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약속과 보상 (2)
“아니, 왜 벌써……?”
호진은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온 아르바흐를 보며 놀랐다.
시종장은 아르바흐가 다른 가주들과 회의 중이라 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린다 했는데……?’
호진이 의아한 듯 묻자 아르바흐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호진 님이 부르신다면 어떤 일도 제쳐두고 와야지요! 시종장에겐 제가 따끔하게 말하겠습니다.”
아르바흐의 뒤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종장이 서 있었다.
호진은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 시종장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아르바흐에게 말했다.
“이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왕답게 행동하셔야죠.”
왕이란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우선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내심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는지라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바흐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왕이기 때문입니다.”
“예?”
호진의 반문에 아르바흐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답했다.
“지금 이 왕국 어디에도 호진 님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
호진은 아르바흐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잠시 생각하던 호진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 바룩크툼 왕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자, 왕국을 지켜낸 상징적인 존재.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전쟁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에 따라 바룩크툼 정책의 향방이 좌우된다.
그러니 호진보다 중요한 안건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아르바흐는 왕의 입장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젠 제가 배워야겠군요.”
호진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아르바흐는 이미 호진을 뛰어넘었다.
순전히 무력만으로 왕이 된 호진과는 방향성이 달랐다.
아르바흐는 여러 가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신뢰를 심어줬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설득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내 등을 쫓던 어린 왕자는 이제 없군.’
왕이란 무엇일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어린 새싹은 끝내 자신만의 길을 찾아 꽃을 피워냈다.
하지만 분명 호진의 등을 보고 쫓아오던 건 사실이기에 닮아버린 신념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과 자기희생적인 태도.
왕이라기보단 영웅에 가까운 그것은 분명 호진이 남긴 발자국이었다.
“전부 호진 님에게 배운 것인걸요.”
아르바흐는 쑥스럽다는 듯,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젠 어엿한 왕이지만 자신이 동경하던 이에게 인정받고 뿌듯해하는 모습에선 여전히 순수한 아르바흐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 모습이 호진은 퍽 기껍게 느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아르바흐는 천천히 용건을 꺼냈다.
“호진 님은 저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끝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이젠 제가 보답할 차례입니다.”
“기대되네요.”
호진은 옅게 웃으며 아르바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선 약조 드렸던 조건들은 곧장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약조했던 것은 바룩크툼 무기 수출량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제1 공방의 일정 기간 소유권, 나아가 비밀공방의 이용권이다.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부분이라 호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외에 뭐가 더 있다는 걸까.
호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아르바흐는 지금부터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또한 저희 바룩크툼은 신 아쉬나학 그리고 시리온 공국과 동맹관계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
제안을 들은 호진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고민해야 했다.
에우리우스에게 듣기로 이미 아쉬나학과 시리온은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망국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 말도 사실상 틀린 것은 없다.
고대신들에게 유린당한 영토는 재건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처참했으니까.
심지어 제국조차 에우리우스에게 대망루를 지킬 것을 당부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시리온은 제국령에서 제외됐다는 말이다.
아쉬나학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젠 시리온조차 주변국들에게 망국 취급을 받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동맹을 맺겠다는 말은…….
“시리온과 아쉬나학을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리스크가 클 겁니다.”
시리온도 아쉬나학도 아직 아무것도 갖춰진 게 없다.
복구와 생존만으로 숨이 허덕이는 이들이다.
지금 바룩크툼은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동맹이 되었을 때, 바룩크툼은 그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줘야 한다.
무기와 농기구, 의료 시스템과 장인들.
치안을 위한 군대까지.
언뜻 보면 손해만 보는 동맹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르바흐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분명 리스크는 있지만, 저는 지금의 투자가 충분히 회수 가능하다고, 아니 그 이상의 이득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 이유는 호진 님이 그곳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의문이 가득하던 호진의 표정이 한층 더 해괴해졌다.
아르바흐는 자신감에 차 말했다.
“저는 호진 님과 같이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호진 님이 펼치던 기적들을.”
그제야 호진은 조금이나마 그 말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성역인가…….’
호진이 지배 중인 땅에 한해 다른 신들이 쉽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안전지대.
분명 혼란한 이 시기에 그런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많은 땅들입니다. 특히. 시리온은 남부와 제국을 잇는 교두보로 다시 발돋움이 가능할 겁니다. 또한……!”
아르바흐는 눈을 반짝이며 그곳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토로했다.
무엇보다도 호진의 차원 이동문이 있다면, 나라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사막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다.
물론, 리스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당장 바룩크툼도 전쟁의 여파로 피해 복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재정이 넉넉지 않다는 점.
각 국가 간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당장 포탈 하나만 넘으면 다른 나라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이에 아르바흐는 양피지 하나를 꺼내 들며 호진에게 내밀었다.
“그렇기에 저희는 단순한 동맹이 아닌 연맹이 되는 겁니다.”
“연맹?”
“조금 거창하기는 하지만…… 남부 연맹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연맹이라 하면 지금도 성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왕국 연맹이 있다.
바룩크툼도 그 연맹 소속일 터.
“이미 연맹 소속이신데 그건 괜찮으십니까?”
이에 대해 묻자 아르바흐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동부 왕국 연맹에 그런 규제는 없을뿐더러, 지금 바룩크툼을 제재할 나라는 없으니까요.”
원래라면 성국의 눈치를 봐야 하겠지만, 현재 성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단절된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동부왕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나라는 바룩크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르바흐는 호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부 연맹의 맹주가 돼주시죠.”
사실상 왕국의 향방을 호진에게 건 것과 다름없다.
그 과감한 베팅에 호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기대에 부응해보겠습니다.”
호진은 아르바흐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남부 연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다음 날, 호진과 일행들은 아르바흐의 안내로 비밀공방을 향해 떠났다.
다른 공방들과는 달리 롱비어드 영지가 아닌, 카라즈 안코르 왕성 깊숙이 위치한 공방.
“와 진짜 꼭꼭도 숨겨뒀다…….”
용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자, 아르바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몇 중으로 된 잠금장치들을 넘어, 각종 장치로 이루어진 비밀 문을 지났다.
기감을 펼쳐도 찾기 어려운 복잡한 시설에, 호진조차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괜히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전설로 치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위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드워프들의 신비가 살아 숨 쉬는 곳.
왕국이 이곳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무기는 물론, 장인들의 기술 일체도 허락 없인 밖으로 유출하지 못한다.
“그래도 다 도착했습니다.”
아르바흐가 돌연 막다른 벽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자 아치 모양의 푸른 문이 생겨났다.
이전에 그쉬나학에서 봤던 고대의 주술인 듯했다.
─드드드득
바위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공식적으론 1년에 단 한 번만 열린다는 공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바룩크툼 비밀공방에.”
“…….”
호진을 따라온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때문이었다.
몸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와 붉게 피어오르는 불꽃이 화려했던 다른 공방들과는 달랐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모루 위를 내리쬐는 푸르른 한 줄기의 달빛과 가마 안에 하얀색으로 일렁이는 불꽃뿐.
공방에는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공방은 넓었지만, 그곳에 자리한 사람은 한 명.
머리가 하얗게 센 드워프 노인이 팔짱을 낀 채, 의외의 손님들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원래라면 지금은 문이 열릴 시기가 아닐 텐데.”
호진은 그의 수염을 보고 흠칫했다.
왕국 수석대장장이인 붉은 수염 에우두르의 장식이 5개였던 반면, 그의 수염에는 수십의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으니까.
‘저 노인이 이 공방의 주인이군.’
호진이 그를 바라보던 그때, 아르바흐가 노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롭게 왕위에 오른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입니다.”
“그러냐.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우르르 몰려온 거라면 이만 돌아가라.”
하지만 노인은 김이 식었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거릴 뿐이었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있는 노인에겐 왕국의 사정 따윈 관심 밖인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방해받기 싫다는 표현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아르바흐는 민망하게 수염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이분들에게 무구들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무구를?”
노인의 이마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제야 호진 일행들을 힐끔거린 그의 표정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쪽은 인간들 아니냐. 인간들을 위해 제작한 물건은 없다만.”
“필요한 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번 대 왕은 꽤나 특이한 짓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군. 뭐, 애초에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은 모두 왕실의 소유다. 의뢰든 뭐든 마음대로 해라.”
이제껏 노인이 난쟁이들만을 위한 무구를 만든 것은 왕가가 그런 의뢰만 맡겼기 때문이지,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노인은 의외로 흥미롭다는 듯, 일행들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호오.”
예은에서부터 시작된 그 시선은 점점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다가 호진에 이르러서는 화등잔만 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문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쪽 무기는 만들어주기 어렵다. 내 실력이 따라가질 못해.”
“……그게 무슨.”
그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왕국을 지탱해온 거장이다.
그런 그가 제작을 거절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
무구를 들 주인의 실력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뿐이었다.
근데 본인의 실력이 부족해 만들어주지 못하겠다니, 아르바흐는 눈앞의 야장이 자신이 아는 그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이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있는 것만이라도 보여주실 수 없습니까? 검이나 도나 뭐든 상관없습니다.”
칼의 형태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호진은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진의 신력이나 완력을 버티지 못해 금이 가거나 휘어진 것이 부지기수다.
그런 호진의 부탁에 노인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다가, 끝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민망하지만 구경이나 해보게.”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짓하며 앞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