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울그렉 이후트 (1)
얼마나 걸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은 시야도, 소리도, 시간마저도 잡아먹는다.
호진조차 이런 공간에서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 가고 있는 걸까.
끝이 있긴 한 걸까.
끊임없는 의심이 마음을 꺾으려고 들었다.
그럴 때면 호진은 심상에서 그 의심을 베어냈다.
쓸데없는 고민과 의심은 다리를 둔하게 하고, 머리를 굳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에 대한 확신만이 이 길을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일 터.
그리고 그 확신은 끝내 결실을 거두었다.
호진의 눈앞에 그동안 찾아 헤매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했군.”
호진의 중얼거림에 울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빛이 감도는 거대한 석문.
그것은 익히 보아왔던, 다음 시험으로 나아가기 전에 보았던 석문과 같았다.
다만 그것들과 비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호진이 멈춰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를 쫓던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웬만한 아파트만큼이나 거대한 석문을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거…… 열 수나 있으려나?”
용재조차 자신 없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글쎄. 해보면 알겠지.”
울그렉 이후트는 이 세계의 창조자이지만, 인과율의 법칙들에서마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끝도 없는 길을 만드는 것.
혹은 이기지 못할 괴물을 시험으로 내놓는 것, 그리고…….
‘열리지 않는 문을 만드는 것.’
인과율을 벗어나 불가능한 것은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호진은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힘으로 열리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만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드드득
돌연 석문이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반으로 나뉘어 열린 석문에선 붉은색 빛이 쏟아져 나온다.
음침하고 끈적한 불길한 색.
호진은 그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에야 문이 열리는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뭐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호진은 그제야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전의 시험들과는 달리 석문의 열리는 방향이 다르다.
일전의 시험들에서 석문이 시험장을 향해 열렸다면, 이번에는 통로를 향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마치 반대쪽에서 누군가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진의 불길한 예상은 쉽게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스륵 스르륵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문틈으로 내민, 손톱이 검게 물든 손가락 하나.
그리고 다음 순간.
─콱 콰콱
좁은 석문의 문을 비집고 당장에라도 뛰쳐나오려는 듯, 여러 개의 손이 석문을 교차해 잡고는 밀어댔다.
‘하나, 둘…… 여덟.’
손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빛이 나오는 틈을 메운 여덟 개의 손.
문제는 그 손의 크기가 거대한 석문을 뒤덮을 정도라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사람 한 명보다 더 커다랗다.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압도당하는 감각은 호진조차 멈칫할 정도였다.
그것은 평소 겪고 알고 있던 상식과 인지를 아득히도 벗어난 것.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미지와 조우했을 때, 인간은 허무와도 같은 공포로 전율하기 마련이다.
잠시지만 호진이 굳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다른 이들이 견딜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어어……?”
“아아아아…….”
몇몇은 눈앞이 멀어버린 듯, 자신의 뜬 눈을 손으로 더듬었다.
일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을 손톱으로 긁어댔다.
정신오염이 극에 달하면 발생하는 광증과 정형행동이다.
─다닥 닥가각
문을 붙잡은 손은 금방에라도 문을 빠져나올 듯 손가락을 아등바등거렸다.
40개에 달하는 손가락은 언뜻 벌레의 다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잠시.
어둠만이 가득한 심연 속에서 창백한 손들이 일제히 솟아 올라왔다.
손들은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더니 그들 스스로 목을 조르게 만들었다.
“컥……!”
“케엑…….”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고 입에서 침을 흘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에 기사단과 일행들은 당황에 빠졌다.
다행히 기사단원들은 간신히 정신오염을 견뎌냈다.
그중 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들은 창백한 손들을 잘라내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반대로 기를 다룰 수 없는 자들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쯧.”
예은은 혀를 차며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향해 화살을 연신 쏘아냈지만 멈추는 것도 잠시뿐, 손들은 보란 듯이 화살이 박힌 채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에 예은은 활대로 근접한 팔들을 쳐내며 계속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예은은 갑자기 솟아오른 팔 하나에 발목이 붙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창백한 손을 발로 차며 떨어뜨렸으나, 한번 붙들린 순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수많은 팔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옭아맸기 때문이다.
‘이런…….’
당했다고 생각한 순간, 번뜩이는 검광과 함께 수십의 팔들이 몸부림치며 잘려 나갔다.
단칼에 손들을 잘라낸 에우리우스는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리는 팔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끔찍한 것들이로다…….”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부정으로 이루어진 존재들.
그것은 분명 작금의 세계에선 잊혀진 고대의 존재들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위협에 에우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를 지킬 순 없었다.
이미 생존자들은 손쓰기에 늦었다.
눈이 뒤집혀가는 저들을 창백한 손아귀들로부터 구해낼지라도, 광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여신을 모시는 구마사제나 성기사들이 있다면 모를까…….’
에우리우스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돌아가라 [Πήγαινε πίσω]
그 순간 맑은 목소리가 심연으로 가득 찬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음에도, 멀리까지 똑똑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닿자, 솟아났던 창백한 팔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며 자취를 감췄다.
목소리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이어서 말을 뱉어냈다.
안정하라 [ηρέμησε] 치유하라 [θεραπεύω]
또다시 목소리가 퍼져나감에, 광증에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돌아왔다.
대부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몇몇은 정신을 차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우리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이란 언령을 다루는 것.
말의 힘을 구체화하고 현상화하는 것이야말로 마법이다.
그리고 에우리우스의 눈앞에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행하는 존재가 서 있었다.
호진의 옆에 어느새 나타난, 후드를 뒤집어쓴 여인.
마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마법과는 너무나 그 형식이 달랐다.
그녀가 말을 내뱉은 즉시 세상의 이치가 뒤바뀐다.
그것은 마법이라기보다는 기적의 행사에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그녀에게선 낯설지 않은 감각이 느껴졌다.
선신의 뜻을 모시고 따르며, 이단과 배율자들을 쫓아 베어냈던 에우리우스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
그것은…….
‘고대신?’
그 존재를 깨달은 에우리우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그는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신들을 도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지…….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
본디 고대신이란 변덕스러운 존재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옆에는 호진이 서 있었다.
그리고 호진에게서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적일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귀인은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놀라게 할 생각인 걸까.
시리온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젊고 재능있는 검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여신의 은총을 두르고, 고대신의 힘을 빌리며, 자신만의 격을 휘두르는 존재.
검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형태로 가능성을 피워냈다.
에우리우스는 그런 호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
“고맙습니다. 울타.”
호진은 무구로 쓰인 황금색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강신무가 끝난 호진의 몸엔 신당을 새겨 넣은 문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되어서 다행이네.’
호진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울타를 불러냈다.
눈앞의 사태는 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에 울타는 작게 후후 웃음을 흘렸다.
[이러려고 불러낸 거 아니냐. 마음껏 이용하거라, 아이야.]
“그게 아니라…….”
[아니었느냐?]
“……아니지는 않죠.”
딱히 할 말이 없는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뺨을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번 시험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모양이네요.”
[그렇구나.]
울타는 그런 호진의 눈에 띄는 화제전환에 어울려주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호진들의 시험은 끝났다.
석문이 열린 방향.
그리고 석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손.
아마 이번 시험의 주체는 저 손의 주인일 터다.
호진의 이번 역할은 시험의 과제인 모양이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짠 세계에 충실한 신이다.
“안 그렇습니까. 울그렉 이후트.”
호진은 울타의 등장 이후 멈춰있던 손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키득.]
석문의 안쪽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답이라고 보아도 좋겠지.’
이 상황에서 웃음을 터트릴 존재는 울그렉 이후트밖에 없을 테니까.
고대신들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오랜 계획을 망친 이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이 순간에 웃음을 터트리다니.
어쩌면 인간의 시선에서 오랜 계획이란 것도 그들에겐 별것 아닌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인지를 벗어나고 오만하기에 그들이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문의 안쪽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 번쯤은 나도 해보고 싶었거든.]
고아한 울타의 목소리와는 달리, 음습하고 끈적거리는 목소리.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다.
문 너머 목소리의 주인의 시선은 호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곤 잔뜩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놀아줄 거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득한 살기가 문에서 흘러나온다.
섬짓한 감각과 익숙한 창이 호진의 앞을 가린다.
「중급 내성이 정신오염에 저항합니다.」
「일부 저항에 실패합니다.」
상태 이상까지는 아니지만 불쾌한 감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좋지 않은데.’
호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끈적한 감각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아까부터 계속 당하기만 한다.
분명 지금쯤 속이 타는 것은 녀석일 줄 알았는데.
등장과 동시에 계속해서 판을 쥐고 흔들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울그렉 이후트의 반응에 호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물론 놀아드리죠. 우선 그전에…….”
호진이 말을 끊은 순간 섬전과도 같은 번쩍임이 공간을 비추고 사라졌다.
[어……?]
울그렉 이후트가 당황한 듯 소리를 냈다.
열리다 만 석벽의 위에서부터 반대쪽 아래까지 대각으로 선이 생겨난다.
─서걱
익숙한 절삭음이 울려 퍼진다.
절삭음과 함께 대각으로 생긴 선을 따라 거대한 석문이 갈라졌다.
호진은 우르르 무너지는 석문을 보며 사납게 말을 뱉었다.
“그곳에서 기어 나와. 이 히키코모리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