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울그렉 이후트 (2)
석문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 선 호진은 검을 고쳐 잡으며 먼지 너머를 응시했다.
이를 지켜보던 울타가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둥지 안에 숨어있던 녀석을 끄집어냈구나.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각오는 이미 됐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이 둥지와 시험은 녀석이 만들어낸 판이자 세계다.
녀석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끝내 녀석을 잡을 수 없다.
자신이 짜놓은 판이라면 분명 도망갈 길 하나쯤은 만들어놨을 것이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도망가 숨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기에 호진은 아직까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던 울그렉 이후트를 전장으로 끄집어냈다.
그녀가 짠 둥지를 찢고 부수는 것만이 그녀를 잡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호진은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것을 바라봤다.
여덟 개의 거대한 손으로 바닥을 딛고 선 여인.
적갈색의 붉은 머릿결과 투명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검은 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언뜻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보일 정도다.
괴이하고 끔찍한 하체와는 달리 상체는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
그러나 지그시 감은 그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은은한 분노가 감돌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여인은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반개했다.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동공이 호진을 향한다.
호진은 그 시선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냥 재밌게 놀아 줬다면 살려줬을지도 몰라.]
아쉽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거짓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호진은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각오를 한층 더 다질 수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나?”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계획을 방해받아 짜증이 날 상황에서도 그녀는 재밌다는 듯 웃었으니까.
만약 인간들에게 격을 뽑아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리고 힘을 얻어 봉인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 상황을 즐길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지금은 알 수 있다.
그녀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녀의 목적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죽음이 동반되는 시험을 강제하던 것도.
난쟁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것도 전부.
“역시 너희들의 머리는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 옛 신도들이 고대의 신들을 배척한 이유가 그것이겠지.
호진은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승부수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온 힘을 다해 부딪칠 뿐.
그리고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래간만에 재밌었는데. 이젠 그만할래.]
그녀는 다가오는 호진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창백한 손들 수백 개가 호진의 주위로 솟아올랐다.
아까 전보다도 한층 늘어난 숫자.
하지만 호진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손들이 일행들이 아니라 자신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호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간격에 들어온 손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검의 권역.
이번에 얻은 자신만의 간격 안에서, 호진이 베지 못할 것은 없었다.
호진은 다가오는 손들을 베어내면서도 그 시선만은 그녀에게 고정했다.
그녀를 눈빛으로 베어낼 것처럼 형형한 그 기세에 울그렉 이후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울그렉 이후트는 아까보다 강하게 손을 휘저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 이글거리는 불덩이들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호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쇠를 녹이고 물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고온의 불꽃.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던 공간을 붉은색의 빛이 수놓기 시작했다.
이에 호진은 휘두르던 검을 바닥에 꽂고는 허리에 찬 다른 검을 움켜쥐었다.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한 동작.
절 베기.
한 호흡에 이루어진 검격은 순식간에 검의 끝을 따라 예기를 흩뿌렸다.
이곳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후욱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한 줄기의 검기가 쏟아지던 불의 비를 지워낼 거라고는 말이다.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불티 하나 남기지 않고.
이번에는 울그렉 이후트도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였다.
이미 호진은 그 자리에 있지조차 않았으니까.
[무슨…….]
그녀가 자신의 피부에 다른 어떤 금속으로도 뚫을 수 없다는 아다만티움을 덧씌운 것은 직감에 따른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한 수가 그녀의 목숨을 살려냈다.
─카강!
그녀의 목에 붉은색 불꽃이 튀어 오르며, 미처 아다만티움을 덧씌우지 못한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 허공에 휘날렸다.
순간이동이 아니다.
그런 마력의 흐름은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눈앞의 검은색의 안개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라멜의 권능……?]
자신조차 올려다보아야 했던 고대신의 권능이 눈앞에서 펼쳐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기습에 실패한 호진은 짧게 혀를 참과 동시에 재빨리 위치를 변경했다.
이번에는 뒤쪽으로 이동한 호진은 손의 형태로 땅을 딛고 있던 그녀의 발을 잘라냈다.
─서걱
그녀는 연속된 호진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여덟 다리 중, 한 다리의 손가락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울그렉 이후트는 고통에 젖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호진을 향해 반격했다.
다른 다리에 달린 손가락들이 호진을 향해 휘둘러졌다.
호진은 아만다티움으로 강화된 날카로운 손톱을 연신 쳐내다가 라멜의 권능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기습에는 실패했지만, 피해를 입힌 것에 의의를 두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음 벌어진 광경은 호진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스르륵
잘려 나간 손가락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다.
단발로 잘려 나갔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생채기 하나 없는 그녀를 보고 호진은 어이없어하며, 옆으로 다가온 울타에게 물었다.
“저게 뭡니까?”
[말했지 않느냐. 이곳은 그녀의 세계다. 그녀는 인과율이 벗어나지 않는 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지.]
“그게 말이 됩니까?”
[신이랑 싸우는 게 쉬운 줄 알았더냐.]
“…….”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호진은 새삼스럽게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게, 늘 싸우던 괴물 따위가 아닌 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납득이 갔다.
순간 흔들리던 평정을 간신히 잡아낸 호진은 눈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에게 상처 입은 울그렉 이후트는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호진은 더 이상 재밌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
그녀의 눈에는 미미하지만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쉽네요.”
이렇게 된 이상 쉽게 이기기는 어려워졌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녀는 한눈에 봐도 뚫기 어려워 보이는 방어막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검기를 두른 검으로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이기기 위해선 보다 강력한 공격이 필요했다.
이곳 성역을 가르고 그녀의 권능조차 베어낼 강력한 일격이 말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울타님. 그리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호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울타와 달리, 다른 이들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되물었다.
“저희……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입장에선 신화나 경전에나 나올법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사단을 포함한 일행들은 감히 싸움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우리가 도움이 될까?”
용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울타가 대답했다.
[나를 보조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걱정치 말거라.]
“그렇다면 뭐.”
용재는 거리낌 없이 호진의 앞으로 나아갔다.
이는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도훈도, 예은도 망설이지 않았다.
에우리우스는 울타가 신경 쓰이는 듯 힐긋거렸으나, 결국 머리를 헝클며 앞으로 나왔다.
“귀공, 오래는 못 버틸 거다.”
“잠시면 됩니다.”
호진의 대답에 끄덕인 에우리우스는 울타를 향해 말했다.
“이름 모를 악신이여. 우리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그렇겠구나. 그대라면 그리 말할 자격이 있어.]
울타가 가볍게 수긍하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에우리우스의 실력은 고작해야 도훈과 비슷한 수준.
오히려 이전에 용재와 싸우다 죽은 데미안이 더 높은 수준이었을 테니까.
“기사들은 두 눈으로 보고 증언하라.”
에우리우스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것은 황제의 가장 믿음직한 검이자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에 맺어야 했던 언약.
제국 최고의 검사의 입에서, 그 유일한 예외의 상황이 흘러나온다.
“잊히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오래된 인류의 적을 조우했음에, 가장 고귀한 자와 맺은 언약에 따른 봉인을 이 자리에 잠시 풀어놓을지니.”
그의 검에 새겨진 문양이 푸른빛을 내며 작게 진동했다.
“나의 명예는 흐트러지지 않고, 나의 의무는 계속될 것이다.”
말을 끝마친 그에게선 호진에 버금가는 기운이 일렁인다.
그것이 여신 릴리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제국 기사들 중에서 가장 사도에 가까운 존재.
대륙 10강이라 불리는 기사가 지닌 격이었다.
“발검.”
─스릉
그의 명령에 수십의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봉인을 해제한 에우리우스의 기운을 공유하는 그의 기사단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됐다.
지금만큼은 그들이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아니…….”
용재와 도훈은 이제껏 봐왔던 것과 너무 다른 그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저 이 예상치 못한 전력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호진은 울타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전부 죽어라.]
울그렉 이후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까보다도 매섭게 쏟아지는 불덩이들.
이에 울타는 조용히 말을 읊조렸다.
지워져라 [εξάλειψη]
불의 비는 날아오던 중 싸늘하게 식어 사라졌다.
가속하라 [επιταχύνω]
그와 동시에 용재와 도훈에게는 가속과 힘을, 예은에게는 예리함을 증폭시켰다.
그 순간 그들을 향해 수많은 거미 형상의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어둠에서 샘솟듯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예은은 쉴 새 없이 시위를 당겼다.
한껏 예리해진 화살들이 괴물들의 눈을 뀄고, 용재와 도훈은 바람같이 움직이며 다가오는 적들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바위와 얼음, 그리고 불덩이는 울타가 족족 흘리거나 막아냈다.
그리고.
기사단과 에우리우스는 울그렉 이후트에게 직접 달려들어 그녀의 접근을 저지했다.
거대한 짐승을 사냥하는 들개 무리처럼.
사방으로 흩어진 기사들은 날아드는 손가락들을 부딪치거나 피해내며, 인간 형상을 한 그녀의 상체를 노렸다.
무한히 회복하는 그녀에겐 치명적인 한 번의 공격이 더 유의미할 테니까.
─캉 카가각 캉캉
쉴 새 없이 금속음이 울리며 불꽃이 튀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단장님, 부디…….”
“금방 따라가겠네.”
에우리우스와 가장 오래 함께한 기사 둘이 희생하며 내어준 기회.
그것을 이용해 에우리우스는 울그렉 이후트의 팔 한쪽을 잘라냈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순식간에 회복할 뿐이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공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손가락을 무시한 채 공격에 집중하던 기사들이 그녀의 손가락에 꿰뚫려 내장을 쏟아냈다.
“시간을 끄는 데 집중해라!”
에우리우스는 쓰러져가는 기사들을 보며 급히 명령을 변경했다.
자신을 채우던 신격이 예전 같지가 않다.
한없이 정순하던 신격도 혼탁해진 지 오래.
자신조차 신격을 꺼낼 때면, 그것이 자신이 알던 여신의 신격이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에우리우스는 투구 밖으로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오래는 버티기 힘들 듯했다.
‘서두르게나. 귀공.’
늘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검사이자, 자신이 아는 이들 중 가장 기적과 닮아있는 기사.
그 어느 때보다 그의 힘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