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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54화 (154/241)

154화. 원탁회의 (4)

“부결이군.”

울그바흐는 무표정한 얼굴로 원탁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어서 그 시선은 이를 악물고 있는 아르바흐를 향했다.

“아르바흐. 너는 왕국의 혼란을 야기했다.”

“혼란……?”

“그래.”

울그바흐가 고개를 돌려 뒤에선 실버핸드의 가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실버핸드의 가주가 목을 가다듬은 뒤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달바흐의 아들인 아르바흐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거짓된 적을 꾸며내어 여섯 가문의 가주들을 선동했다. 하여 그에게 왕국 내란을 꾀한 죄를 묻겠다.”

실버핸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레이고트의 가주가 소리쳤다.

“죄인들을 모두 포박해라!”

─스릉!

실버핸드, 그레이고트 그리고 쿠라그 쉴드락의 가신으로 참가한 고위 전사들이 무기를 빼 들더니 순식간에 아르바흐를 향해 날붙이를 들이밀었다.

이에 일행들이 무기를 뽑아 대응하려는 순간.

─덜컥!

기다렸다는 듯 회의장 문이 열렸다.

“후!”

무장한 수십의 전사들이 회의장으로 난입하더니 포위에 가담했다.

물샐틈없이 촘촘한 포위가 아르바흐는 물론 구르드와 오웬마저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네놈들이 감히……!”

구르드는 분노했고.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웬을 따라온 마이스터들은 당황했다.

반면 오웬은 무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드득

반면 아르바흐는 자신의 당황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당했다. 언제부터였지?’

사태를 파악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아르바흐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며, 바삐 생각을 이어나갔다.

가신으로 참여한 난쟁이들 모두가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되었었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내 힘만으론 해결할 수는 없다.’

의외로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준비하고 때를 기다린 것은 자신이 아닌 삼촌이었다.

‘설마 쿠라그 쉴드락이 배신할 줄이야.’

쉽게 들어온 행운이자 모든 계획의 첫 단추였던 그가 사실은 함정이었다는 사실은 크게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아르바흐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약간의 행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쿠라그 경. 처음부터 함정이었습니까? 아니면 꼬드김에 넘어가신 겁니까?”

“……왕자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쿠라그는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올곧은 성정이 그대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배신은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편하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흐와 구르드가 알던 쿠라그는 애초에 배신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경은 변한 것 같습니다만.”

아르바흐의 냉소적인 대답에 쿠라그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영지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왕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쿠라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듣지도 답하지도 않겠다는 듯이.

이에 아르바흐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쿠라그의 배신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벌어진 일.

이제는 모두 걷어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오가 또다시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과거의 난 도대체……!’

백성들과 신하들 그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못한 왕자.

모든 것은 자신의 업보였다.

쿠라그에 대한 분노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자신밖에 모르는 쿠라그가 자신을 쉽게 믿고 따를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구르드와 오웬에게는 증명했다.’

자신은 변했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쿠라그에게는 증명하지 못했다.

모든 행동에는 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르바흐가 자신에 대한 환멸로 몸을 떨자, 이를 본 그레이고트 가주가 혀를 쯧쯧 찼다.

“한심하군요, 왕자. 아직도 본인의 잘못을 모르겠습니까?”

“이제 그만 죄를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외치는 실버핸드 가주의 얼굴에는 안심과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자신들의 승리를 예견한 까닭이었다.

잠자코 있던 울그바흐 역시 무겁게 입을 뗐다.

“지금이라도 죄를 인정하고 무릎 꿇어라, 아르바흐. 조카이니만큼 정을 베풀겠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버핸드와 그레이고트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용은 성군의 덕목이지요.”

“훌륭합니다. 아울레 아누 울그바흐 경.”

─쾅!

그때 뇌성벽력과 같은 굉음이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아르바흐의 발 구름에 갈라진 완전히 부서진 원목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고개 숙여 그들을 말을 듣고만 있던 아르바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무겁고 후끈한 공기가 방 안에 휘몰아쳤다.

“……?”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르바흐를 향해 집중됐다.

흑안에 흑발.

왕가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그 고결한 색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왕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말한다.”

그의 말이 회의장 안에 웅혼하게 울려 퍼졌다.

몸이 떨리는 진동에, 아르바흐의 목에 무기를 겨눈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내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대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허나!”

후끈한 열풍은 어느새 뜨거운 열기가 되어 방을 덥혔다.

그리고 원탁 위에 놓인 바룩크툼의 옥새가 미약하게 진동하며 보석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

몇몇이 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히 배신했던 쿠라그의 경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난 단 한 번도 그대들에게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도 마찬가지.”

아르바흐의 흔들림 없는 거목 같은 시선이 울그바흐를 향했다.

그는 짐승처럼 사나운 기세를 흘리는 울그바흐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울그바흐는 갑자기 거대한 기운이 짓누르는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콰당

그리고 그것은 울그바흐뿐만이 아니었다.

포위하고 있던 전사들이 다리를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왕의 위엄!’

오직 가문의 가주들을 비롯해 몇몇만이 알아본 그 힘.

그들 앞에 선 아르바흐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찬탈자이자 왕국을 괴물에게 팔아먹은 울그바흐에게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아르바흐!”

울그바흐는 원탁을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이제 와 자비를 바라지는 않겠지.”

내내 무표정을 일관하던 울그바흐의 표정이 흉포한 맹수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사나운 기세를 일으키며 포효하자, 전사들을 짓누르던 압력이 거둬졌다.

이제 막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은 어린 새싹으로서는 힘을 잠깐 발동한 것이 한계였기에.

─힐끔

전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르바흐가 결투 재판에 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결투 재판은 왕국의 신성하고도 오래된 전통.

왕국의 후계자인 아르바흐에겐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전사들이 눈치를 보며 서 있자 실버핸드 가주가 소리쳤다.

“수세에 몰려 결투 재판이라니.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전사들은 무얼 하는가!”

“아─ 후!”

그 일갈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고쳐 잡았다.

순식간에 수십의 도끼창이 재차 아르바흐를 향했다.

이에 아르바흐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인가?’

시간을 끌고, 나아가 결투 재판까지 언급하며 울그바흐의 함정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르바흐가 이를 악물던 그때였다.

─쾅!

난쟁이 전사 한 명이 급히 회의실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난 전사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큰일입니다! 밖에…….”

하나 그는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회의장 안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를 날려버린 누군가가 소리쳤다.

“비켜라!”

이미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는 없었지만, 그 우렁찬 목소리에 회의장 안 사람들의 표정의 희비가 엇갈렸다.

─뚜벅 뚜벅

군화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은색 빛이 감도는 갑옷, 단단해 보이는 체구, 얼굴을 가리고 있는 투구까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아르바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곧장 무릎을 꿇었다.

“…….”

적막함이 가라앉은 분위기 속.

그는 손을 높이 들어 아르바흐에게 자신의 명패를 내밀었다.

그 명패를 본 아르바흐와 호진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투구 모양이 양각된 명패가 상징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왕국을 수호하는 명가.

“신 토그림 브론즈비어. 정통한 왕가의 부름에 이곳에 당도했나이다!”

왕실 근위대장.

그가 이곳에 도착했다.

***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요! 토그림 브론즈비어!”

실버핸드의 가주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이에 토그림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여섯 가문의 일원인 브론즈비어 가문의 수장으로써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다. 뭐가 문제지?”

“당신은 이번 회의에 불참한다 하지 않았소! 애초에 이번 회의에서 브론즈비어 가문은 여섯 가문에서 박탈될 것이었소!”

“그런가?”

토그림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박탈이 됐나?”

토그림의 물음에 실버핸드 가주는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그건 아직이지만…….”

“그럼 문제없군.”

토그림은 몸을 돌려 가주들과 울그바흐를 향해 외쳤다.

“우리 브론즈비어 가문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투표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지.”

그의 등장으로 회의장은 혼란에 빠졌다.

울그바흐를 지지하던 가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반면 아르바흐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얼굴이 환해졌다.

아르바흐의 세력을 포위하던 전사들도 어쩔 줄 모르고 창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낮고 굵은 한마디가 혼란을 잠재웠다.

“그만.”

울그바흐의 성성한 수염이 공중에 휘날렸다.

그의 분위기는 아까 전 분노할 때보다 한층 더 사나워져 있었다.

그 기세에 전사들은 다시 창을 바로잡았고, 회의장의 모든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투표는 끝났다. 브론즈비어, 네놈 하나쯤 더 왔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지금은 왕국 내란을 꾀한 반역자들을 잡아들일 시간이다.”

울그바흐의 늑대와 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토그림을 향했다.

“네놈에게도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죄가 있는지 없는지.”

울그바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사들의 창이 토그림을 향해 내밀어졌다.

그 날카로운 기세를 묵묵히 받아내던 토그림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누가 그럽니까? 제가 혼자 왔다고.”

“……?”

그 답변에 울그바흐는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울그바흐는 빠르게 걸어 회의장 밖 왕궁의 안뜰이 보이는 창을 향해 나아갔다.

다음 순간.

─쿵! 쿵! 쿵!

은색 빛의 갑옷을 두른 수백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려찍었다.

안뜰을 가득 메운 강철의 차가운 은색 빛이 햇빛과 어우러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국을 수호하겠다는 근위대들의 맹세.

그 맹세가 웅혼한 외침이 되어 성안을 가득 메우고 회의장 안까지 흘러들어왔다.

“바룩크툼과 위대한 아울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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