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결투재판 (3)
“허무하네요.”
아르바흐는 고개를 돌려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용이 되다만 짐승의 형상.
결투 재판을 진행하던 사제가 그 시체를 꼼꼼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턱의 위쪽이 아예 터져나간 짐승의 머리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
아르바흐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복수를 하고자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으나.
내심 복수하는 순간을 셀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삼촌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목숨을 빌며 바닥을 기는 순간을.
물론 언제나 위엄이 넘치던 삼촌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눈으로 직접 보면 어떨까 기대했었는데…….
“복수란 원래 완벽하지 못한 법이다. 뭐, 사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구르드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울그바흐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 사냥을 함께 했던 옛 동료다.
선왕이나 아르바흐에겐 미안하지만, 그 죽음에 약간의 연민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젊은 날 생사고락을 함께한 추억은 쉬이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큼큼.”
그 순간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울그바흐의 편에 섰던 실버핸드의 가주였다.
아르바흐와 눈이 마주친 그가 활짝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훌륭하십니다, 왕자님! 이 고드릭 실버핸드. 왕자님의 모습에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하, 감복까지?”
그 노골적인 태도 변화에 구르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에 실버핸드 가주는 움찔하며 아르바흐의 눈치를 살폈다.
“애당초 저 찬탈자가 금기에 손을 댔을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알았다면 저희 가문은 처음부터 왕자님을 지지하였을 겁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드릭 경.”
아르바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실버핸드 가주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났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실버핸드 가주는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변에 들리도록 소리쳤다.
“저희 가문은 오늘부로 왕자님의 승계를 지지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르바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실버핸드 가주.
누구보다 자신을 경멸하던 가주의 변화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왕국에 필요한 것은 숙청이 아닌, 화합이었다.
애초에 내란을 막고 국력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아르바흐가 분노를 삼키던 그 순간.
울그바흐의 시체를 살피던 사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실버핸드 가주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아르바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땠습니까?”
“역시나 금기를 어겼더군요. 용살자 울그바흐는 용의 심장을 취한 게 분명합니다.”
사제의 확언이 떨어졌다.
이미 예상했던 것이지만 그 말에 양 진영의 희비가 명확하게 갈렸다.
“설마 그럴 리가…….”
“거짓을 입에 담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레이고트 가문의 가주와 쉴드락의 가주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반대로, 아르바흐를 지지한 가문들은 기쁨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대부분이 울그바흐의 승리를 점쳤던 만큼 그 기쁨과 충격은 배가 되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사제는 덤덤히 자신이 할 말을 이어 할 뿐이었다.
“그리고 용의 기운 말고도 이질적인 존재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품에 이것이 들어있더군요.”
사제는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양피지를 받아든 아르바흐는 살짝 표정을 구겼다.
이거였다.
울그바흐가 용으로 변하기 전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가.
그 낱장의 종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불쾌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이건…….”
“악신의 흔적일 겁니다. 이런 기운을 지닌 자들이 또 있을 리가 없죠.”
사제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는 양피지를 아르바흐에게 건네며 성호를 그었다.
양피지를 집어 든 아르바흐는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저벅 저벅
누군가 뒤로 다가오는 소리에 아르바흐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번 재판의 숨은 조력자가 서 있었다.
“호진 님!”
빛이 내달리는 것 같았던 참격.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저 가까이 있었기에 용의 화염이 갈라지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
만약 호진이 아니었다면, 아르바흐는 끝내 울그바흐를 쓰러트리지 못했으리라.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르바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진을 보며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물러서지 않고 맡은 바를 다했기에, 그는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호진 역시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곤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다 끝났고말고.”
아르바흐 대신 대답한 구르드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결투재판에서 이긴 것으로 모자라, 울그바흐의 변절을 증명해냈다.
이제 아르바흐의 말에 자연스럽게 무게가 쏠릴 것이다.
강대한 위협에 맞서 왕국은 하나가 될 것이고, 그 중심에 설 인물은 아르바흐밖에 없었다.
“다들 잘 따라주면 좋을 텐데요.”
고개를 돌린 아르바흐는 이쪽을 바라보던 그레이고트 가주와 쉴드락 가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실버핸드 가주처럼 달려와 아부를 떨진 않았지만, 그들은 승복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오히려 쉽사리 진영을 갈아탄 실버핸드 가주보단 신뢰할 만했다.
‘쿠라그 쉴드락…….’
아르바흐는 자신을 배신한 영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일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그를 지지한 이들의 목숨마저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 패배한 권력에 미친 왕자로 오명을 남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바흐는 쿠라그의 배신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씁쓸함이 입안에 감돌 뿐이었다.
‘쿠라그가 바랐던 것은 분명 왕국의 안위였을 테니까.’
그렇기에 아르바흐는 그에게 증명했다.
자신의 핏줄과 자질을 말이다.
결투재판을 본 그 누구도 아르바흐가 왕위를 되찾는 것에 의문을 품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쿠라그 역시 마찬가지.
자책과 감사 그리고 신뢰.
아르바흐는 자신을 바라보는 쿠라그의 눈빛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아르바흐의 명령이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을 기세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래야겠지.’
아르바흐의 눈에는 단호함이 깃들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쿠라그를 비롯한 울그바흐 진영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도 최전선에서.
앞으로의 왕국을 위해서라도, 배신자들을 쉽게 용서해선 안 되니까.
그러기도 잠시.
옆에 서 있던 호진이 아르바흐가 들고 있는 양피지에 관해 물어왔다.
“그건?”
“울그바흐의 품 안에 있던 것입니다.”
“음…….”
호진은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기도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아르바흐는 그것이 양피지가 지닌 불쾌한 기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아, 이리 주십시오. 아마 악신의 성유물 같은 게 분명합니다.”
“같은 게 아니라 성유물이 맞습니다.”
“네?”
아르바흐가 의아한 시선으로 묻자, 호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익숙한 기운이네요.”
양피지가 뿜어내는 불쾌한 기운.
그것은 김포에서, 시리온에서 줄곧 느꼈던 기운과 정확히 일치했다.
무엇보다 호진의 시선엔 이 양피지가 누구의 물건인지 보였다.
「이름 없는 책의 낱장」
「종류: 아티팩트」
「정보: 불사의 신의 성유물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죽음을 다루는 주술에 대해 담겨있다.」
“불사의 신 데니토. 그의 물건입니다.”
호진은 불사의 신을 입에 담으면서 하얀 가면을 떠올렸다.
자신이 막아내지 않았다면, 대한민국과 시리온을 크게 위협했을 하얀 가면의 계획들.
실제로 시리온은 멸망 직전 단계까지 이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캠프도 위험했지.’
호진은 그날에 있었던 희생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런 호진의 감상을 뒤로하고 사람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데니토…… 그 이단들의?”
“기억났습니다. 이 기운.”
아르바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구로 넘어갔을 때 보았던 ‘죽지 못한 자’들.
그들에게서 느껴졌던 기운과 흡사했다.
분명 그들도 봉사자였을 터다.
“정말 손을 안 뻗은 곳이 없군요.”
호진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얀 가면의 계획성에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울그바흐가 이런 걸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머릿속에서 울그바흐의 입장을 고려했다.
자신이 울그바흐였다면 분명…….
“울그렉 이후트에게만 미래를 맡기기에는 불안했던 게 아닐까요?”
협상의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강대한 존재라면, 그저 믿는다는 게 불안했을 것이다.
보상을 받을 때가 됐을 때 상대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불안감을 품고 있던 때에 울그렉 이후트만큼 강한 존재가 나타나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하고, 나아가 힘까지 약속한다면?
손을 잡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상대가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좋은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몸값을 높이기에도 알맞은 방법일 것이다.
울그렉 이후트 입장에서야 배신행위였겠지만, 애초에 울그바흐의 입장에선 울그렉 이후트나 데니토나 그게 그거였을 것이다.
호진의 설명을 들은 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설명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왕국과 종족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자가 아닌가.
‘그나저나 이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지만,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호진은 그제야 그것과 비슷한 것을 봤던 곳을 떠올렸다.
‘하픈덤의 해안 동굴!’
인간으로 둔갑한 어인들이 살던 마을에서 봤던 문자다.
호진은 급히 인벤토리를 뒤져서 그때의 보상을 꺼내 들었다.
「해안가 마을의 낡은 밀교(密敎)」
「종류: 도서」
「정보: 해석할 수 없는 용어들이 적혀 있는 낡은 경전입니다. 일부분이 찢겨있습니다.」
용도를 알 수 없어 오래도록 보관해온 보상이다.
호진이 그 책과 양피지에 적힌 문자를 비교하며 바라봤다.
필체도, 느껴지는 기운도 다르지만 형태가 일치했다.
그 순간.
─띠링
「잊혀진 고대신들의 문자를 발견했습니다.」
「고대문자에 대한 이해도가 오릅니다.」
「해안가 마을의 낡은 밀교(密敎)의 이해도가 50% 진행됩니다.」
「이름 없는 책의 낱장의 이해도가 20% 진행됩니다.」
「우다곤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데니토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중급 내성이 정신오염에 저항합니다.」
오래간만에 시스템 창이 알림을 울려왔다.
설명을 볼 필요도 없이 들고 있던 두 종이의 문자의 내용 일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책에는 죽은 자의 시체를 섭취해 힘으로 삼는 내용의 일부가, 밀교에는 우다곤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가볍게 그것을 살피던 호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중급 내성이 정신오염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불쾌한 감각이 점점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알아도 사용할 수 없는 내용과 방법들.
호진은 다른 이의 끔찍한 죽음을 강요하고, 그를 통해 강해질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호진이 걸어온 길도, 나아갈 길도 아니었기에.
‘애초에 이런 길은 누구도 걸어선 안 되겠지.’
당장이라도 손에 들린 종이 쪼가리들을 불사르고 싶었지만 호진은 이를 간신히 참아내며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언젠가는 쓸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우선 지금 상대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아르바흐는 자신이 내걸었던 약속을 지켜냈다.
그렇기에.
“저도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됐군요.”
호진은 높이 솟은 난쟁이 왕국의 왕성을 바라보며 검을 고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