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시련과 증명 (5)
호진이 휘두른 검의 궤적.
세계를 가른 하나의 선으로부터 무채색으로 물들었던 세계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빛이 돌아오며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스르륵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고대의 숨결은 갈라지는 세계 앞에서 빛을 잃었다.
호진을 집어삼킬 듯 날름거리던 화염은 연기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불을 뿜어내던 용의 아가리만이 허전하게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색이 돌아오며 세상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멈췄던 사고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불을 뿜어내던 용은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멈췄다.
그러곤 이미 아무것도 뱉어내지 못한 입을 닫으며 눈을 데굴 굴렸다.
─울컥
그때 닫은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터져 나왔다.
단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 사이로 붉은 선혈이 왈칵왈칵 쏟아져 내렸다.
“───────!”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난 용은 고통에 찬 포효를 터트렸다.
벌어진 아가리 천장에는 깊게 새겨진 자상이 있었고, 그곳에선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호진의 일도(一刀)는 용의 숨결을 사그라트리고 나아가 녀석을 베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검을 휘두른 호진의 표정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죽을 상처로는 안 보이는군.”
아파 보이긴 한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
이대로는 녀석이 물러나게 하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상대를 물러나게 하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심어줘야 했으니까.
‘방금 같은 일격을 앞으로 한두 번 더 쓸 수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그동안 쌓아 올린 권능은 방금 한 번의 베기로 메말라버렸다.
남은 카드는 울타의 신력을 빌려 쓰는 것뿐이지만 그나마도 최근에 갈리온을 상대로 강신무를 벌인 탓에, 온전한 강신무는 불가능했다.
불완전한 강신무로는 턱도 없는 상대.
즉 이건 이미 승패가 난 거나 다름없는 싸움이다.
“크르르르르륵.”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공동에 낮게 울려 퍼졌다.
포효를 터트리던 용은 어느새 이글거리는 눈으로 호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선 노골적인 분노와 적대감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지가 먼저 공격해놓고선…….’
호진은 그 시선에 억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래도 방금의 일격이 위협적이긴 했는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녀석.
용은 호진과 거리를 둔 채 경계하듯 그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지만 호진은 도리어 옅게 웃어 보였다.
그것이 감정이든, 실력이든. 상태이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니.
그 미소에 깃든 여유로움은 한없이 편안한 것이었기에, 용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조금 더 벌렸고 한층 더 경계심이 짙어졌다.
호진이 자주 쓰는 블러핑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호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다행이지만.’
언제까지고 허풍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타개책을 찾아야만 했다.
위엄, 차원 이동문, 바실리스크의 송곳니와 아라크네의 주머니까지
호진은 자신이 들고 있는 스킬과 아이템들을 재빨리 머리로 훑었다.
몇 가지 대안이 떠오르기는 했으나 하나 같이 가능성은 희미해 보이던 그 순간.
─슥
경계하던 용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녀석의 표정은 경계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다시 희열로 바뀌고 있었다.
용이지만 눈과 비릿하게 찢어진 입매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슬슬 확신하고 있었다.
호진의 힘이 다했다는 사실을.
‘망했는데.’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하야를 소환해 기동성을 살려 녀석의 약점들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서 상처 입힌 부위에 바실리스크의 송곳니나, 아라크네의 독을 때려 박아보면 어떨까.
‘독에 내성은 없겠지? 있다면 의미가 없는데…….’
호진은 쓰게 웃으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정 안된다면 ‘차원 이동문’이라도 열어서 도망칠 것이다.
물론 무사히 도망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런 계획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조금 가벼워진다.
“하야.”
호진의 부름에 푸르스름한 빛무리 속에서 하야가 걸어 나왔다.
하야의 등장에 용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분명 비웃음의 의미일 것이다.
지룡(地龍)이라 불리지만 실제의 용과는 아득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저벅 저벅
하야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평소와 같이 덤덤한 태도로 호진의 곁에 섰다.
“고마워.”
낮게 중얼거린 호진은 하야의 위로 올라탔다.
서로의 고동이 두려움을 잠재워준다.
지척까지 다가온 용도.
호진도 서로를 바라보며 섰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의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한 난쟁이의 목소리였다.
“파프니르!”
“……?”
호진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던 집중력을 멈췄다.
뒤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이 아닌, 눈앞의 용이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선 황금색의 빛이 흘러넘쳤다.
아르바흐가 들고 있는 황금망치 크잣티라엘.
그 이명에 걸맞은 빛이 허공으로 번져나가며 어둠을 부수고 산산이 흩어졌다.
망치를 바닥에 짚고 곳곳이 선 아르바흐가 입을 열었다.
“고대의 맹언과 언약 아래, 그대가 무릎 꿇었던 이의 무기가 여기에 있다!”
아르바흐를 지켜보던 용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세로로 수축했다.
낮게 그르렁거리던 포식자의 목 울림도 멈췄다.
뭔가에 홀린 듯 굳어버린 용은 그저 멍하니 아르바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르바흐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용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 이름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네가 배신한 주인의 정통한 후계자이자, 이 무기의 정당한 주인이다!”
“─────!”
용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눈앞의 황금색 빛이 두려운 듯 고개를 낮추고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개와 같아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인색한 죽음 파프니르,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 내가 이곳에 섰다. 언약을 이행하라!”
“우오오오오오!”
아르바흐의 외침을 들은 용은 고통에 몸을 비틀더니 목을 빼고 포효했다.
그러자 공동을 뜨겁게 달구던 모든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마치 일행들의 횃대가 꺼졌을 때처럼.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린 용은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몸이 돌과 기둥에 부딪히며 공동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동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마지막 불꽃까지 꺼져버리며 공동에서 빛이 나는 건 망치의 빛뿐.
멀어진 용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끝……난 건가?”
호진은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난적에 죽음까지 각오했던 호진이기에 작금의 상황이 더 당혹스러웠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르바흐는 방금까지 위엄이 흘러넘치던 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그러곤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맹약을 지키진 않는군요. 대신 그것을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겁니다. 어째서 이곳까지 기어올라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자신의 레어에서 잠적할 테죠.”
“조금 이해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아르바흐의 말에는 호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와 내용이 담겨있었다.
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제야 아르바흐는 아, 하고 소리 냈다.
“제가 말씀을 드리다 말았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까라면 제가 말을 끊었을 때겠네요.”
아르바흐는 천천히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
오래전 울그렉 이후트에게서 난쟁이들을 해방하고, 왕국을 세운 아울레.
그에게는 한 명의 동생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파프니르라 했다.
형의 위명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용맹함과 뛰어난 무력은 형에 못지않았다.
울그렉 이후트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동쪽 산맥에서 넘어온 거대한 그림자가 산맥에 어둠을 드리웠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대의 존재이자, 신들이 빚지 않은 유일한 생명체.
고룡이었다.
검은 날개의 고룡은 거미 군단도 난쟁이들도 가리지 않고 불태우며 날뛰었다.
이에 아울레는 동생 파프니르에게 수백의 난쟁이를 이끌고 놈을 사냥하길 명했다.
파프니르는 수백의 군대가 전멸하는 치열한 사투 끝에 놈을 쓰러트렸다.
파프니르는 생각했다.
적이지만 굉장하다고.
놈의 힘만 있다면 울그렉 이후트는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을 거라고.
파프니르는 자신도 모르게 용을 동경했던 것이다.
용의 심장을 먹으면 용의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저주로 자아를 잃고 용의 노예가 되어버리기에 금기시되던 심장의 섭취.
파프니르는 젊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오만했다.
그는 끝내 심장을 삼켰고, 그 결과 하나의 도시가 그가 뿌린 재앙 아래 자취를 감췄다.
***
“그래서 맹약이라는 게 뭡니까?”
호진은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그 질문에 아르바흐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생각보단 단순한데…… 명예를 지키는 겁니다.”
“명예요?”
“파프니르는 아울레의 동생이자 근위대였습니다. 근위대들은 고대의 율법 아래 언약을 맺습니다. 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 왕국을 위해 헌신할 것. 스스로에게 명예로울 것.”
“지키지 못하면요?”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더군요. 아마 파프니르는 지난 수천 년간 고통받아왔겠죠. 방금은 언약을 직접적으로 거부하며 더 통증을 느꼈을 거고요.”
“……고통이라면?”
“창자가 녹아내리는 고통이라는데, 보통은 그걸 견디느니 자살한다더군요.”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무섭구만, 난쟁이들.’
듣다 보니 파프니르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전설은 거기까지입니다. 뒤로는 아울레에게 봉인이 됐다거나, 스스로가 잠에 들었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그리고 그 장소가…….”
“이곳 카락 아조그의 지하죠.”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일들이 납득이 갔다.
그러다 문뜩 호진은 탄식하며 손뼉을 쳤다.
“아, 이런. 아쉽군요.”
“예?”
“아울바흐의 대리인이 아르바흐 님 보는 앞에서 겁먹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요.”
“아!”
아르바흐는 이제야 자신이 시험 중이라는 게 기억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호진을 따라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렇네요. 조금 아쉽습니다. 시험을 통과하고 대리인 엉덩이를 걷어차 주려고 했는데요.”
“지금이라도 찾아볼까요? 엉덩이는 남아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좀…….”
호진의 농담에 아르바흐가 질겁하는 표정을 하기도 잠시.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덕에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일까.
둘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은 진정하고 쓰러진 한 난쟁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분은 어디까지 봤을까요?”
“글쎄요. 차마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 흠, 분명 파프니르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깨어계셨는데.”
“……부디 호진 님이 파프니르를 상대로 싸우는 곳까지라도 지켜보셨기를.”
롱비어드 가문의 후계자 이오른은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왕의 자격을 증명하던 시험.
감독을 하던 대리인이 죽었다.
이제 롱비어드 가문의 결정은 이오른에게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