔다.
이전에 샴을 죽이고 얻은 ‘말라비틀어진 손가락’, 라멜을 조우하고 얻은 ‘라멜의 허물’ 모두 고대신의 파편이라는 이름의 재료들.
전부 힘들게 얻은 보상들이지만 용도를 몰라 인벤토리에서 썩히는 중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번엔 설명이 조금 더 길었다.
그 대부분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호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새로 얻은 보상을 조심스레 집어 올려 모습을 관찰했다.
실 뭉텅이처럼 생긴 이번 파편은 누에고치를 연상케 했다.
‘뭐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곤충을 싫어하는 호진으로서는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재료라고 하니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재료라고 하면 뭔가를 만들 때 쓰인다는 말인데.
‘노인에게 보여줄 걸 그랬나?’
하지만 이걸로 뭔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고치 또한 인벤토리로 집어넣었다.
당장 사용 방법을 모르는 건 아쉽지만, 이번에 얻은 수확은 매우 컸다.
그중 가장 호진이 의미 있게 느낀 것은 하나.
‘신에게도 나의 검이 통한다는 것.’
가능성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로 증명됐다.
묵묵히 자신을 믿으며 이 길을 걸어왔지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걷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조금 남았다.’
지구와 이어지는 게이트를 모두 닫고, 이세계의 신들이 지구로 손을 뻗는 것을 멈추는 것.
그것이 호진의 일차적인 목표다.
그리고 여신과 만나게 된다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자신의 각오를 되새긴 호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던 그때였다.
“준비가 끝났다.”
어느새 다가온 도훈이 호진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