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거미줄 위에서 춤을 (2)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에 참가했습니다.」
「시험을 재시작합니다.」
“어……?”
눈앞에 상태창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돌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호진은 몸이 굳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강제력.
마치 격류에 휘말린 것 같다.
스스로 격을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이 정도의 무력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무리 힘껏 손발을 내저어도 의식은 점점 어두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의식과 함께 시야도 완전한 암전된 어느 순간.
─화악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정신이 깨어났다.
“으앗!”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옆에서 비명과 숨을 거칠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재와 도훈이었다.
그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긴……?”
호진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담요와 먹을 것 조금이 놓인 작은 방은 굉장히 눈에 익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이군.”
도훈이 인상을 쓰며 벽을 더듬었다.
“상태창이 말한 대로네요.”
이곳은 시험의 시작점이자 대기실.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에 참가했다더니, 아예 시험을 재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잠깐, 내 도끼 어딨어?”
정신을 조금 차린 용재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무슨 일인…….”
용재를 돌아보던 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늘 허리에 패용하고 다니던 검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아까부터 몸이 이상했다.
몸이 무겁고 시야가 좁다.
상태 이상이라도 걸린 걸까.
하지만 무거우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몸 상태에 호진은 기시감을 느꼈다.
“……거짓말이지?”
호진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1년이 지났다지만 원래의 몸 상태를 까먹기에는 1년은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전부 사라졌다고……?”
몸에서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스템으로 얻은 스탯과 스킬은 물론, 계약의 보상으로 얻은 권능도 사라졌다.
심지어 스스로가 쌓아 올린 신격마저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지만 현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용재와 도훈도 금세 자신들의 상태를 깨달았다.
무기도 힘도 모조리 사라졌다.
지금의 그들은 게이트가 열린 그날 이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 있었다.
“이 미친놈들이.”
호진은 그저 허탈하게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대기실.
세 사람은 등에 벽을 기댄 채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이대로 기다리면 밖에서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용재는 현실을 도피하며 낙관했고, 도훈은 침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상태로 아까와 같은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아니지.’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것도 중요하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힘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사실이 호진과 두 사람의 의지를 꺾고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미치지 않은 게 용하군.’
호진은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헝클었다.
그때 문뜩 자신의 팔에 새겨진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시리온에서 굴라와 싸우다 생겨난 흉터였다.
손에 꼽힐 정도로 목숨이 위험했던 당시가 머리를 스친다.
호진은 천천히 웃옷을 당겨 몸에 난 상처들을 살폈다.
샴과 싸우다 생긴 상처, 개미나 고블린 챔피언과 생긴 상처도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남아있는 게 있네.”
쌓아 올린 힘은 빼앗겼지만, 지난 1년 동안 호진이 무수한 적들과 싸우고 역경을 극복했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앉아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까 봐.’
호진은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대기실 한편에 세워져 있던 나무 막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있는 줄도 몰랐던 막대기.
하지만 그것은 호진이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일어나.”
호진이 움직이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 등을 쫓았다.
용재는 엉거주춤 일어서면서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형, 이 앞에 개미는 그렇다고 쳐도. 그 뒤는…….”
알고 있다.
첫 번째 시험이면 몰라도 그 뒤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무슨 일이 있어도 다섯 번째 시험에 있는 샴의 세 번째 머리는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그땐 그때고. 우선 움직이자.”
이대로는 끝도 없이 침전할 것이다.
그렇게 가라앉다 보면 돌아오기가 너무나 어렵다.
호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희망을 포기하고 그런 삶을 살아봤으니까.
호진의 목소리에 깃든 확신과 자신감에, 용재와 도훈은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내 용재가 웃음을 터트리며 기운을 되찾았다.
“그래. 이러고 주저앉는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
“맞는 말이다.”
도훈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이 그런 그들을 옅게 웃으며 바라보고는 천천히 나무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푸드득
익숙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하얀색 형체가 호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카루스!”
호진을 못 들어가게 말리던 이카루스.
녀석은 함께 들어오지 못했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그것도 궁금했지만, 그전에 호진은 이카루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해. 이카루스. 아까 전에 말리려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단순히 함정 따위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울그렉 이후트는 신 그 자체였다.
호진의 팔에 내려앉은 이카루스는 호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이야.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게냐.”
한숨이 섞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진은 멍하니 되물었다.
“……울타 님?”
“나와 이야기할 때마다 묻는구나. 이젠 슬슬 익숙해지거라.”
“아, 알겠습니다.”
호진은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용재가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 쳤다.
“이카루스가…… 말했어?”
“……그 녀석, 앵무새였나?”
도훈조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상황.
호진은 우선 일행들을 무시하기로 하고, 울타와 이야기했다.
“울타 님. 설명해 주십시오.”
울그렉 이후트는 누구이며 이곳은 무엇인지.
자신의 힘은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울타는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호진이 질문을 쏟아내자 울타는 재차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럴 때 보면 네가 아직 인간이기는 하구나, 아이야.”
“……죄송합니다.”
“괜찮다. 당황할 만도 하겠지. 그간 쌓아온 게 모두 무로 돌아갔으니.”
울타는 고생했다는 듯 날개를 펼쳐 호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에 용재와 도훈은 한층 더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호진은 뭔가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하자꾸나. 다행히 에코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길단다.”
“다행이군요.”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조언이 있다면 이 난관에도 길이 보일지 몰랐다.
“우선 울그렉 이후트에 대해 말해주자면, 그녀는 분명 고대신이라 보는 게 맞다.”
‘……역시인가.’
처음엔 그녀의 사도라 불리는 단탈리온과 싸우며 그녀가 고대신은 아닐 거라 예상했다.
한데, 이곳에 오고는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그녀의 신격은 지금껏 봤던 어떤 신보다도 강력했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울타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만, 격 자체는 한없이 미약하단다. 제대로 된 사도도 없을 정도로.”
“그럴 리가요. 그런 녀석이 이런 짓이 가능할 리가…….”
“있지. 이곳이 그녀의 신역(神域)이라면.”
울타는 호진의 말을 끊으며 확언했다.
신역.
그것은 분명 신들이 거처하는 신들의 공간.
“신들은 자신의 신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단다. 시칸에 머무르는 라멜이 그랬던 것처럼.”
신체가 머무르는 그곳은 신 고유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곳에 다른 신들의 권능을 억제하고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게 가능하다.
마치 호진의 성역처럼.
“게다가 울그렉 이후트는 거미줄을 짜듯 자신만의 세계를 짤 수 있단다. 그것이 그녀의 권능이자 능력. 이 공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지.”
“그랬군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치에 맞지 않던 그녀의 강력한 힘이 납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신역을 시험장으로 꾸며놓은 이유가 뭡니까.”
대기실의 존재.
여섯 단계의 시험.
울타의 말만으론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호진은 정확한 답변을 듣고 싶었다.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챈 울타는 처음으로 꺼리듯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
호진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이에 옆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재가 이야기에 껴들었다.
“그 이유가 뭔데요?”
울타는 호진을 바라봤다.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울타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시련의 던전’이라고 부르더구나.”
“……사람들이요?”
“그녀는 이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했단다. 정확히는 지구의 사람들을 말이지.”
“초대요? 아니, 그게 무슨.”
“세계가 이어지며 발생한 균열. 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지. 게이트의 주인은 사람들을 초대할 권리가 있단다. 예전에 내가 주연이라는 아이를 신역에 불러들인 적이 있는 것처럼.”
“왜 그런 짓을……?”
용재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무엇이 초대란 말인가.
일반인들이 이런 곳에 불려온다면 열이면 아홉이 죽을 것이다.
그런 용재의 물음에 울타는 씁쓸하게 답했다.
“여흥이자 신격의 획득이다.”
이 신역에 불려온 사람들은 돌아가기 위해서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또는 희망을 찾아 기도한다.
이곳의 주인에게 말이다.
다음 시련은 쉬운 걸로. 보상은 더 좋은 걸로.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살기를 바라며.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고 싶어서.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즉 이곳은 신격을 뽑아내기 위한 양식장이라 볼 수 있지.”
“…….”
호진을 포함한 다른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호진이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자신을 힘을 어찌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놈을 죽일 수 있는 겁니까.”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분노에 호진의 목소리가 사납게 갈라졌다.
이전 시험에서 보았던 운동화 하나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보아 체구가 상당히 작았을 것이다.
어쩌면 시험자는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까마득한 높이에 두려움에 떨면서 힘겹게 시험의 끝까지 도달한 시험자.
바로 코앞의 목적지를 눈에 두고 발을 헛디딘 그 모습이 그리듯 눈에 보였다.
허망함, 두려움, 공포, 그리움.
시험자의 마지막은 끔찍했을 것이 분명했다.
“알려주마.”
울타는 그 분노에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너라. 그녀에게 가는 길을 안내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