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67화 (166/241)

167화. 카라즈 안코르 공성전 (1)

난쟁이들의 수도 카라즈 안코르.

활기가 넘치던 거리엔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근 왕성에서는 기이한 비명과 소음들이 퍼져 울릴 뿐이었다.

이에 미처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은 집 안에 숨어 기도를 올렸고, 왕성을 지키는 소수의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성 아래에 깊게 자리 잡은 지하.

그곳에는 봉인된 괴물들에게 맞서기 위해 세워진 최후의 보루가 있었으니, 바로 초대 난쟁이 왕 아울레가 세운 다섯 개의 관문이었다.

“지금이다! 아낌없이 쏟아내라!”

지휘관이 외치자, 펄펄 끓는 기름이 높게 솟은 성벽을 따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키리리리리릭!

성벽 외벽에 단단한 다리를 박고 올라오던 거미들은 다리를 차마 빼지도 못한 채 익어버렸다.

벽을 타고 올라오려던 거미들은 황급히 뒤로 빠지려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결국 떨어지는 시체에 부딪혀 으깨지거나, 기름이 몸에 닿아 몸부림을 치며 떨어져야 했다.

“됐…… 됐다!”

아직 수염조차 제대로 땋지 못한 젊은 난쟁이가 그 광경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 모습에 명령을 내렸던 지휘관이 인상을 찡그리며 일갈했다.

“방심하지 마라. 이 정도로 놈들이 멈출 리가 없으니까!”

“네, 넵!”

“기름이 떨어졌다. 너는 내려가서 기름을 더 올려달라고 전달…….”

─콰직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의 목이 수수깡처럼 똑 부러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쟁이 신병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눈만 굴렸다.

“키리리리릭!”

다음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섬뜩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성벽 위로 올라섰다.

기름에 반쯤 녹아내린 얼굴은 기포가 올라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검은색 거미는 고통과 분노를 터트리듯 포효하며 낫과도 같은 앞다리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이에 옆에 있던 한 난쟁이 전사가 신병을 뒤로 잡아 던지며 소리쳤다.

“도망쳐라!”

난쟁이 전사는 시간을 끌려는 듯 도끼를 들고 용맹하게 달려들었으나, 허무하게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으어어어어…….”

난쟁이 신병은 도끼를 그러쥔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른 숙련된 전사들과 달리, 이 젊은 난쟁이는 실력을 보나 각오를 보나 아직 전장에 서기엔 부족했다.

거미는 이를 보더니 기쁘게 울부짖었다.

공포에 질린 난쟁이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거미가 난쟁이 신병을 향해 앞다리를 뻗던 그 순간.

─콰직

검은색 화살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초록색 뇌수가 화살의 촉을 따라 울컥 쏟아져 내리며 거미의 몸이 허물어졌다.

신병이 덜덜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익숙한 얼굴의 난쟁이가 서 있었다.

“흑노의 구르드…….”

스틸하트가문의 가주이자 전 용 사냥꾼들의 수장.

그는 신병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신병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구르드가 이끄는 스틸하트의 정예들이 성벽을 넘은 몇몇 거미들을 순식간에 정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르드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쓰러진 거미 괴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흑철로 만든 화살로도 관통하지 못했군. 이런 녀석들을 잡병으로 쓰다니…….”

구르드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몰려드는 거미 괴물들은 심지어 강하기까지 했다.

방금 넘어온 녀석만 해도 다른 동부 국가들에선 중상위 등급의 괴물로 분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구르드는 성벽으로 다가가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는 거미들.

피로 붉게 물든 3관문에는 찢어진 가문들의 깃발만 초라하게 펄럭거릴 뿐이었다.

‘3관문도 완전히 끝났군.’

이미 그곳엔 생존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젠 이곳 2관문조차 간당간당한 상황.

방금 이곳도 그렇지만, 다른 성벽들도 거미들이 벌써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젠장, 또 오셨군.”

거미 괴물들이 가득한 성벽 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라크네.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거미의 모습을 한 저 괴물들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용만큼은 아니지만, 한 개체의 등장만으로도 영지 하나를 위협한다는 전설적인 존재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이 십여 마리가 동시에 성벽을 타고 넘으니, 아무리 숙련된 난쟁이 전사들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5관문도, 4관문도, 3관문도 모두 녀석들에게 뚫렸다.’

전략은 지극히 단순했다.

거미 괴물들을 벽에 부딪쳐 난쟁이들의 전력을 깎아 먹은 뒤, 정예로 이루어진 부대와 함께 아라크네들이 진입하는 것뿐.

그 단순한 전략에 관문은 손쉽게 괴물들의 손에 넘어갔다.

단순했지만, 그렇기에 확실하다.

상대가 기책을 쓴다면 대응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전력 차이가 너무 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마저 내어줄 순 없다. 다들 준비해라!”

구르드의 외침에 난쟁이 전사들이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 순간 성벽을 오르던 거미들이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거미들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가각!

문제는 그 속도가 앞의 성벽을 오르던 거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마치 평지를 달리듯 미친 듯이 벽을 타고 오르는 거미들을 확인한 구르드는 이를 악물기도 잠시,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장창병 앞으로! 놈들이 올라오게 두지 마라!”

“아─ 후!”

스틸하트의 정예들은 가주의 명령에 두려움을 억누르며 자세를 굳혔다.

바위처럼 굳센 그들의 태도에 다른 병사들조차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쾅! 콰광! 쾅!

괴물 놈들은 그 실낱같은 희망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벽이 거칠게 흔들렸다.

“으아아아악!”

이에 성벽 위에 있던 난쟁이 여럿이 중심을 잃고 성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높이와 두께가 일반 요새에 몇 배에 달하는 2관문이 이 정도로 흔들린다는 것은…….

구르드는 불안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미친…….”

그곳에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인 반쯤 허물어진 성문이 있었다.

아직까지 저런 수를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이제 놈들의 전력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거늘.

그때 한 무리의 거미들이 재차 성문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불길해 보이는 녹색으로 부푼 배.

놈들의 턱은 이상할 정도로 작았고 앞다리도 볼품없었지만, 배 부분만은 괴상하게 부풀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 사태를 만들어낸 녀석들이 분명했다.

“오웬! 놈들을 막아라!”

구르드의 외침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성병들을 지휘하던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쏴라.”

오웬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자 공성병들이 발리스타를 쏘아냈고, 곧이어 사람의 몸보다 긴 철창이 날아가 놈들의 몸을 꿰뚫었다.

놈들이 주춤한 사이, 이번엔 화포가 불을 뿜었다.

하늘에서 둥근 포탄이 회전하며 유탄들을 쏟아냈다.

거미 괴물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유탄을 맞고 몸의 이곳저곳이 으깨졌다.

‘겨우 막아냈나.’

구르드가 안심하던 그때였다.

거미 진영 사이에서 거대한 덩치의 거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거미 괴물의 10배는 가볍게 넘는 녀석은 온몸에 강철과도 같은 칠흑색 갑주를 둘렀다.

코끼리의 상아보다도 거대하고 날카로운 턱을 보자 구르드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오웬을 봤으나, 눈이 마주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이 성문에 도착할 때까지 장전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의미였다.

‘……뚫렸군.’

성문이 뚫린다면 2관문이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든 관문들 중 가장 최단기간에 뚫려버린 셈이다.

아라크네들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전사들은 1관문으로! 스틸하트의 전사들은 위치를 고수하라!”

최대한 전력을 보존한 채 1관문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구르드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병사들에게 혹독한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다른 가주들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성문 앞으로!”

쿠라그 쉴드락은 5관문에서부터 싸우며 지친 몸을 이끌고 성문 앞에 섰다.

수비에 한해서는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그의 바위 방패병들은 이제 원래의 모습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수가 줄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정예병들은 묵묵히 가주를 따라 반쯤 무너져가는 성문 앞에 섰다.

보병들이 후퇴할 수 있게 돕던 그레이고트의 산양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반 아래로 줄어버린 기사들.

그마저도 산양들은 지쳐 혀를 길게 빼어 물 뿐, 제힘을 내기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정예병인 그들이 먼저 도망친다면 일반 전사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일반 전사들은 성벽을 끼고 싸워야 그나마 적들과 상대할 수 있다.

반면 가문의 정예들은 다르다.

“찔러!”

─콰직 콰지직

어느새 거미들이 성벽의 꼭대기까지 타고 올랐다.

녀석들을 맞이한 것은 조금의 물러남도 없는 강인한 기세의 장창병들.

흔들림 없는 창끝으로 거미들이 휘두르는 강철 낫과도 같은 앞다리를 피해 몸체를 꿰뚫었다.

최소 6년 이상 찌르기 수련만을 반복한다는 스틸하트 가문의 정예들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쾅!

성문이 부서지고 집채만 한 크기의 거미가 성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을 향해 빗줄기와 같은 창들이 날아들었다.

그레이고트의 기사들과 용 사냥꾼들이 동시에 던진 투창.

화살로는 뚫을 수 없는 놈의 갑옷들이 부서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괴물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그 시체를 넘어 거미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이번에는 쉴드락 가문의 바위 방패병들이 거대한 방패를 들어 벽을 만들었다.

놈들은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뒤에서 미는 아군과 앞에서 휘두르는 둔기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언뜻 보면 난쟁이들이 굉장히 선방하는 듯 보였다.

난쟁이 하나가 죽어갈 때, 거미 괴물들은 수십이 죽어 나갔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문제는…….

‘끝이 없어.’

구르드는 떨리는 손으로 쇠뇌의 줄을 당겼다.

벌써 수백 발은 쏜 듯했다.

처음엔 깃털같이 가벼웠던 쇠뇌의 줄이 이제는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수를 줄여도 성을 넘보는 녀석들의 수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아라크……!”

스틸하트 가문의 전사가 비명과도 같이 내지른 소리가 끝을 맺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그의 부서진 투구와 함께.

구르드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것은 이미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온 절망은 구르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녀는 손에 든 기다란 낫에 묻은 난쟁이의 피를 털고는 손을 흔들었다.

구르드는 재빨리 쇠뇌를 들어 그녀에게 겨눌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습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게 누군지는 아니?”

“어려울 것도 없지. 괴물 아니신가?”

구르드의 대답에 그녀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제법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구르드는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하반신의 끔찍한 거미의 모습이 아름다운 상반신과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위화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괴물이라고……. 네 선조들이 나를 신으로 모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모를 이야기는 그쯤 하지. 퇴물.”

구르드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는 오히려 한층 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강단 있는 모습은 좋아. 너는 특별히 팔다리만 잘라서 노예로 만들어줄게.”

“……퍽이나 영광이군.”

구르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몸을 굴리며 쇠뇌를 쏘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