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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53화 (153/241)

153화. 원탁회의 (3)

카라즈 안코르의 왕성은 산을 깎아 만든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단단한 바위산을 깎아낸 성벽은 강철만큼 단단했지만, 화려한 조각과 건축 양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성의 규모와 기세도 경이로움을 더했다.

하얀 눈이 내린 산과 황금 장식들이 모두의 눈을 홀렸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호진들을 왕성의 안으로 안내했다.

예상외로 어떤 트러블도 없이 아르바흐와 호진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앞서 성의 경비와 이야기를 나눴던 구르드가 입을 열었다.

“가주 외에 다섯 명까지 출입이 가능하다더군.”

구르드는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탁회의의 주체는 여섯 가문의 가주들.

구르드는 그중 스틸하트 가문의 가주였기에, 어렵지 않게 일행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단 말이지.”

이전의 원탁회의를 떠올린 구르드는 한층 더 표정을 구겼다.

여섯 가문의 가주와 왕만이 참석할 수 있으며, 왕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기밀 회의.

그것이 원탁회의였다.

근데 이번 회의에서는 가신을 다섯 명까지 대동할 수 있게 바뀐 것이다.

문제는 그 수가 구르드를 제외한 일행들의 수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

“이래서야 마치…….”

“우릴 초대하는 것 같군.”

도훈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의 핸드건을 만지작거렸다.

용재나 예은도 긴장한 눈빛으로 호진을 바라봤지만, 정작 호진은 말없이 아르바흐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번만큼은 호진도 아르바흐를 그냥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런 호진의 태도를 읽기라도 한 걸까.

아르바흐는 일행들의 불안에도 동요치 않고 당당하게 회의장을 향해 걸어갔다.

‘배치된 경비는 꽤 많다. 하지만 원탁회의임을 감안하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야.’

당당한 표정과 달리 머릿속에선 바삐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르바흐는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아침에 들은 호진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삼촌 울그바흐가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준비라면 나도 충분히 했다.’

관문에서.

그리고 갱도의 지하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막을 넘고, 용과 맞서가며 자격을 얻어냈다.

상대가 어떤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지금껏 준비해 온 노력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터다.

‘가보자.’

그렇기에 아르바흐의 올곧은 시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준비된 자는 다가올 고난이 두렵기만 하지 않는다.

아르바흐는 심장이 뛰는 이유에 기대감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들을 안내하던 병사는 익숙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자신의 일을 끝마친 병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무적인 태도엔 아르바흐에 대한 어떤 기대나 응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르바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자신이 신뢰를 쌓아 올리지 못한 데 있었으니까.

아르바흐는 굳게 닫힌 문의 문고리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끼익

그러자 방 한가운데 원탁이 놓인 원형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바흐에겐 제법 익숙한 장소인 카라즈 안코르의 원탁.

바룩크툼 왕국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최고 권력 기구다.

왕이었던 아달바흐를 따라 몇 번 회의에 참석했었다.

‘이전에는 이 자리에 오는 게 그렇게 싫었거늘.’

추억에 잠긴 아르바흐가 아련하게 원탁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먼저 원탁의 좌석 중 한자리에 앉아있던 이가 말을 걸어왔다.

“왔으면 자리에 앉아라. 구르드 스틸하트.”

말을 걸어온 것은 다름 아닌, 롱비어드 가문의 가주 오웬이었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너도 자리에 앉아라.”

“오웬, 말이 짧군. 내가 오늘 네놈의 버릇을…….”

구르드는 오웬의 말투를 지적하며 날을 세웠지만, 아르바흐는 아무래도 좋았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구르드를 말린 아르바흐는 고개를 돌려 오웬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주.”

애초에 스승이라지만 구르드도 자신에게 반말하고 있기도 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함은 백성들과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지, 존대를 받으려는 게 아니었기에.

그런 아르바흐의 반응에 오웬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구르드.”

“…….”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구르드는 분을 삭이며 조용히 입을 닫았고, 아르바흐와 일행들은 구르드 뒤쪽에 준비된 가신들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왕자님!”

관문의 수호자 ‘카잣 둠’의 영주, 쿠라그 쉴드락이 호탕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무장한 난쟁이 고위 전사 다섯이 함께했다.

다른 마에스터 다섯과 함께 온 롱비어드와는 색이 뚜렷하게 달랐다.

“오웬! 자네도 오랜만이군. 그나저나 이번엔 같이 안 왔나? 자네가 늘 데리고 다니던 녀석이 안 보이는구만.”

“……시끄럽다. 너도 자리에나 앉아라.”

오웬은 짜증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늘 데리고 다니던 녀석이라면…….’

아르바흐는 오웬의 반응을 살피며 확신했다.

저번에 죽은 울그바흐의 대리인을 말하는 거였다.

한동안 그 대리인에게 휘둘렸다는 것을 새삼 자각한 오웬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런 오웬을 보며 쿠라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왠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 그 나이에 회춘이라니. 비결이 뭔가?”

“……하.”

오웬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쿠라그는 질리지도 않는지 오웬의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이들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한껏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모기 떼에게 시달리는 사자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좋아.’

사이가 좋든, 좋지 않든 아르바흐를 지지하는 가문의 가주들이 모두 모였다.

든든한 일행들과 가신들도 함께한다.

두려울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덜컹!

회의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 소리에 회의실의 소음이 뚝 끊기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저벅 저벅 저벅

수십 명의 발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동부 왕국과의 교역로를 담당하며 부를 쌓아 올린 실버핸드 가문의 가주.

넓은 목장 지대를 배경으로 수많은 산양 기사를 배출한 그레이고트 가문의 가주.

그리고 그들의 앞에 한 인물이 서 있다.

왕가를 상징하는 칠흑 같은 흑발과 수염이 성난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린다.

검은색 동공은 형형하게 빛나고, 등에 멘 쌍수 도끼는 그가 넘어온 역경을 증명하듯 상처투성이.

아울레 아누 울그바흐.

이제는 용살자라는 위명보다 찬탈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자.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덜컥

아르바흐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설마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가신들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선 그와 두 가주는 곧장 원탁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레 원탁의 자리 중 하나에 앉으며 말했다.

“다 모였군. 원탁회의를 시작하지.”

실버핸드 가주와 그레이고트 가주는 자연스레 그가 앉은 자리 뒤로 가 섰다.

구르드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고, 오웬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쿠라그는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끼었다.

원탁엔 서릿발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쾅!

그 끔찍한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아르바흐였다.

그가 발을 구르자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바닥의 원목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당신은…… 거기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르바흐가 화를 삭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탁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여섯 가문의 가주와 왕뿐.

왕세자였던 아르바흐조차 원탁에 앉아 본 적은 없었다.

울그바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르바흐…….”

잠시 조카의 이름을 입에서 굴린 울그바흐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 아르바흐조차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덕분입니다. 삼촌.”

“그래.”

그뿐이었다.

그는 아르바흐의 비꼬는 대답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자격이 없다는 말에 그럴듯한 이유를 댄 것도 아니고 변명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허나, 더 이상 누구도 그가 원탁에 앉을 자격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르바흐는 느낄 수 있었다.

울그바흐는 왕의 자질을 지닌 자였다.

그는 한마디 말과 행동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런 이들은 사기꾼 아니면 지도자 말고는 없었다.

아르바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넘어가는 상황.

‘좋지 않군…….’

구르드는 이를 막기 위해 급히 안건을 꺼내 들었다.

“회의 안건을 제안한다.”

“말해라. 스틸하트의 가주.”

울그바흐가 회의를 주도하듯 대답하자, 구르드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들도 반박하지 않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정통한 아울레의 핏줄이자. 아달바흐의 아들인 아르바흐는 작금의 통치 형태를 폐지하고 왕정으로 돌아갈 것을 원한다. 이에 관해 투표를 진행하고자 한다.”

“한 가지 빼먹었군.”

구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울그바흐가 말했다.

“뭘 빼먹었다는 거냐.”

구르드가 사납게 되묻자 울그바흐가 탁자 위에 무언가를 탁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시선은 자연스레 그리 향했다.

왕가를 상징하는 푸른 광석 옵실리티움이 박힌 네모반듯한 옥새.

울그바흐는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는 이걸 원하는 거 아닌가.”

아르바흐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왕정의 복고가 아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울그바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물음에 답한 것은 구르드가 아니었다.

“예, 제가 원하는 것은 저의 왕위입니다.”

아르바흐가 몸을 일으켜 울그바흐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야지만 배신자와 적들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곤 짓씹듯 자신의 목표를 내뱉었다.

그 모습에 울그바흐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에 희미한 불쾌감이 스치듯 지나갔다.

“바뀌었구나, 아르바흐.”

울그바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곤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좋다. 안건을 받아들이지.”

원래라면 이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찬반을 나눠야 할 것이다.

하나, 이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할 사람은 이곳 어디에도 없었다.

“다들 할 말 없나?”

“…….”

“그럼 투표를 진행하지.”

울그바흐는 원탁을 둘러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바흐의 왕위 세습을 인정하고, 왕정의 복고를 원하는 자. 패를 던져라.”

울그바흐가 말을 마치는 순간, 구르드는 원탁 위로 자신의 명패를 던졌다.

용의 형상이 양각된 명패가 짤그락 소리를 내며 원탁 위로 떨어졌다.

─탁

오웬 역시 모루와 망치가 새겨진 명패를 원탁 위에 올리고 스윽 밀었다.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다.

원탁회의에서 결정은 과반수를 받는 것.

이제 끝났다.

‘나머지는 쉴드락 가문만…….’

아르바흐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낀 쿠라그는 지긋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방패 문양이 양각된 자신의 명패를 손에 꼭 쥔 채로.

“쿠라그 쉴드락 네놈……!”

곧이어 그 사실을 눈치챈 구르드가 이를 악물었다.

“쿠, 라그…….”

아르바흐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 이름을 읊조렸다.

쉽게 자신의 편이 되어준 그.

자신만 믿으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가 바로.

자신을 노리던 울그바흐의 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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