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결투재판 (2)
“저건……?”
결투를 지켜보던 제국의 기사단장 에우리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지막의 순간, 울그바흐는 늑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일격을 날렸다.
그 폭풍과도 같은 기세는 쉬이 꺾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에우리우스는 아르바흐의 패배를 점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아르바흐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 오는 거대한 도끼에 맞서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 것이다.
그는 그저 바라보고 기다렸다.
그리고 또 기다리다가 도끼가 휘둘러진 그 순간.
─텅!
건틀렛을 휘둘러 도끼의 궤도를 비틀었다.
힘으로 막아내거나 비튼 것이 아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
그것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이화접목(移花接木).’
에우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한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의, 아니, 제국군의 기술을 유출한 중죄를 저지른 그 남자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귀공 설마…….”
“죄송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호진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결투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엔…….
─꿀렁
검은색의 불길한 부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망치에 맞아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울그바흐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은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것.
삿되고 저주받을 옛것들의 기운.
호진은 말을 잃은 에우리우스를 향해 이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왕국들과 제국이 힘을 겨룰 상황이 아닙니다.”
“…….”
“이미 어둠에 속한 자들이 이곳에 도착했으니까요.”
에우리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젠 빛과 선신의 자식들이 뭉쳐야만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
아르바흐는 쓰러져 피를 토하는 자신의 삼촌을 바라봤다.
손에 느낌이 있었다.
못해도 팔뼈를 포함해 늑골 여러 개가 부러졌을 것이다.
부러진 늑골의 뼈가 폐를 찔렀다면 죽을 수도 있는 중상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울그바흐는 먼지 바닥을 기며 피가 섞인 거품을 흘려댔다.
복수에 성공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짜릿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증오해 마지않았던 삼촌이지만, 한때는 아버지보다도 존경했던 삼촌이었다.
아르바흐에게 용 사냥에서 돌아오는 삼촌의 모습은 신화 속의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자신의 영웅의 비참한 모습을 오히려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죽일 마음까지도 사라져버린 아르바흐는 사제를 바라봤다.
더 이상의 결투는 속행이 어렵다고 판단된다면, 승자가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아르바흐와 눈이 마주친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는……!”
재판의 결과를 발표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꿀렁
이질적인 기운이 투기장에 감돌았다.
사제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울그바흐를 바라봤다.
사제뿐만이 아니라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르바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저 이질적인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부정의 기운이 형태를 갖추자 느껴지는 또 다른 기운.
그쪽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흉측하게 길어진 머리와 목.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과 번뜩이는 파충류의 눈.
부러진 갈빗대에서 솟아오른 얇은 피막이 볼품없이 퍼덕이고, 검은색의 비늘이 몸의 반신을 뒤덮었으며, 부러진 팔에는 일그러진 꼬리가 자라났다.
생긴 것이 너무나 끔찍해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기운의 정체는 명확했다.
바로 얼마 전에 상대했던 존재.
파프니르.
즉, 용의 기운이었다.
“────!”
용이 되다 만 흉측한 짐승이 울부짖자 소란스러웠던 광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드래곤 피어.
그 기운에 맞서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이 자리에 몇 명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그때, 용의 앞으로 누군가 한 걸음 다가섰다.
아르바흐.
그는 용의 증오와 적의를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다.
“용을 사냥하는 용살자가 용의 강함을 탐하였군요.”
용을 사냥해왔기에, 오히려 그 존재의 두려움과 강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고대의 영웅 파프니르가 그랬듯이.
강함에 매료된 자들은 종종 탐욕에 눈이 멀어 그릇된 선택을 한다.
“용의 심장을 취하셨어요.”
“크르르르르르륵.”
짐승의 형상을 한 그것이 증오에 찬 울음을 내뱉으며 아르바흐를 노려봤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아르바흐는 천천히 망치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진짜 용이 된 것은 파프니르뿐.’
작금의 용이란 불리는 것들은 완벽한 용이었던 고룡들의 부산물이자 레플리카들.
고룡의 심장을 취한 파프니르와 달리, 레플리카들의 심장을 취한 자들은 용의 형상조차 되지 못하고 미쳐 죽어갔다.
반면, 눈앞의 울그바흐는 그 둘과 모두 달랐다.
용이라고 하기에는 조악하지만 분명 용과 같은 기운을 지녔다.
분명 앞에서 느꼈던 이질적인 기운이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아르바흐는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연민과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신 건가요. 삼촌.”
“크르륵…….”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아직 난쟁이의 형상이 어렴풋이 남아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짐승.
그것은 짧은 두 발로 애처롭게 땅을 딛고, 기울어진 몸을 돋아난 꼬리로 지탱하며 간신히 서 있었다.
짐승은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아르바흐와 마주쳤다.
“────!”
그와 동시에 두 존재는 서로에게 끌리듯 마주 달려들었다.
영혼에서 터져 나오는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쾅!
매섭게 내리꽂히는 짐승의 머리를 아르바흐는 구르듯 피해냈다.
곧장 몸을 일으킨 아르바흐는 그대로 파고들어 망치를 휘두르려 했으나,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채찍 같은 꼬리가 아르바흐가 서 있던 자리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마치 손과 발처럼 휘두르는 꼬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붙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벌렸지만 그러면 불리해질 뿐이었다.
짐승의 길쭉한 목은 자신의 망치보다 몇 배는 유효거리가 길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짐승의 아가리가 재차 아르바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르바흐는 재차 물러났지만, 단검보다도 예리한 이빨들이 아르바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어깨의 근육이 저항 없이 잘려 나가며 피가 흘렀다.
이미 몸은 울그바흐와의 결투로 거의 한계에 달했다.
지금 상태로는 5분 이상 서 있는 것도 힘들 것이 분명했다.
빠르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아르바흐는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계속해서 사고했다.
‘계속해서 사고하십시오.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고르세요.’
호진의 가르침을 머리에 새기며 아르바흐는 자신이 가진 것과, 상대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어렴풋한 계획이 생겨났다.
정답일지 아닐지 의문이 들었지만, 의심을 떨쳐냈다.
충분히 생각했고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
아르바흐는 짐승을 향해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짐승이 기다렸다는 듯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순간.
다시 한번, 망치의 끝에서 제국 검술의 정수가 터져 나왔다.
‘이화접목!’
─스륵
기묘하게 힘의 방향을 꺾은 망치가 짐승의 몸에 난 비늘과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아르바흐는 짐승의 공격을 흘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품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은 못 써먹는다.’
이화접목을 당한 상대들은 큰 공격을 삼가게 된다.
이런 류의 기술들이 그렇듯이, 이화접목도 반격을 경계하는 상대한테는 무의미하다.
밑천을 드러낸 만큼 이번에 끝내야만 했다.
그 순간 놈이 남은 한쪽 팔로 도끼를 휘둘렀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아르바흐는 당황하지 않고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는 정확히 도끼를 휘두르는 어깨를 내리찍었다.
비늘도 나지 않은 난쟁이의 육체.
약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순간 짐승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놈이 휘두르던 도끼는 엉뚱한 곳에 내리꽂혔다.
‘됐다!’
효과가 있었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아르바흐가 망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쾅!
강력한 충격에 아르바흐의 몸이 붕 떠올랐다.
아르바흐는 몸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살폈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어느새 돌아온 용을 닮은 머리가 있었다.
비껴 나갔던 머리가 방향을 틀어 다시 자신을 들이받은 것이다.
목의 유연함이 뱀 그 이상이었다.
아르바흐는 우당탕탕 바닥에 몸을 구르곤 곧장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 모두가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다시 파고드는 것은 무리다.’
아르바흐는 생각했다.
이화접목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한데, 이제 그것은 드러난 패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면에서 놈의 일격에 맞서서 비늘을 부수고 타격을 줄 만한 공격을 가하는 것.
아르바흐는 움직이지 않고 일격을 준비했다.
오래된 옛 기도문을 읊조리자 충만한 기운이 아르바흐를 감쌌다.
크잣티라엘에서 황금색의 빛이 스며 나왔다.
선조들이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짐승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의 목에서 붉은색 빛이 일렁였다.
이글거리는 불빛이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아르바흐는 그 붉은빛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고대의 숨결.
신격들조차 두려워했다던 소멸의 의미를 담은 마법적인 힘.
파프니르가 뿜어냈던 그 패도적인 불꽃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당했다.’
자신처럼 놈도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었다.
아직 녀석의 브레스를 받아칠 만큼 힘이 모이질 않았다.
아니, 아무리 힘을 모은다 한들 가능할지 모르겠다.
놈의 불꽃은 자신뿐이 아니라 광장의 모두를 불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아르바흐의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뿐이었기에.
‘그래, 지금이라면.’
힘은 덜 모였지만 지금 놈을 향해 달려든다면 브레스를 멈출지 모른다.
브레스를 뿜어내더라도 동귀어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바흐가 내달리려던 그 순간, 용의 입에서 넘실거리는 불이 흘러넘쳤다.
늦은 것이다.
아르바흐는 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망치가 닿기도 전에 자신이 녹아내릴 것을 직감했다.
놈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불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그 순간이었다.
─서걱
찰나였지만 아르바흐는 들을 수 있었다.
위기의 상황을 뒤집어엎는, 익숙한 절삭음을.
그제야 아르바흐는 자신의 뒤에 있는 존재를 깨달았다.
울그레 이후트의 첫 번째 자식을 죽이고.
라멜의 사도를 베었으며.
라멜의 화신과 조우하고 살아남은 존재.
파프니르의 불꽃을 검으로 꺼트린 존재가 뒤에 있었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그 남자라면 광장의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 안심이 됐다.
아르바흐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가는 브레스를 보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망치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마의 기운을 담은 빛이 오래된 옛것의 존재를 지워나간다.
짐승의 번들거리는 동공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인지를 벗어난 무언가의 개입에, 짐승은 주춤 물러나며 어설프게 자라난 피막이 붙은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러나 그 조악한 날개로 날 수 있을 턱이 없다.
용의 형상을 한 짐승의 머리 위로 빛을 담은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