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약속과 보상 (1)
─파삭
바람에 그을린 거미줄 하나가 으스러졌다.
쉴 새 없이 거미군단을 토해내던 둥지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새까맣게 타버린 잿더미뿐.
“다행이네.”
용재의 말에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끝났다.
거미군단은 울그렉 이후트가 죽자, 실 끊어진 인형들처럼 이성을 놓아버렸다.
그들이 지성과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그렉 이후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는 거미군단은 응집력을 잃었고, 서로 잡아먹으며 상잔을 벌였다.
그 결과 일부 살아남은 것들만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응집되지 않은 거미 괴물들 따위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이 땅을 오염시키던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불쾌하기 짝이 없던 땅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
정화작업과 거미 사냥만 끝난다면 이곳도 난쟁이들의 새로운 땅이 될 터다.
‘물론…….’
아직 난쟁이 왕국이 무사하다면 말이지만.
“돌아가자.”
원정대의 임무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왕국이 무사하길 기도하며 돌아가는 일뿐이다.
호진의 말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빠르게 이동할 수 없었다.
부상자들이 너무 많았고, 호진도 신격이 떨어져 차원문을 열 수 없었다.
그렇게 일행들은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면서 관문을 향해 돌아갔다.
“키리리리릭!”
“또인가!”
뿔뿔이 흩어졌다지만 가끔 습격해오는 거미들은 번거로운 것이었다.
예은과 도훈이 앞장서 놈들을 해치웠지만, 가끔 수십 마리 단위로 움직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럴때는 기사단과 호진 또한 나서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지! 뭔가 다가옵니다.”
경계를 서던 기사의 외침에 모두가 긴장했다.
계속해서 걷던 그들의 앞으로 뿌연 흙먼지가 보였다.
그것은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많은 수의 무언가가 이동할 때 생기는 먼지구름이었다.
어쩌면 살아남은 아라크네가 이끄는 거미 떼일지도 몰랐다.
“전원 전투 준비.”
에우리우스의 말에 기사들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던 그때였다.
─펄럭
머리 위로 검은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사람들의 고개가 직각으로 꺾였다.
그들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물론 기사들의 얼굴까지 파랗게 질리게 만드는 존재.
에우리우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입술을 짓씹으며 그 존재의 이름을 뱉어냈다.
“……고룡.”
이곳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존재의 등장에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호진이라면 막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돌아본 에우리우스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호진이 용을 향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진 공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때였다.
저 멀리 보이던 먼지구름이 천천히 실체를 드러낸 것은.
─펄럭 펄럭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달린 깃발들.
그곳엔 일찍이 보았던 여섯 가문의 문양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에우리우스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두 눈으로 난쟁이 왕국이 멸망하고도 남을 거미군단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한데 아직 저 정도의 병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에우리우스는 믿을 수 없었다.
연속된 충격에 에우리우스가 용과 군대를 번갈아 살피던 그때, 누군가 용의 목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 님! 모시러 왔습니다!”
호진을 향해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드는 난쟁이.
손에 전설의 망치를 들고 용에 올라탄 그의 모습은 전설 속 영웅, 그 자체였다.
***
왕국으로 돌아온 호진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에우리우스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동부 왕국 연합의 한 축인 바룩크툼 왕국에서 뛰어난 영웅왕이 탄생한 것을 마냥 기뻐하기도 어려울 거다.
하물며 그 영웅왕이 전설 속의 고룡을 길들였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호진에게 있어서 아르바흐의 성장과 성취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바흐는 호진의 강력한 동맹이자, 선한 신들의 세력에 속한 동료였으니까.
그리고 비단 그 기쁨은 호진만의 것은 아니었다.
“영웅왕의 탄생에 건배를!”
“아─ 후!”
청동으로 만든 잔들이 부딪치며 소리가 쨍하게 울려 퍼진다.
수도 카라즈 안코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얼어붙었던 거리에서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아르바흐가 결투를 벌였던 광장에서는 거대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주위로 음식들이 쉴 새 없이 날라졌다.
술통째로 꺼내진 술들이 잔에 한가득 퍼 올려지고 있었다.
신나는 음악과, 먹거리 그리고 춤까지.
죽은 이들의 애도는 빠르게 끝나고 축제의 밤이 찾아왔다.
아직 전후의 정비조차 채 끝나지 않았지만, 아르바흐는 빠르게 축제를 개최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축제는 아니었다.
이것은 사실 즉위식의 연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지금은 혼란한 시기다.
이런 시기이기에 더더욱 그들에겐 왕국을 책임질 하나의 왕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르바흐는 온갖 절차와 예식을 생략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아르바흐 폐하 만세!”
시민들은 곳곳에서 새로운 왕의 탄생을 부르짖으며 잔을 치켜올렸다.
찬탈자로부터 왕위를 찾아온 정당한 후계자.
결투재판에서 용살자를 쓰러트린 자.
무엇보다 고대의 고룡을 길들여 거미 괴물들의 침략을 막아낸 자.
영웅의 서사와도 같은 길을 걸어온 아르바흐를 시민들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시민들의 머릿속에서 소극적이고 어리버리하던 왕자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영웅왕 아르바흐의 활약은 이미 왕국 곳곳까지 빠르게 퍼졌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속도는 아니었다.
‘분명 사람들을 푼 거겠지.’
바룩크툼 왕실에서 사람들을 풀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서 아르바흐의 활약을 노래하고 있는 음유시인을 보라.
“찬탈자에게 쫓겨 도망친 왕자가 있었네.”
‘벌써 노래가 나오다니.’
호진도 음유시인에 대해선 잘은 모르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마도 왕실에서 준비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라.
하지만 호진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길을 잃은 왕자. 그 앞에 나타난 이는 기량이 신에 닿은 위대한 검사. 길을 밝혀주오, 명예로운 검사여.”
그 노래엔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으니까.
호진의 이야기가 노래를 타고 멀리까지 퍼지며 그의 격을 높일 것이다.
실제로 벌써 신격이 한층 성장한 게 느껴졌다.
시리온과 시칸하곤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많은 인구가 밀집된 바룩크툼 왕국에서, 호진의 이름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르바흐의 이름을 칭송하는 노래에서, 그의 조력자였던 호진은 마치 신과도 같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아르바흐를 드높이기 위해선 내가 일개 인간인 것보다야 신적인 존재인 게 좋겠지.’
호진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아르바흐의 업적을 부풀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딱히 그렇게 했어도 호진은 상관없었다.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신격화하는 방향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호진은 아르바흐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조용히 음료를 홀짝였다.
“오오, 명예로운 검사여!”
“검사여!”
─움찔
어느새 후렴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음유시인을 따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를 듣던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잔을 강하게 움켜쥐고 말았다.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칭송을 듣는 것에도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것은 또 색다른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경험상 분명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오오, 명예로운 검사여! 왜 홀로 외로이 계십니까!”
“……가라.”
“왜. 듣기 좋구만. 나도 이젠 가사 다 외웠어.”
용재가 싱글거리며 다가오자, 호진은 예상했다는 듯 팍 식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용재는 매번 두들겨 맞으면서도 호진을 놀릴 기회가 생기면 절대로 참지 않았으니까.
그냥 지금 패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던 그때 용재가 입을 열었다.
“또 강해졌던데.”
“……운이 좋았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호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이젠 용재도 호진도 알고 있다.
둘 사이에는 좁히기 어려운 차이가 존재한다.
이번에는 도움을 크게 받았지만, 앞으론 이렇게 일행들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점점 적어질 것이다.
호진이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이제 신적인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대로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
“…….”
그 말이 맞다. 이대로는 함께 할 수 없다.
‘앞으론 혼자 나아가야겠지.’
사실 지금까지 함께 움직여준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이번엔 정말 모두 죽을 뻔했고, 앞으론 이런 일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용재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더 강해져야겠다고.”
“뭐?”
호진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단순히 강해지는 것으로는 자신을 쫓아오는 게 불가능하다.
용재는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그러더라고. 예은이 누나랑 도훈 아저씨도.”
“……어떻게?”
용재는 기억을 더듬듯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예은이 누나는 에우리우스 아저씨에게 기를 배우겠대. 지금 아저씨 뒤만 따라다니는 중이야. 도훈 아저씨는 이곳 공방에서 새로운 무기들을 찾겠다나? 지금도 공방들 돌아다니며 무기들을 살피고 있을걸.”
“너는?”
“나? 나야 늘 그렇듯 몸으로 때워야지. 설마…… 나 필요 없다고 버리는 건 아니지?”
용재는 자신 있게 답하다 말고, 문득 불안해진 듯 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에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못하면 버리고 가야지.”
“……농담이지?”
호진은 농담조로 말하며 몸을 돌렸다.
이에 용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되물으며 따라왔지만, 호진은 연신 웃을 뿐이었다.
일행들의 유대는 이제 쉽게 풀어질 만한 게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조차 그들에겐 성장의 동기일 뿐이다.
그 사실이 호진에겐 왠지 따듯한 위안이 됐다.
‘그럼 이제 걱정거리도 하나 덜었으니…… 일을 시작해볼까.’
축제의 밤은 짧다.
호진은 그동안 밀어뒀던 보상들을 위해, 이 축제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
“금방 오실 겁니다.”
호진을 안내한 시종장은 호진을 향해 깊숙이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호진은 아르바흐의 집무실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왕은 왕이군.’
아무 때나 부르면 볼 수 있던 예전과는 다르다.
당연한 사실이다.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호진은 홀로 남자 기다렸다는 듯 상태창을 확인할 뿐이었다.
레벨이 무려 6이나 올라 65가 됐다.
스탯도 이번에 받은 것을 전부 쓰다면 근력과 민첩이 90에 다다른다.
이 정도의 스탯 투자는 오랜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킬은…….’
가장 유의미한 것은 당연 심검의 획득이다.
원래 가지고 있었으니 획득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절 베기, 확신, 중급내성, 초감각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아무래도 조만간 심득을 사용해서 스킬들을 정리할 필요가 보였다.
이젠 쓰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상태창은 이 정도면 됐고.’
이어서 보상을 확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쾅!
“호진 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르바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며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