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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68화 (167/241)

168화. 카라즈 안코르 공성전 (2)

구르드가 쏘아낸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아라크네를 비껴 나갔다.

그건 아라크네가 상정한 속도를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흡!”

예상치 못한 속도와 정확도에 아라크네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라기도 잠시.

“하핫!”

그녀는 즐겁다는 듯 성벽 위를 내달리며 손에 든 거대한 낫을 창처럼 휘둘렀다.

─서걱 서걱

그러자 성벽 위에 남아있던 스틸하트 정예 수십의 몸이 조각조각 났다.

마치 가위로 오린 천 조각처럼.

그 죽음에 슬퍼할 새도 없이 구르드는 재빨리 등에 도끼를 꺼내 휘둘렀다.

낫과 도끼가 부딪치며 붉은 불꽃이 튀어 오른다.

구르드의 몸이 붕 뜨며 뒤로 밀려난다.

‘……10년만 젊었어도.’

그랬다면 호각이거나 해볼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전성기를 한참이나 지나버린 몸뚱어리가 경고라도 하듯 삐걱거렸다.

팔다리는 납덩이를 단 것처럼 무겁고,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겼다.

지친 눈꺼풀과 손끝은 파르르 떨려 꼴불견이 따로 없다.

“슬프구나. 필멸자란. 고작 수십 년 만에 늙어버리는 몸뚱어리로 아등바등하는 꼴이란.”

아라크네는 냉소하며 구르드의 꼴을 비웃었다.

구르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도끼를 꼬나 쥐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뿐이었다.

“그쪽이야말로 나이가 많다는 게 자랑이라니. 슬프구먼.”

“……넌 진짜 꼭 노예로 만들어야겠다.”

아라크네는 차갑게 웃은 후 구르드를 향해 낫을 휘둘러왔다.

재차 구르드와 아라크네의 무기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고, 구르드의 도끼는 점차 아라크네에 밀려났다.

구르드는 조금씩 뒤로 밀려났고, 어느새 성문 바로 위의 성벽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끝내…….

─챙그랑

두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도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금속음을 내자 아라크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또 말해봐. 혹시 알아? 지금이라도 빌면 팔 정도는 남겨 줄지?”

“그것참…….”

구르드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소린데 말이지.”

“뭐……?”

아라크네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표정을 구겼다.

그때 그녀의 뒤로 뜨거운 불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그녀의 뒤로, 대장간에서 쓰기엔 너무나 크고 전쟁에서 쓰기엔 투박한 망치 하나가 날아들었다.

─콰직

골통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비명이 끊어지고 그녀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타오르는 시체를 넘어 나타난 난쟁이가 그녀의 머리에 박힌 망치를 뽑아 들었다.

롱비어드 가문의 가주, 오웬.

그는 구르드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젠 이 정도도 혼자 못 잡아서 도와달라 하는가. 구르드 스틸하트.”

“……지쳐서 그런 거다.”

구르드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 들었다.

당초 오웬이 도와줄 것을 상정하고 아라크네를 이곳까지 끌어왔던 만큼, 오웬의 타박에도 구르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은 아라크네와 첫수를 나눈 순간부터, 혼자서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방법은 조금 전사답지 못했지만…….

“어쨌든 잡았으니 된 거 아닌가.”

그런 구르드의 말에 오웬은 재차 혀를 차곤 말했다.

“스틸하트 전대 가주께서 그 말을 들으셨으면 오열하셨겠군.”

“뭐, 뭣?”

“되긴 뭐가 됐다는 거냐. 오히려 이제 끝이라고 봐야 할 게다.”

“……?”

오웬의 무덤덤한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구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태껏 한 번에 움직이는 법이 없던 아라크네들이 한 번에 관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정예 거미 군단까지도.

방금 아라크네의 난입으로 관문 위도 아슬아슬하다.

수가 줄어든 스틸하트 가문 정예들은 성벽 위로 올라온 거미 괴물들을 힘겹게 몰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밀려나는 건 전사들 쪽이었다.

“……그렇군.”

정말로 끝이었다.

여기서 가문의 정예들이 당한다면 1관문도 무용지물이다.

일반 전사들만으로는 1관문을 결코 지키지 못한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시간을 더 끌겠다.”

구르드는 도끼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오웬. 네가 다른 가문들을 최대한 끌고 1관문으로 물러나라.”

분명 후퇴 중에도 많은 수가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만이 유일하게 더 버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과 자신 가문의 병사들이 더 오래 시간을 끌수록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터.

구르드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영혼을 불태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구르드의 말을 듣고 있던 오웬은 돌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어?”

자신의 목숨을 건 각오다.

그것을 비웃다니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도 지켜야 할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웬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놈이 그럴 필요는 없다.”

“뭐? 그럼 네놈이 맡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여긴 네가 나설 곳이…….”

“당연히 아니지. 뭐라는 거냐.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

정신을 차리니, 이미 많은 이들이 오웬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에 소음이 하나둘 사라진다.

난쟁이들은 물론 성벽을 오르던 거미들마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설마!”

점점 커지는 그림자의 크기에 구르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기로 듣기만 했다.

그건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럴 것이다.

아니, 단 한 명.

오웬 롱비어드의 아들 이오른만이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아본 적이 있었다.

“아아, 어째서 이곳에…….”

이오른의 입에선 비명과도 같은 침음이 흘렀다.

그 모습은 일전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펄럭

성벽의 하늘을 뒤덮은 검은색의 날개.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로 몸을 뒤덮은 거체.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색의 동공.

동공을 감싼 반달 모양의 홍채는 여전히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파프니르…….”

구르드가 그 저주받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녀석의 반쯤 벌어진 입에서 붉은색의 기운이 강렬하게 일렁였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라크네들과 거미들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고대의 숨결이 눈앞에 현현했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끊임없이 퍼져나가며 성벽 밖의 거미들을 휩쓸었다.

성벽과 지상을 뒤덮은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수백, 아니 수천의 거미들이 작열하며 불꽃을 피워냈다.

코끝이 아려올 정도로 탄내가 전장에 피어오른다.

그로도 모자랐는지, 전설 속의 고룡은 비행을 하며 도망치는 거미들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도, 거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고룡과는 맞설 수도 없고, 맞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고룡은 도망치는 거미들을 매섭게 쫓았다.

그것은 유린이자 학살.

파르니르가 내뿜는 불 속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녀석들도 손톱과 이빨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아라크네 몇몇이 마법을 쏘아내거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다.

하나하나가 재해라 취급받는 아라크네들을 벌레처럼 찢어 죽인 파프니르는, 거미 군단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몰아낸 뒤에야 관문으로 돌아왔다.

난쟁이들 대부분은 거미들이 물러난 사실에 기뻐하기도 잠시, 돌아온 파프니르를 보며 공포에 질렸다.

고룡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들에게 경외감과 절망감을 선사하는 최상위 포식자.

누구 하나 저항하지 못하던 그때.

구르드가 파프니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다른 난쟁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파프니르 목 언저리에서 쑤욱 올라온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야 난쟁이들은 그 손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바흐 님?”

“아르바흐 님이다!”

아르바흐를 알아본 난쟁이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됐다.

고룡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고, 거미들만을 쫓아낸 이유를 이젠 알 수 있었으니까.

병사들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아르바흐의 이름을 연호했다.

전장의 흐름을 뒤바꾼 한 줄기의 기적.

아르바흐는 그가 그렇게 필요로 했던 기적을 끝끝내 쟁취해 돌아왔다.

이것은 오롯이 아르바흐 본인의 업적이었다.

호진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은 업적.

[잊진 않았겠지. 영웅의 후예여.]

파프니르는 자신의 목에 올라탄, 그리고 자신의 피가 섞인 난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에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받은 배신자. 그 이름은 파프니르.

자신의 형인 아울레와 종족을 배신한 그는 맹약을 어기고 동족을 학살했다.

그리고 그 죄로 오늘날까지 오래도록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려왔다.

그렇기에…….

“맹약은 지켜졌다. 파프니르. 너의 죄를 지금 사하겠다.”

파프니르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해 왔다.

“크르륵!”

아르바흐의 선언에 파프니르는 돌연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함께 몸을 비틀거렸다.

입을 타고 검은색의 연기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져갔다.

그러기도 잠시, 파프니르의 입에서 심장 근처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저주로 변해있던 그의 맹세가 다시 활성화된 것이다.

“앞으로도 왕국을 위해 봉사하라. 그것이 네가 속죄할 길이다.”

[……어쩔 수 없나.]

파프니르는 지겹다는 듯, 한탄하며 아르바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부분일 것이다.

왕국을 수호하던 영웅으로서의 책임감과 신념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맹세는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움직일 수 있겠나?”

[전혀.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한다.]

파프니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오랜 저주는 파프니르의 체력을 바닥까지 갉아먹었다.

하물며 호진에게 입은 상처로 사실 몸 상태는 엉망인 상황.

방금 거미들을 쫓기 위해 쏟아낸 게, 남아있던 힘의 전부였다.

한동안은 그 체력이 돌아오진 않을 터였다.

호진을 도우러 갈 생각이었던 아르바흐는 아쉬움에 이를 악물었다.

도우러 가기는커녕 적들이 다시 몰려온다면 막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호진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 왕국을.

나아가 이 세계를 지켜내 주시길.

***

호진은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알 수조차 없는 어둠에 잠긴 통로.

심해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저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애초에 닿으라고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다.

길은 스스로가 만들어야 했다.

울타는 그런 호진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묵묵히 그를 지켜봤다.

그러나.

“으으…….”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 겁에 질려 신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원리인지, 사방이 뚫린 이 공간은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다.

즉 지금은 허공을 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주처럼 위로도 아래로도 옆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건 끝없이 펼쳐진 심연뿐이라는 것.

광활한 공간에 내버려진 사람들은 압도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건 단 하나.

이미 들어온 입구만이 아무리 걸어도 일정 거리에서 멀어지지 않고 뒤에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는 듯이 말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연의 공포와 좌절감이 들어차던 그 순간이었다.

약하지만 분명한 빛이 시선을 잡아끈다.

사람들은 이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빛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 빛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본 빛나는 등대와 같았다.

그곳엔 어둠을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들을 구하고 인도하는 한 줄기의 빛.

그 빛에 사람들은 얼어붙은 다리를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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