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울그렉 이후트 (3)
주위가 소란스럽다.
금속 마찰음과 비명, 신음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하지만 눈을 감은 호진은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내면을 향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
결코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미친 짓이다.
하지만 호진은 주변의 동료들을 믿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풀거리는 먼지처럼 점점 내면으로 침착하는 의식은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변의 소음이 점점 작아지고 적막만이 남았다.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
그곳은 호진의 심상 세계였다.
‘여긴…… 탐과 싸울 때 봤던 곳인가.’
일찍이 한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회색빛으로 텅 빈 공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뿐.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검(劍) 한 자루가 푸른빛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었다.
호진은 지체 없이 검으로 다가가 그것을 손에 쥐었다.
다음 순간, 저릿한 전능감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 퍼졌다.
자신이 베지 못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벤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쌓아 올린 신격의 근원.
‘다르지 않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야 확신했다.
호진은 이번 시련들을 통해 검에 의념을 검에 담을 수 있게 됐다.
그것을 해냈을 때 느꼈다.
이 기술은 자신의 근원과 닮아 있다고.
다만 그것에 신격을 담았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을 뿐.
신격을 이용해 베면 권능.
의념을 현실로 끄집어내 벤다면 마법이라 할 수 있었으니.
이 두 가지를 접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은 없으리라.
그야말로 마음으로 사물을 베는 경지.
호진은 비로소 자신이 지닌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의식이 심상의 세계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호진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격이 그의 눈을 따라 형형하게 흘러나왔다.
멈추기라도 한 듯 더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호진은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저 멀리 있던 울그렉 이후트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걸어온 자리엔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에우리우스는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예은과 용재 그리고 도훈은 자신을 둘러싼 채로 다가오는 괴물들을 베고 있다.
울타는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말을 뱉어내고 있다.
전부 자신 하나만을 믿고 목숨을 건 것이다.
진작 깨달았다면 이렇게까지 희생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호진은 쓰게 웃으며 자신이 쥔 검을 내려다봤다.
예전보다는 더 예리하게 벼려졌지만, 여전히 뭉툭하고 조잡했다.
자신의 심상 세계가 아직 미완성이고 쌓아 올려야 하는 격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마음속에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이 있다면, 손에 쥔 비루한 검으로도 눈앞의 적을 베는 것에 부족함은 없으리라.
호진은 처음부터 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 깨달았을 뿐이다.
격도 형도 필요 없다.
호진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검로의 선상에는 일행들도 있었지만 상관없다.
호진이 베고자 하는 것은 오직 울그렉 이후트,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호진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경지를 뭐라 불러야 할까.
‘역시 이것밖에 없지.’
호진은 입술을 작게 달싹이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심검(心劍).”
그 순간.
세계가 갈라지며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에우리우스는 그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붉은 피의 비를 맞으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쿵! 쿠궁
반으로 양단된 거체가 허무하게 허물어진다.
베어도 베어도 죽지 않던 괴물이 한순간에 쓰러진 것이다.
에우리우스는 방금 전의 상황을 천천히 곱씹었다.
‘분명…… 상황은 절망적이었거늘.’
시간을 끌어달라던 호진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울그렉 이후트는 그 틈을 노려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쏟아지는 괴물들과 마법들을 피해 가며 그녀를 저지했지만, 피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죽거나 다친 기사들의 수는 점점 늘어갔고, 자신을 비롯한 호진의 다른 일행들도 점점 지쳐갔다.
어느새 호진의 코앞까지 다가온 울그렉 이후트.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손가락을 뻗어올 때, 에우리우스는 생각했다.
이젠 끝이라고.
하지만…….
“심검(心劍).”
다음 순간 뒤에서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지만 단단하고 확고한 음성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모든 게 뒤바뀌었다.
─쏴아아아악
돌연 반으로 양분된 울그렉 이후트가 피 분수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피를 쏟아내며 무너져내렸다.
입에서 흘러나온 의문은 비명으로조차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멍하니 허물어지는 울그렉 이후트를 바라보기도 잠시, 에우리우스는 정신을 차리고 이 현상을 만들어낸 사람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뿐.
뒤돌아본 그곳엔 이젠 자신의 격을 숨길 수 없는, 아니 숨길 필요가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귀공…….”
에우리우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딱히 두려워서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세상 그 어떤 필멸자도 온전한 힘을 드러낸 신의 앞에선 몸을 떨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진은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격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격이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사용할 만큼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쉽지 않네.’
한 번의 휘두름에만 격을 담아내려 했지만, 익숙지 않은 탓에 격이 줄줄 새어버렸다.
주워 담을 수 있으면, 주워 담고 싶을 정도로 아까웠다.
‘그래도…… 해냈다.’
호진은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피워냈다.
성공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제로 해낸 것은 느낌이 달랐다.
검의 교단 성직자가 되며 얻은 스킬 중 하나인 심검.
드디어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자주 사용하기에는 격이 남아나질 않을 기술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신격을 비효율적으로 담아 휘두르거나, 의념을 담아 휘두르던 반쪽짜리 기술들에 비하면, 심검은 극도로 효율적인 기술이다.
고대신이었던 울그렉 이후트를 일섬에 베어낼 정도로.
아무리 약하더라도 상대는 신.
이젠 닿는 것이다.
자신의 검이 신들에게까지.
그 사실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릿한 고양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런 호진을 향해 울타가 다가오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아이야.]
“덕분입니다.”
호진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는 울타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전하는 감사였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아니었다면, 호진은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진심 어린 감사에 일행들은 맥이 풀린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호진은 일행들이 모두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이 흘리던 신격 탓일 터다.
같은 인간이라고 보기엔 너무 이질적인 기운이었으니까.
호진은 일행들을 걱정시켰단 사실을 깨닫고, 민망해하며 뺨을 긁적였다.
그러던 그때, 무너져 내린 울그렉 이후트의 시체 사이로 무언가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호진은 재빨리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이들도 웃음을 멈추곤 전투 태세를 갖췄다.
‘설마…… 아직도 살아있다고?’
여력은 없었다.
호진에게도, 일행들에게도.
호진은 입술을 가볍게 짓씹으며 그녀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진은 자신이 베어낸 것의 실체와 조우할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미.
하지만 그 얼굴은 인간을 빼닮았으며, 다리는 짧퉁한 것이 인간의 손가락을 닮았다.
등에는 하얗게 핀 곰팡이가 가득한 그 거미는 차마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조악해 보였다.
[아니야…….]
작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녀석.
호진과 다른 일행들은 녀석을 보며 천천히 무기를 내렸다.
그건 더 이상 자신들을 위협하던 강력한 신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얼굴을 닮은 거미일 뿐이다.
“이건……?”
호진의 물음에 울타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이것이 울그렉 이후트의 진짜 정체지.]
울타가 설명하기를, 고대신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어둠에서 태어나 스스로 격을 얻은 위대한 존재들.
그리고 스스로 격을 얻지 못해 다른 이들로부터 추앙받아 고대신의 자리에 오른 존재들.
울그렉 이후트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추한…….]
호진에게 쌓아 올린 격이 지워져 민낯이 드러난 울그렉 이후트는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괴이한 형태의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차라리 신인 상태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호진은 꿈틀거리는 울그렉 이후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더 이상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를 죽여야 모든 게 끝이 날 테니까.
길고 길었던 여정의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었다.
***
─띠링
「종말의 거미, 울그렉 이후트를 처리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심검 LV1 → 심검 LV2」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심검 LV2 → 심검 LV3」
「스킬을 한계치까지 익혔습니다.」
‘역시 심검은 더 이상 익힐 게 없나.’
호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눈앞의 상태창을 치워냈다.
이번에 얻은 심득은 일종의 기연에 가까웠다.
한동안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기술인데 우연들이 겹쳐 어느 순간, 개화하듯 깨어났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이번 여정에서 얻은 가장 큰 보상일 것이다.
‘이건 따로 수련을 할 수 있는 종류의 기술도 아니야.’
대신 호진의 내면의 근원이 더 확고해지고, 신격이 커질수록 심검의 위력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즉 호진이 강해질수록 심검의 위력도 자연스럽게 증가할 터.
호진은 시선을 돌려 일행들을 살폈다.
‘레벨과 보상은 나중에 확인해도 된다.’
지금 우선해서 살펴야 할 것은 일행들과 생존자들의 상태.
그리고 현재 상황이다.
“이쪽으로!”
“아아아악!”
“조심. 조심!”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한쪽에 모아 응급처치를 했다.
특히 용재는 자신의 기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었던 만큼, 바쁘게 뛰어다녔다.
한편으로는 사망자들의 시신 또한 조심스럽게 수습해 한쪽에 모았다.
대부분이 기사단이었던 만큼, 살아남은 기사들이 그 유해를 모으고 시체 주위를 지켰다.
그리고 예은과 도훈은 밖의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울그렉 이후트가 죽으며 통로와 시험장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사라진 공간에는 거미줄로 가득한 널찍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이곳이 여왕, 울그렉 이후트의 방일 터.
밖에 적들이 득실댄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도 이만 돌아가마.]
울타는 호진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번에 한껏 힘을 쓴 그녀는 평소보다도 후드 아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늘 감사드립니다. 울타 님.”
자신을 위해 매번 목숨을 거는 고대신을 보며 호진은 깊은 감사를 표했다.
아직도 자신을 돕는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만큼 신뢰하는 존재도 없었다.
이에 울타가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지만 평소보다 그 웃음이 씁쓸하게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같은 고대신을 죽였다.
어쩌면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를 되묻고 싶었지만, 이미 울타는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엔 이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