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원정대 (1)
성도 카르즈 안코르.
고대의 악신 울그렉 이후트가 봉인된 곳이자, 아울레가 잠든 고귀한 땅.
그곳에 위치한 왕성에는 지하로 향하는 숨겨진 입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통로를 따라 걷던 아르바흐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삼촌을 피해 도망쳐 나온 곳이자, 아버지가 출전하여 돌아오지 못한 길이었다.
그 길을 걷고 있자니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회한, 슬픔, 안도.
하지만 아르바흐는 이내 그 감정들을 가슴 깊이 묻어 버렸다.
그러곤 목표를 곱씹었다.
그에겐 지금 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이곳을 지켜내야 한다.’
흘러넘치는 악의가 지상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다시 돌아왔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아르바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그가 이곳에 돌아오게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구르드와 호진, 그리고 그를 믿고 따라준 수많은 사람들.
그중 한 명이라도 부족했다면 결코 이 순간에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
아르바흐는 굳게 다짐하며 길을 걸어 나갔고 그 끝에 도달했다.
두꺼운 철문이 육중한 금속음을 내며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다섯 번째 관문이 열렸다.
이로써 마지막이다.
이제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은 끝도 없는 악의뿐.
아르바흐는 고개를 돌려 호진을 바라봤다.
반쯤은 억지로 맺은 약속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르바흐는 미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
그 침묵의 의미를 잘 알기에, 호진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하지만 호진 님과 여러분만 이렇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겁니다.”
호진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만약 호진과 일행들이 실패한다면 왕국은 끝이다.
“이미 적들이 이곳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
울그렉 이후트는 울그바흐의 죽음 직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은폐해왔던 속내를 드러냈다.
왕국 지하에 봉인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울그렉 이후트.
지하 둥지에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군세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거미 괴물 군단을 상대로 세울 수 있는 계획은 많지 않았다.
호진이라면 그들을 오래도록 막아낼 수 있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결국 호진들이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거미들의 신이자, 어머니인 울그렉 이후트를 잡는 것.
울그렉 이후트만 잡으면 놈들을 와해시킬 수 있었다.
“저희가 그녀를 잡아내는 동안 여러분은 왕국을 지키는 겁니다.”
호진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울그렉 이후트를 잡는 동안 카라즈 안코르의 왕성에서는 거미 괴물들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아르바흐와 난쟁이들의 몫이 될 터였다.
오직 차이가 있다면 누구와 싸우냐의 차이일 뿐.
그들도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
호진은 자신이 더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 말에 아르바흐는 떨궜던 고개를 들고는 힘차게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금방 해치우고 오겠습니다.”
호진은 아르바흐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이젠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르바흐는 떠나가는 호진과 일행들을 향해 일일이 고개를 숙였다.
분명 자신의 일도 아니건만, 목숨을 걸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도저히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래, 저런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책 속에 있었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들의 이야기.
그들의 뒷모습은 오래된 신화 속 영웅을 닮아있다.
아르바흐는 어쩌면 자신의 삼촌 울그바흐가 기다렸던 영웅들이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허.”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하의 모습에 기가 찰 뿐이다.
암적색으로 물든 하늘은 아무리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게 높다.
보이지 않는 달만이 진짜 하늘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이 세계의 밤에는 늘 두 개의 달이 지상을 비췄으니까.
하늘은 그나마 나았다.
땅은 한층 더 기괴했으니까.
끝이 안 보이도록 광활하게 펼쳐진 지하 공간.
살점이 녹아내려 늘어붙은 형상을 한 땅은 디딜 때마다 불쾌했다.
군데군데 자라난 말라비틀어진 식물들은 마른 뿌리가 거꾸로 솟아난 모양새다.
“단언컨대 이 세계에서 봤던 어떤 곳보다 이곳이 최악이야.”
용재는 눈살을 구기며 발을 디뎠다.
물컹한 바닥에서 진물 비슷한 것이 주륵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구역질이 치민다.
피부를 익힐 듯 내리쬐던 시칸 사막의 햇살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예은과 도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라도 탔으면 조금 나았으련만.
이 땅에 말들은 들어오지 못했고, 혹여 들어오더라도 광증을 일으킨다고 했다.
“분명 사람에게도 오래 있어서 좋은 곳은 아닐 걸세.”
에우리우스는 일행들의 후미를 따라오며 말했다.
군마는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말들이 들어서기를 겁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호진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중급 내성이 정신오염에 저항합니다.」
‘땅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 정신오염이 진행된다.’
다른 이들이 느끼고 있는 스트레스가 단순한 불쾌감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일행들의 상태가 나빠질 터.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호진은 약간 속도를 높이고는 에우리우스를 향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스승님은 왜 따라오신 겁니까?”
그에겐 황제에게 받은 임무가 있다.
릴리온 성국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리 적극적으로 바룩크툼의 일을 도와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에 에우리우스는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저번에 귀공이 말하지 않았나. 지금은 빛과 선신의 자식들이 뭉쳐야 할 때라고.”
한 사람의 손이 아쉬울 때다.
에우리우스와 그 기사단이 손을 빌려준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호진은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네, 귀공에게는 빚도 있으니.”
“…….”
에우리우스가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왠지 그 웃음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호진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대망루에 남은 기사들의 죽음.
기사단은 그들의 마지막을 그저 묵묵히 전해 들을 뿐이었다.
용재의 이야기가 끝나고, 에우리우스는 쓰게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술이라도 한잔 뿌려야겠군.’
작게 중얼거린 에우리우스와 기사단은 동료들의 죽음을 전해준 호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 원정에 참가한 것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원정.
그럼에도 에우리우스와 그 휘하의 기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걸었다.
‘대단하네.’
동료의 죽음이 처음도 아닐 테고, 마지막은 더더욱 아닐 거다.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굳세고 빛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이렇게까지 신의를 다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고대신 때문이겠지.’
그것이 제국의 기사단인 그들이 황제의 명보다도 이 일을 우선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제국은 강대하고 오래된 만큼 고대신에 대해 잘 알았고, 그만큼 경계심 또한 클 테니까.
호진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미세한 땅울림은 점점 그 소리를 키워갔다.
호진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그 이상을 눈치채고 하나둘 걸음을 멈췄다.
“이카루스.”
“호오.”
호진의 부름에 이카루스가 사람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
일행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언덕진 비탈 아래.
그곳에서 검은색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끼이이이이이익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미들부터 집채만 한 크기의 괴물들까지.
온갖 거미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군세를 이루어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에우리우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호진들은 목적지인 울그렉 이후트의 둥지까지 반도 못 간 상황이다.
반면 녀석들은 왕성까지 금방일 터.
“……더 빠르게 이동하겠습니다.”
이미 거의 한계에 가까울 정도로 속도를 높이고 있었지만, 호진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왕성의 지하, 그곳엔 지상의 왕성보다도 높고 단단한 성채가 존재했다.
고대의 악신을 억제하기 위한 감시탑이자 최후의 보루.
오래도록 제 할 일을 하지 못한 그 성채가 오늘에 이르러 그 역할을 다하게 됐다.
하나, 그 사실에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성채를 새웠던 아울레가 돌아온다고 하여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결국 때가 왔다’고.
아르바흐는 쓰게 웃으며 성벽 위에 섰다.
아직 보이진 않지만 보고에 따르면 고작 한나절 뒤면 적들이 이곳에 도착한다.
‘막아낼 수 있을까?’
여섯 가문을 비롯해 기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가장 단단한 방벽에서 왕국에서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들로 적들을 맞이하게 된 거다.
심지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비수까지 쏘아 보낸 상황.
아르바흐는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정도로.
그러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구나.”
어느새 곁에 다가온 구르드 스틸하트가 입을 열었다.
그 뒤로는 여섯 가주가 모두 모여 있다.
“회의는 끝나신 겁니까?”
“각 가문별로 성벽에 구획을 맡아 담당하기로 했다.”
가장 격렬한 전선에는 쿠라그 가문과 울그바흐의 편을 들었던 두 가문이 앞장서기로 했다.
큰 희생이 강요되겠지만 반대 의견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그 누구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세 가문이 앞장선 것은 전쟁 이후에도 그들이 당당히 여섯 가문이라 불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난쟁이들은 철을 두드리고 돌을 깎는 종족이다.
철처럼 담금질된 영혼은 어떤 역경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그런 난쟁이들을 대표하여 종족의 기로를 결정하는 전장에 선다는 것은 분명 영광된 일이었다.
아르바흐가 휘하의 군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였다.
“가거라.”
“……?”
구르드의 뜬금없는 말에 다른 가주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쟁이 코앞이다.
이 중요한 국면에 왕자가 어딜 간다는 말인가?
아직 계승식을 치르지 못했지만, 이 수비전과 연합의 중심은 분명 아르바흐였다.
그럼에도 구르드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아르바흐, 네가 더 잘 알 테지.”
“……하지만.”
아르바흐는 망설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구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을 굳혀라. 그리고 결정했다면 움직일 차례다.”
“…….”
아르바흐는 침묵했다.
그도 사실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적의 군세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은 기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아르바흐의 눈에 굳은 결의가 피어올랐다.
“제가 자리를 비워야만 할 것 같습니다.”
“…….”
가주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오직 구르드와 오웬 정도만이 덤덤한 표정을 지어낼 뿐이었다.
아르바흐는 그런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이곳을 여러분이 맡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은 물론이고 왕자도 왕국의 귀족들에게 이렇게 허리를 굽히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가주들의 당혹스러움은 배가 됐다.
그때였다.
쉴드락의 가주 쿠라그가 앞으로 나섰다.
“왕자님은 배신자였던 저를 다시 믿어주셨습니다. 왕자님의 의도가 무엇이든, 저는 따를 것입니다.”
머리를 숙인 왕자의 앞에, 쿠라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울그바흐의 편에 섰던 그레이고트와 실버핸드 가주는 당황했지만, 이내 천천히 몸을 낮췄다.
구르드와 오웬은 처음부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브론즈비어의 젊은 가주, 토그림은 끝까지 망설였지만 끝내 고개를 주억였다.
이에 아르바흐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기적을 찾아와야만 한다.
너무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