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원탁회의 (2)
나타난 인영들을 향해 구르드가 일갈했다.
“웬 놈들이냐.”
“이 야밤에, 게다가 남의 집에 슬금슬금 숨어드는 녀석들이 할 말은 아니군.”
상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러자 아르바흐도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텅 빈 난쟁이 저택에 무장한 인간들이 있는 것도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럼 대화는 무의미해 보이는군.”
언뜻 봐도 난쟁이보다 커다란 상대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자 양측의 인원 모두가 무기를 앞으로 내밀며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 순간, 오로지 혼자만 팔짱을 끼고 있던 호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뇨. 대화로 충분합니다.”
“……?”
그 행동에 당황한 일행들이 주춤 물러나며 호진을 바라봤다.
상대 역시 예상치 못했던 듯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작 이거 하나 뒤집어썼다고 못 알아보다니, 섭섭한데요.”
호진은 뒤집어쓴 후드를 완전히 벗어젖혔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호진은 이가 보일 정도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
다음 순간 건물의 그늘 아래서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환하게 뜬 보름달이 익숙한 얼굴을 비췄다.
“귀공! 드디어 따라온 겐가!”
다니엘 에우리우스.
푸른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자, 호진의 스승인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에우리우스?”
용재와 도훈은 놀라기도 잠시,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말하자면 길지. 우선 안으로 들어오게.”
에우리우스는 호진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용재와 도훈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다.
이미 호진들을 알아본 기사단 측 사람들은 무기를 거둔 지 오래.
예은과 두 난쟁이도 어정쩡하게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특히 아르바흐와 구르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기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
“정말 귀공이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라는……?”
“네, 그렇습니다.”
아르바흐의 답을 들은 에우리우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진이 간단하게 아르바흐와 만난 이야기부터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아르바흐는 존재 자체로도 이미 혼란스러운 왕국을 완전히 뒤엎을 폭풍이었다.
이곳의 정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엔 호진이 에우리우스에게 물었다.
“이젠 저도 조금 여쭤봐야겠습니다. 무슨 연유로 여기 계신 겁니까?”
“그건 설명하기 쉽겠군. 우린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라네.”
“심사요? 도대체 얼마나……?”
에우리우스는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으며 답했다.
“한 달 가까이 되었지. 왕국 사정이 혼란한 탓에 원탁회의까지 기다리라고 하더군.”
“아…….”
호진은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리우스와 기사단은 호진보다 몇 주나 앞서 시칸을 건넜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지금쯤 이미 동부 왕국이나, 릴리온 성국에 도착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바룩크툼 왕국은 혼란하기 짝이 없는 정세였기에, 관문의 통과조차 쉽사리 못하고 붙잡혀 있던 것이다.
“원탁회의라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남았군요.”
“그렇지. 그래서 그동안 이곳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네. 이곳의 주인에겐 허락을 받았거든.”
“주인이요?”
호진의 물음에 에우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그림 브론즈비어. 여섯 가문의 가주이자 이 저택의 주인 말이네. 알고 찾아온 거 아닌가?”
“맞습니다. 지금 저희에겐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호진이 재차 묻자, 에우리우스는 곤란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흠……. 그는 지금 이곳에 없네만. 무슨 일인가?”
“그게 사실은…….”
호진은 아르바흐의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까지 에우리우스에게 털어놓았다.
지금은 그에게 숨길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에우리우스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간발의 차이로군. 그들은 이미 떠났다네, 귀공.”
“떠났다고? 어디로 말인가?”
구르드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르바흐에게 일이 쉽게 풀릴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던 만큼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어디로보다는 왜 떠났냐가 더 중요할 거요.”
에우리우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귀공도 알다시피 선대 브론즈비어 가주는 국왕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네. 그래서 지금의 가주 토그림 브론즈비어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았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 아르바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론즈비어 가주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의 부하들인 왕실근위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들이 모시는 왕과 함께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네.”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준비되지 않은 승계로 브론즈비어 가문은 혼란을 겪었다.
하물며 선대 가주와 함께 출전했던 병력들이 전멸했다.
여섯 가문이라 부르기엔 세력이 크게 줄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여섯 가문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들이 다른 가문들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가문 소속인 왕실근위대 하나하나가 다른 가문의 정예들보다 뛰어났으니까.
하나…….
“그때 나선 게 울그바흐였다네.”
왕위를 찬탈한 울그바흐는 돌연 군주제의 끝을 선언해버렸다.
강력한 왕정이 끝나자 세금은 자연스레 줄어들었고, 왕국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왕실근위대도 끈 끊어진 연 신세가 됐다.
브론즈비어 가문은 왕실근위대장을 역임해온 무가로, 비옥한 토지나 천연자원을 지닌 영토 따윈 없었다.
결국 근위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진 브론즈비어 가문은 한순간에 절벽으로 내몰렸다.
그들은 오로지 명예와 충성심만으로 집단을 유지해왔으나…….
“울그바흐가 며칠 전 그들에게 해체를 명령했다네.”
찬탈자라 할지라도 울그바흐는 왕위에 올랐던 자.
울그바흐가 왕위를 찬탈할 때 찬동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는 유일한 아울레의 핏줄이었다.
그 말은 즉, 그가 근위대와 브론즈비어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명분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명령을 받아들이고 이 땅을 떠나기로 결심한 거네. 듣기로는 동부 왕국으로 가서 용병이 되겠다더군.”
“그게 언제입니까?”
아르바흐가 황급히 물었다.
“사흘 정도 됐네.”
“사흘…….”
앞으로 원탁회의 시간까지 남은 것은 고작 일주일.
장소도 이곳 카라즈 안코르의 왕성이다.
먼저 간 토그림 브론즈비어를 따라잡고 다시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아르바흐는 짧게 탄식했다.
구르드도 안타까워했지만, 일단은 아르바흐를 위로했다.
“그래도 브론즈비어가 빠지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다섯 가문뿐이다.”
이미 그중 세 가문이 아르바흐의 편이었다.
충성스러운 브론즈비어 가문이 빠졌다는 사실은 아쉬웠지만, 과반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다.
다들 그 사실을 알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호진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갔다 올게.”
호진에게는 차원문이 있었다.
그가 간다면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에우리우스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귀공. 그건 어려울 걸세. 근위대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갈기갈기 찢어졌네.”
전성기에 비하면 수가 적다지만, 어떤 영주도 수백의 근위대가 뭉쳐서 자신의 영지로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흩어져서 바룩크툼 왕국 밖에서 모이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이동했다.
혼자서 그 그룹들 중 토그림 브론즈비어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호진도 그것까지는 예상치 못했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 모르기에 그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아무래도 어려울 듯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대로 원탁회의를 진행…….”
“대신 우리가 돕도록 하지.”
호진이 포기하려던 그때 에우리우스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에우리우스……?”
잠시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호진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30명이 넘는 기사단.
군마를 탄 그들의 이동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확실히 그들이 돕는다면 토그림과 근위대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왜?’
그들에겐 그럴 동기가 없기에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저희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에우리우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토그림이라는 친구가 마음에 들어서지. 힘든 상황에도 우리에게 흔쾌히 지낼 곳을 제공해줬으니까. 그리고…….”
에우리우스는 호진의 등을 팡 소리 나게 두들겼다.
호진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기침을 쿨럭여야 했다.
“귀공, 아니. 제자가 부탁하는데 이 정도쯤이야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호진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때였다.
아르바흐는 에우리우스에게 다가가 황금망치를 내밀었다.
“이건……?”
“그들에게 보여주시고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그대들의 왕이 그대들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전하도록 하겠네.”
에우리우스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왕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진심에 반응한 것이다.
다음날 해가 떠오르기도 전인 검푸른 새벽.
서른 명의 기수가 브론즈비어 가문의 저택을 빠져나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만약을 대비한 화살은 쏘아졌다.
남은 건 오로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뿐.
***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 지나갔다.
일행들은 왕성으로 향할 채비를 마치고 저택 앞에 모였다.
“이상하군.”
호진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아르바흐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잠시 말을 멈췄던 호진은 고민 끝에 생각한 바를 내뱉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네요.”
호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높이 솟은 왕성을 바라봤다.
늦건 빠르건 울그바흐와 그 부하들은 자신들이 이곳, 브론즈비어 가문 저택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한데 아무런 견제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롱비어드 가문에서 노골적으로 아르바흐를 제거하려 했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호진은 심각해지는 아르바흐를 보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실수했군.’
뭔가 찝찝하긴 했지만, 마땅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의구심을 가져서야 일이 잘될 리가 없었다.
호진은 아르바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르바흐는 고민하다 이내 호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저택의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올 때는 숨어들어왔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든 건 원탁회의에서 결정될 터.
아르바흐는 해가 내리쬐는 수도의 대로를 향해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구르드와 호진이 따르고 다시 그 뒤를 용재와 예은, 도훈이 따랐다.
그 기묘한 조합에 지나다니던 난쟁이들의 시선이 다가와 꽂혔다.
몇몇은 경계했고, 몇몇은 흥분에 차 수군거렸다.
이에 아르바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소문이 났군.’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왕자가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직 몰랐다.
그 어설프고 모자라 보이던 왕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아르바흐는 자신의 뒤에 걷고 있던 호진을 힐끗 바라봤다.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