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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55화 (155/241)

155화. 원탁회의 (5)

왕의 검이자 방패.

바룩크툼 왕실근위대.

작금에 이르러서는 해체될 위기에 놓였지만, 그 위엄과 명성은 여전했다.

그들을 상징하는 깃발은 흩트림 없이 꼿꼿했으며, 반짝이는 은빛의 갑옷에 햇살이 산산이 부서졌다.

울그바흐에게 매수된 경비들조차 감히 그들의 입장을 막아서지 못했다.

애초에 여섯 가문 중 하나인 브론즈비어의 참석을 막아설 명분 따위가 한낱 경비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신 브론즈비어와 그 휘하 왕실근위대 500명!”

목소리를 높인 토그림은 몸을 돌려 아르바흐를 향해 말했다.

“왕가의 부름에 답하여 이곳에 모였나이다. 명령만 내리소서.”

토그림의 말에 울그바흐 세력의 병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말은 명령만 내리면 지금 당장 도끼를 뽑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까.

일촉즉발의 상황.

회의실엔 적막만이 흘렀다.

만약 지금 아르바흐가 명령만 내린다면 그 순간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왕국의 미래가 정해질 터.

가주들부터 병사들까지.

또 이미 각오를 다진 자부터 그렇지 못한 자들까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무기가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무기들을 슬그머니 꼬나쥐었다.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예상치 못한 사태에 울그바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은 생각인 듯 도끼에 조용히 손을 가져다 댔다.

아르바흐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선 표결이 3대 3으로 나뉘면 안 된다.

차라리 군사적 우위를 점한 지금 이 순간, 내전을 택하는 편이 아르바흐에겐 최선일 터였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향해 무기를 뽑아 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기다려주시죠.”

그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아르바흐 본인이었다.

“…….”

“…….”

예상치 못한 말이 아르바흐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에 아군도 적군도 모두 당황하여 무기에서 스르륵 손을 놓았다.

“아르바흐 님?”

토그림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표정을 구겼다.

‘설마……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건가.’

변했다고 들었다.

자신들을 데리러 왔던 제국의 기사에게.

그래서 수소문을 해본 결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시칸 대사막을 횡단하고, 시리온 공국과 동맹을 끌어냈으며 심지어 용과 맞섰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비현실적이라 믿기 힘든 이야기밖에 없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분명 다른 이들이 용을 사냥하는 동안 옆에서 쇠뇌라도 장전하고 있었다는 말이 과장된 것일 터다.

어쩌면 그조차 아닐지도 모르고.

하지만.

토그림은 그 소문들의 10분의 1만 진실이라 해도 아르바흐를 따르고자 했다.

그가 아니라면 브론즈비어 가문과 왕실근위대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니까.

‘무엇보다.’

아르바흐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오랜 시간 지켜온 왕가의 후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아르바흐 입에서 믿기지 않는 명령이 나왔다.

“무기를 거두십시오. 토그림 브로즈비어.”

토그림은 배신감에 수염이 잘게 떨렸다.

역시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없었다.

‘머저리 같은 놈.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반역자들을 포박하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믿음을 걸었던 왕자는 여전히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토그림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조용히 무기를 거뒀다.

계획은 실패했다.

‘이제 왕국을 빠져나가 용병을 하려던 계획도 끝이군.’

이빨을 드러낸 이상, 울그바흐가 자신을 얌전히 내보내 주진 않을 터다.

울그바흐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한 듯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늑대같이 비열한 녀석이 훤히 들어난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토그림이 낙담하며 눈을 감은 그 순간이었다.

아르바흐의 입에서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두 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찬탈자 울그바흐. 결투 재판을 요청합니다.”

“……?”

토그림은 그 말에 의미를 한참이나 곱씹은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이나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기에.

다른 사람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르바흐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아르바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만약 모두가 피를 흘려야 한다면 전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삼촌이 선택하시죠.”

말을 마친 아르바흐는 토그림을 향해 눈짓했다.

토그림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근위대! 준비하라!”

눈을 반짝인 토그림의 뇌성벽력과 같은 부름에 복도와 안뜰에 위치한 근위대가 무기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단단히 고정된 방패와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도끼.

근위대는 언제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그 기세에 눌린 울그바흐의 군대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르바흐. 네놈.”

울그바흐의 표정이 이전에 비할 데 없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마치 불에 데인 듯 그 반응이 격렬했다.

“버러지 주제에 감히!”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자 썩은 고목처럼 으스러졌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울그바흐가 답했다.

“네놈이 더럽힌 명성과 실력으로 내게 도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다고 보는 게냐.”

“찬탈자도 그리 깨끗한 명성은 아닐 텐데요.”

─까득

어느새 울그바흐를 자연스럽게 찬탈자라 부르는 아르바흐.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울그바흐 세력의 병사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르바흐의 당당한 태도가 거짓이라 믿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기에 울그바흐는 초조해졌다.

자꾸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됐다.

어찌 보면 결투 재판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구를 대리자로 내세울지는 모르겠지만, 구르드도 토그림도 자신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르바흐의 대리자를 짓밟는다면 자신의 위엄도 한층 더 올라갈 터.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좋다. 네 뜻대로 해주마. 결투 재판에 응하겠다.”

“좋습니다.”

둘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양측은 천천히 무기를 내렸다.

“나는 대전사를 내세우지 않겠다. 내가 직접 나가지.”

울그바흐는 자신의 도끼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 모습에 그를 따르는 전사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아르바흐 측의 군대를 향해 조소했다.

그들은 대전사를 세울 게 분명했으니까.

그때 아르바흐가 토그림을 돌아보며 물었다.

“토그림, 제 망치는 어디 있죠?”

“아, 그것은….”

토그림이 눈짓하자 한 전사가 갈색 가죽에 뒤덮인 무언가를 가져왔다.

끈을 푼 가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망치의 형상.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치를 집어 들었다.

“저희 쪽에서도 제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아르바흐의 발언에 다시 한번 회장은 술렁였다.

조소를 짓던 울그바흐의 전사들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아르바흐를 따르는 이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오웬은 슬그머니 미소를.

구르드는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마지막으로 토그림은 아르바흐의 예측할 수 없는 발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멀미를 느껴야 했다.

***

“왕자님이 혹시 어디가 아프시거나 뭔가 잘못 드신 것은……?”

“어허. 무엄하다.”

“……죄송합니다.”

구르드의 일갈에 토그림 브론즈비어는 고개를 숙였다.

억울한 마음에 눌러뒀던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잘하시는가 싶더니, 갑자기 직접 결투를 하시겠다니.’

상대는 무려 용살자의 칭호를 지닌 왕국 최고의 전사 울그바흐다.

상대의 약점만 노리는 그의 잔인한 성정은 늘 지적받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는데, 하물며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왕국의 골칫거리였던 왕자가 상대라니.

이건 만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토그림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토그림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서 작전회의 중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르바흐, 한데 괜찮겠나?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아르바흐를 걱정하는 구르드의 말에 오웬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구르드, 자네는 왕자를 못 믿나 보군.”

그러자 구르드가 얼굴이 시뻘게지며 소리쳤다.

“이놈! 난 그런 게 아니라…….”

“혀가 길다. 구르드 스틸하트.”

“뭐, 뭣? 혀가 어쩌고 어째?”

“스승님, 그만 하세요. 가주님도요.”

이건 작전회의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이쯤 되면 선술집에서 하는 농담 따먹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왜.’

토그림이 미간을 좁히자 이를 눈치챈 아르바흐가 물었다.

“토그림.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왕자님.”

토그림은 급히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왜 나에게만 반말이시지.’

구르드는 스승님.

오웬은 가주님.

자신은 토그림.

‘??’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군주가 신하에게 말을 낮추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저쪽이 더 이상했다.

아무리 가주라지만 가신인 자들이 군주의 뒤통수를 때리거나 반말을 하며 훈계하기도 한다.

구르드도 오웬도 한때는 존경했던 가주들인데, 지금은 죄다 미친놈들로 보인다.

자신이 떠났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쩌면 진영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착잡한 토그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아니, 진행되는 줄 알았다.

“자, 회의는 이쯤하고 이제 밥이나 먹지.”

“그럴까요?”

구르드가 박수를 치자, 식탁에 앉아 꾸벅 졸던 호진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에 제국의 기사들을 포함한 일행들도 왁자지껄 떠들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아니,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토그림이 손을 내뻗으며 소리치자, 떠들썩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토그림이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저…… 그래서 회의 결론이 뭐였습니까?”

그 물음에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에 토그림은 실로 당황스러웠다.

잠시 딴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사이 괜찮은 계획이 나왔을 리가 없었다.

토그림이 혼란한 표정으로 서 있자, 시리온의 공왕이라는 자가 답했다.

“간단합니다.”

그가 아르바흐를 바라보며 웃자, 아르바흐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운다. 그리고 이긴다. 그러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그림의 턱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뭘 들은 걸까.

시리온의 왕이라는 작자의 입에서 무식한 오크들이나 할 법한 말이 흘러나왔다.

세상만사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모든 종족은 아직까지 몬스터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사냥을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살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크들은 그러고 사니까.

“그게,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게…….”

토그림의 반문에 호진은 대답 대신 아르바흐를 바라봤다.

“아르바흐. 토그림에게 손 좀 보여주시죠.”

“네? 아, 알겠습니다!”

아르바흐가 양손을 허공에 펴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안이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

토그림은 침음을 삼켰다.

딱딱한 굳은살과, 피가 터지고 굳으며 엉겨 붙은 흔적이 보이는 손바닥.

손가락의 끝부터 끝까지 성한 곳이 한군데 없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 수 있는 손바닥이 아니었다.

엄청난 수련의 강도.

그의 손바닥에서는 말 그대로 피가 나는 노력이 엿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알던 왕자는 이제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게 늘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토그림은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자심감과 만용은 다른 것이었기에.

그런 토그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호진이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토그림 브론즈비어.”

“……아닙니다. 걱정은요.”

“잠시 나와보시겠습니까? 아르바흐도요. 그동안 수련의 성과를 보여드리죠.”

호진의 말에 토그림은 호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근육질의 난쟁이와 비교하면 비실비실해 보이는 몸.

검을 차고 있지만, 기사들처럼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기에 그저 장식인 줄 알았다.

“공왕께서도 검을 다루실 줄 아십니까?”

약간의 무시가 섞인 그 대답에도 호진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조금은 다룰 줄 압니다. 제 실력도 겸사겸사 보여드리죠.”

그렇게 세 사람은 브론즈비어의 훈련장으로 향했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택 안으로 한 사람의 비명 소리가 흘러들어왔고, 이에 사람들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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