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원탁회의 (1)
─똑똑
“들어오게.”
나무문 너머로 영주 오웬의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영주실의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영주실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무사히 돌아와 얼굴을 보니 좋군.”
오웬의 시선은 잠시 이오른을 훑고는 다시 아르바흐에게 향했다.
잠시였지만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이오른의 몸이 크게 떨렸다.
영주의 후계자가 허락도 없이 움직인 것은 분명 잘못이었기에.
“나갈 때와는 달리 한 명이 부족한데.”
“울그바흐의 대리인이라면 죽었습니다.”
아르바흐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 말에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그런가? 죽였다가 아니라?”
영주 오웬에게서 적대감이 피어올랐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적의에 아르바흐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감독관 둘 중 하나가 죽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시험은 탈락이다.”
영주의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에 아르바흐는 몸을 떨었다.
이거였다.
자신이 기억하던 롱비어드 가문의 영주가 가진 존재감과 무게.
그 앞에 서면 범인들은 감히 쉽게 입조차 열지 못하는 매서운 기세는 어릴 적 아르바흐가 가주를 피해 숨었던 그때와 같았다.
하지만 이젠 그때와 달랐다.
아르바흐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과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기에.
아르바흐는 자신을 불사를 준비가 되었다.
“물론입니다.”
아르바흐가 오웬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내며 그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잠시 오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오뉴월의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계속해봐라.”
아르바흐는 지하에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라진 난쟁이들.
갱도와 연결된 새롭게 발견된 공동.
그곳에 모여든 울그렉 이후트의 군대.
그리고 고대의 용 파르니르의 존재까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영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울그렉 이후트의 군대 이야기까지는 미동도 하지 않던 그 표정이 과하게 일그러졌다.
“광부들이 울그렉 이후트의 군대에게 당했다는 것까지는 믿겠다. 하지만…….”
오웬은 말을 끊고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갑자기 ‘인색한 죽음’이라니. 터무니없군. 기껏해야 떠올린 게 전설 속의 괴물인가.”
오웬은 앞의 이야기도 모두 거짓말로 치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아울레의 후손을 자처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녀석을 인정할 일은 없을 터이니.”
험악해진 분위기.
그곳에서 나선 것은 이오른이었다.
“모두 사실입니다. 가주님. 제 모든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감히!”
얼굴이 붉어진 오웬이 뇌성벽력과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오른은 그 모습에 오히려 기쁨을 느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모습은 노쇠한 그대로이지만, 이전의 모습과 기력을 되찾으셨다.
영주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엇인가 달라졌음을 느꼈지만 이제는 확실했다.
대리인이 자리를 오래 비웠기 때문이든, 아니면 그가 죽었기 때문이든.
오웬의 정신을 탁하게 하던 무언가가 한 꺼풀 걷어진 것이다.
이오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웬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가 드릴 말씀은 같습니다. 인색한 죽음. 그 저주받은 옛것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오른의 꺾이지 않는 기세에 오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얼굴에는 희미하지만 혹시나 하는 의심이 깃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호진은 인벤토리를 열어 검은색 조각 한 움큼을 집어 꺼냈다.
“직접 보시죠.”
“……?”
호진이 집무실 책상 위에 검은색 조각을 내려놓았다.
깨지고 부서진 검은색의 조각은 흑요석과 같은 광택을 내뿜었다.
잠시 그것을 살피던 오웬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장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까이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 표면을 튕겨 소리를 들었다.
당겨 탄력을 확인하더니 끝내는 망치를 꺼내 들고 내리쳤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 오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짜 고룡의 비늘이군.”
종종 산맥을 넘어오는 어설픈 용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거 딱 두 번의 출현만으로 왕국을 괴멸까지 몰고 갔던 진짜 용들.
그중 건국 설화에 나오는 검은 날개는 고룡이라 전해져 왔지만, 그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상상 속의 존재로만 취급될 뿐이었다.
“정말인가?”
검은 날개가 살아 돌아왔을 리는 없다.
녀석은 같은 신화 속의 존재에게 죽었으니까.
“고룡의 심장을 취하고 스스로 용이 된 자. 인색한 죽음 파프니르. 녀석이 돌아왔단 말인가?”
“이곳의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오웬은 잠시 책상을 짚고 섰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우선 한시라도 빨리 모두 영지에서 벗어나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와 동시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에 오웬은 멈춰 섰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용들에게 자비는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잔혹한 생명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물며 상대가 전설속의 고룡 파프니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에 호진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무찔렀습니다. 정확히는 패퇴……시켰달까요.”
“뭣……?”
오웬의 황당하다는 반응에 호진은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지만 믿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고작 3명이서 고룡을 무찔러? 발리스타나 쇠사슬도 없이?”
“정확히는 두 명입니다. 이오른 님은 기절하셨으니까요.”
호진의 말에 이오른은 얼굴을 붉히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웬은 기가 찬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를 들어서 어디부터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제가 막아서는 동안 아르바흐 님이 놈에게 고대의 맹약을 강제하셨습니다.”
“고대의 맹약이라…….”
잠시 고민하던 오웬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녀석을 막아선다니……. 대륙의 오강이라 불리는 이들도 그것은 불가능할 텐데.”
그때 호진은 오웬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파프니르의 비늘을 들어 올렸다.
이어 그것을 공중에 획 하니 던져 올린 호진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다음 순간.
─서걱
종이라도 자른 듯한 깔끔한 절삭음이 영주실에 울려 퍼졌다.
타자 위에 두 조각으로 양분된 고룡의 비늘이 타닥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고작 간단한 발도 한 번일 뿐이었으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고룡의 비늘을 벴다고?”
왕국의 보물 미스릴로 된 끌과 망치로 세공을 해도 깎아내는 게 한계인 고룡의 비늘이다.
그것을 벨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오웬은 난생처음으로 침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을 뭐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 보여드릴 건 이 정도뿐인데요. 원하신다면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대충 성 밖으로 나가서 산맥에 절 베기 몇 번 날려준다면 믿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호진은 몸을 틀었다.
하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됐네. 믿도록 하지.”
“……?”
호진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오웬이 있었다.
아까와 같은 적대감도 날카로운 기세도 없다.
황당함을 담고 있던 웃음은 어느새 기분 좋은 호쾌한 웃음으로 바뀌어 있다.
한참 웃음을 터트린 오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맑군. 정말 오래간만에 정신이 맑아.”
그렇게 말하는 오웬의 얼굴은 몇 년은 더 젊어 보였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주름은 인자하게 보였고, 고집스러워 보이던 눈빛은 시냇물처럼 맑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도대체 난…….”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 기억 속의 자신은 자신이 아닌 타인같이 느껴졌다.
“아르바흐. 내 형 에우두르 롱비어드는 무사한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다행이야. 조만간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오웬의 말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이곳에 포탈을 연결할 겁니다. 어렵지 않게 만나보실 수 있게 되겠죠.”
“고맙네.”
오웬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르바흐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철로 된 명패를 꺼내 내밀었다.
“아직 무릎은 꿇지 않겠다. 네가 왕이 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오웬은 명패를 아르바흐 손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롱비어드 가문은 앞으로 자네와 함께하겠네.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
이로써 세 개의 표를 얻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
한 가문의 지지만 더 얻어낸다면 원탁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멀기만 했던 목표가 이젠 손에 잡힐 듯 지척까지 다가왔다.
아르바흐의 심장은 복수심과 인내심이 뒤섞여 거칠게 뛰고 있었다.
***
난쟁이들의 수도 카라즈 안코르.
어둠이 내려앉은 밤을 틈타 이동하는 무리가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신호하자 다른 일행들이 으슥한 골목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행자 혹은 용병의 모습이었다.
그중 한 명이 눌러쓴 후드를 슬쩍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도착했네.”
호진의 중얼거림에 다들 슬그머니 후드를 당겨 눈앞의 저택을 눈에 담았다.
다른 영지의 영주성과는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그 규모나 화려함은 모자라지 않은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실근위대장 자리를 가문 대대로 역임해온 명문가 브론즈비어 가문.
이곳이 호진들이 택한 마지막 가문이었다.
나머지 두 곳은 이미 아르바흐의 삼촌 울그바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니까.
사실 선택지가 없었다.
“근데 우리, 왜 이렇게 몰래 온 거야?”
용재의 질문에 다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명 안 듣고 뭐 했냐.”
“어? 했던가?”
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 수도 카르즈 안코르는 울그바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이다.
원래 왕실이 관리하던 곳인 만큼 왕족인 그의 힘이 강한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 인간과 난쟁이의 조합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수도인 만큼 인간들도 꽤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잘될까요?”
“브론즈비어 가문은 대대로 왕실에 충성한 가문이다, 아르바흐.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아르바흐의 걱정에 구르드는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이에 아르바흐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저택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좋은 협상을 위해선 아르바흐가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았기에.
“누구 없습니까?”
아르바흐는 문을 두드리며 살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기다려도 답이 없자, 아르바흐는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아르바흐가 약간 힘을 준 순간,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려있는데요?”
“……이상하군.”
구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정이 넘은 지금, 문은 열려있고 경비는 없다니.
브론즈비어 가문쯤 되는 집안의 저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자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가 되고 있지 않은지 무성한 풀과 나무가 눈에 띄었다.
집안 곳곳을 밝히고 있어야 할 횃대도 모두 꺼져있는 상태다.
이런 모습에 일행들은 한층 더 긴장을 끌어올렸다.
아르바흐는 경계하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군대의 훈련장 같은 저택의 마당을 지나자 브론즈비어 가문의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의 문을 열기 위해 아르바흐가 다가서던 그때였다.
“숨어있는 분들은 모습을 보이시죠.”
호진이 신전과도 같이 세워진 자택 기둥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스슥
기둥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인영들이 무기를 뽑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