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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56화 (156/241)

156화. 결투재판 (1)

왕국의 성도 카라즈 안코르의 대광장.

평소라면 예술가들의 조각이 설치되거나, 혹은 스포츠 경기가 벌어졌을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일반 시민들부터 타국의 관료와 인간 용병들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모인 이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이들은 여섯 가문이었다.

─펄럭

용, 방패, 투구, 산양, 모루와 망치, 은빛의 손바닥.

그들은 각자의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높이 들고 수십의 가신들과 함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 완전무장한 이들.

시민들은 그들이 지나감에 썰물처럼 길을 비키며 흠칫 몸을 떨었다.

입을 굳게 다문 그들의 표정은 전쟁에 나서는 전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소문이 진짜일까?”

“글쎄, 뭐가 됐든 내전으로만 이어지지 않으면 좋겠군.”

“분위기로만 보면 오늘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시민들은 흥분과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광장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곳엔 이미 두 진영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각 진영을 상징하는 빨간색 깃발과 파란색 깃발이 산들거리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꼈다.

문제는 두 깃발 모두 왕가를 상징하는 망치가 새겨져 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왕국이 양분됐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타국에서 온 관리와 세작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광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여섯 가문은 각자가 지지하는 진영 측으로 나뉘어 섰다.

정확히 반으로 나뉜 세력은 서로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빨간색 깃발이 걸린 천막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용살자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벅 저벅

투구는 쓰지 않았다.

회색빛이 드문드문 섞여 있지만 짙은 검은색 머리는 뒤로 묶어 넘겼다.

짐승의 그것처럼 사납고 거친 수염은 장신구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야생적이고도 사나운 그는 마치 검은색 갈기를 지닌 숫사자와 같은 인상을 줬다.

솥뚜껑만 한 손에는 본인의 상체만 한 크기의 도끼를 들고 있었다.

잘 벼려진 도끼에는 산과 나무를 상징하는 형상의 모습들이 신비로운 모습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용을 사냥하러 나서는 용맹하며 신비로운 사냥꾼 그 자체였다.

“오오!”

“역시 울그바흐다.”

모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울그바흐의 당당한 걸음걸이에서는 긴장감 따위는 엿볼 수조차 없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왕국에 잠입한 세작들도 고개를 연신 주억거릴 뿐이었다.

애초에 재판의 피고인은 용살자의 칭호를 지닌 뛰어난 전사 울그바흐다.

반면 그 상대이자 재판을 신청한 원고는 다름 아닌 왕국의 전 왕자 아르바흐.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인물이 무슨 수로 왕국 최고의 전사인 용살자에게 대적하겠는가.

세작들은 물론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이들은 이미 승부의 결과를 점치고 있었다.

어리석은 왕자의 만용을 한탄하거나 비웃으면서.

그때였다.

─스륵

반대쪽에서 푸른색 깃발이 걸린 천막 입구가 펄럭이며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그쪽을 향해 쏠렸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어리석은 왕자의 모습은 어떨지.

사람들의 표정에는 그런 기대가 깃들어 있었다.

─절그럭

묵직한 쇳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높이 솟아오른 뿔 모양의 투구였다.

코까지 내려오는 바이저로 인해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검은색 수염과 눈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칠흑을 품은 흑안은 분명 왕가를 상징하고 있었으니까.

보기만 해도 묵직한 철갑옷을 입은 아르바흐는 손에 그 유명한 전투 망치를 들고 있었다.

황금색을 뿜어내는,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구이자 오래된 무기.

황금망치 크잣티라엘.

바보 같거나 볼품없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아르바흐의 모습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왕자의 모습엔 분명 왕가의 고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이번엔 울그바흐 측에 선 가문들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왕자만큼이나 돋보인 건 그가 지닌 무기였지만, 그것마저도 아르바흐가 뛰어난 전사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크잣티라엘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곤욕일 정도였으니까.

왕자가 왕실의 무기를 사용한다고 비난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비의 유품인 무기를 쓰겠다는 자식을 욕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아르바흐는 흔들림 없이 나아가 울그바흐와 마주 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시선이 교차했다.

광장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때가 된 것이다.

결투의 진행을 맡은 이는 왕국 신전 소속의 사제였다.

난쟁이들의 전통 복장을 걸치고 등장한 그는 광장에 선 두 난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여신 이자리온의 이름을 걸고 자신들의 주장에 거짓이 없음을 맹세하는가?”

“물론입니다.”

“물론이다.”

“둘 중 하나는 신의 이름 아래 거짓을 고하고 있으니. 신과 선조들의 가호 아래 진실한 자만이 끝까지 서 있을 수 있으리라!”

잠시 눈을 감으며 기도를 취한 사제가 두 난쟁이에게 말했다.

“준비되었으면 지정된 위치로 이동하게.”

아르바흐와 울그바흐는 몸을 돌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서로 지정된 위치로 서자, 신관이 옆의 나팔수에게 신호를 줬다.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신 나팔수가 힘차게 나팔을 불었고, 광장에 모든 이들은 그 우렁찬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결투의 시작이었다.

***

아르바흐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고는 망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선 상대의 실력을 살펴야 해.’

상대는 용살자로 이름을 날린 전설적인 전사이자 사냥꾼이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그 실력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탐색전을 통해 확인해봐야만 했다.

“뭐 하는 게냐. 설마 눈싸움이라도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텐데.”

울그바흐의 도발에도 아르바흐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를 지켜봤다.

공격보다는 방어가 용이하다.

무엇보다 몸보다도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아르바흐의 침묵에 울그바흐의 무뚝뚝하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껏 기회를 줬건만. 조카야, 내가 예언 하나만 하마.”

울그바흐는 도끼를 어깨에 둘러메며 말했다.

그러기도 잠시, 그의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살짝 젖혀진 상체를 끌어당기는 그 순간…….

─쾅!

그가 박찬 광장의 바닥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그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쇄도했다.

아르바흐의 머리 위로 벼락같은 일섬이 내리 찍혔다.

‘빠르다.’

아르바흐는 황급히 망치를 휘둘러 그 공격을 튕겨냈다.

두 무기가 공중에서 교차하는 순간 귀를 찢을 듯한 금속음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선공을 날린 울그바흐는 그대로 뒤로 몇 보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마치 다친 먹잇감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늑대처럼.

그러곤 아르바흐를 향해 사납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너는 이제 공격 한번 못 해보고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 확신을 담은 목소리에 아르바흐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방금 반격은 꽤나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울그바흐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자신의 전체적인 역량은 그보다 아래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진짜 실력을 감춰야 한다.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상대에게 다 보여준다면 변수를 만들 수 없다.

가장 상대가 방심한 순간.

비장의 카드는 오로지 그 순간에 꺼내 들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아르바흐의 주위를 배회하던 울그바흐는 재차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카강! 쾅!

냉병기끼리 부딪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폭음이 터져 나왔다.

무기가 교차할 때마다 붉은색 불꽃이 터져 나오고, 쇠 냄새가 가득 퍼졌다.

딛고 있는 땅은 쩍쩍 갈라지고 하얀 분진이 광장을 메워갔다.

언뜻 보면 격렬해 보이는 대결이었지만, 실상은 일방적이기 짝이 없었다.

“크윽!”

아르바흐가 신음을 터트리며 물러나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두꺼운 어깨 보호대가 떨어져 내렸다.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간 어깨 보호대에는 붉은색의 선혈이 묻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냐. 실망스럽구나. 아르바흐.”

굶주린 짐승처럼 사납게 아르바흐를 물어뜯던 울그바흐는 이젠 더 이상 벗겨낼 갑옷조차 떨어지자, 실망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기대했다. 왕국에 돌아오고부터 너의 행보는 마치 신화 속의 아울레를 연상케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울그바흐의 표정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아르바흐는 괴물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주제에 아울레를 들먹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을 알아챈 울그바흐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넌 모를 게다. 나만큼 영웅의 등장을 바라왔던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미치시기라도 한 겁니까?”

아르바흐의 비꼼에도 울그바흐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끝은 다가오는데, 영웅은 나타나질 않지. 심지어 자신도 그런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거다. 난 그 사실을 너보다 빨리 깨달았을 뿐이다. 조카야.”

울그바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자신의 먹잇감이 지치고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느꼈다.

끝을 낼 시간이었다.

‘아쉽군.’

울그바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닿기에는 부족했지만, 솔직히 놀라웠다.

왕국 전체를 다 뒤져도 자신과 이 정도로 겨룰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조카 아르바흐는 달라져서 돌아왔다.

강하고 용맹해져서, 왕의 그릇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만약 시간이 더 있었다면 네가 진짜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준비할 기회와 시간 따위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꽃은 너무 늦게 피어났다.

꽃봉오리가 채 피기도 전에 떨어지리라.

자신의 손에 의해서.

울그바흐는 도끼를 허리높이로 들어 올려 기를 끌어모았다.

용의 목조차 양단했던 이 일섬이 그가 조카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일 터였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앞으로 몸을 쏘아냈다.

끌어모은 기가 휘두르는 도끼에 맞춰 터져 나온다.

끝을 확실한 그 순간.

─텅

절삭음 대신 깡통 차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노렸던 방향과는 전혀 엉뚱하게 휘어진 도끼가 그대로 땅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 울그바흐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바흐가 자신을 보며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느릿하게 보였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망치까지도.

─우득

팔로 급하게 가려봤지만 망치는 왼쪽 팔뼈를 부수고 그대로 갈비뼈까지 으스러트렸다.

강렬한 통증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꺼져가던 정신은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다시 각성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끄어어억.”

바닥을 구르며 먼지인지 모래인지 모를 게 피와 침에 섞여 뚝뚝 떨어졌다.

눈앞은 깜깜한 밤과 환한 정오가 오가듯 번쩍이며 섬광이 터지는 듯했다.

그 강렬한 통증 속에서, 울그바흐는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죽음의 존재를.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미 그는 아르바흐와 대결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에게 남은 희미한 의식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생존은 울그바흐가 지닌 가장 강렬한 본능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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