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시련과 증명 (4)
세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 선 채 어둠을 응시했다.
어찌 된 일인지 호진의 감시자의 눈마저 이곳의 어둠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옆에 선 동료들과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뿐이었다.
그때였다.
대리인이 도망친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콰작
불쾌하고 익숙한 소리.
뼈와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였다.
‘한순간에 으깨졌다.’
작은 비명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게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공동에는 그 불쾌한 파열음이 작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대리인의 죽음을 알아챈 듯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공동에는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판단을 내린 호진은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입구의 위치라면 알고 있다.’
다만, 그 방향에는 대리인을 죽인 무언가가 있다.
분명 그것이 이오른이 말해준 수백 년이 넘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자, 눈앞의 거미 군단을 짓이긴 존재일 터.
호진은 우회하여 입구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벅 저벅
소리를 죽이며 걸을 수 있는 호진과는 달리.
중갑을 두른 두 난쟁이의 발걸음 소리는 공동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소리가 컸나?’
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지만, 어둠과 울퉁불퉁한 바닥이 조심히 걷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호진의 등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이렇게 긴장해본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라멜과 조우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호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 나가는 동안, 옆의 아르바흐는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긴장감으로 인해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자신이 내는 발걸음 소리가 너무나 신경 쓰였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아르바흐는 앞서가던 호진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자신의 신발을 벗어들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이 발을 찔러와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오른 역시 신발을 벗었다.
일행들은 최대한 숨죽이며 이동했다.
두 난쟁이의 발은 금세 흉터투성이가 됐지만, 오히려 마음은 가벼웠다.
이런 어둠 속에서라면 상대도 자신들을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걷던 중 앞서가던 호진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아르바흐는 망치를 꼭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멈추라고 하신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잠시, 아르바흐는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비린내와 악취.
거미들의 시체가 있던 공동의 중앙에서 멀어졌으니 그 냄새가 줄어들어야 하거늘, 조금도 줄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입구에 거의 다 도착했을 시점.
아까 전 입구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호진이 길을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그 순간 아르바흐의 발바닥에 축축한 액체가 닿았다.
온기가 남아있는 끈적거리는 액체.
아르바흐는 어렵지 않게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액체가 흘러온 방향에는 먼저 도망갔던 대리인이 곤죽이 된 채 으스러져 있었으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이곳은 입구가 맞다.
대리인은 입구를 향해 뛰어갔으니까.
그렇다면 왜 어디에도 입구가 보이지 않는 걸까.
그 대답 또한 간단했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입구가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구를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움직이며 입구가 드러났다.
그리고 아르바흐는 보았다.
검은색의 비늘이 뒤덮인 거대한 꼬리를.
끔찍할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입구를 코앞에 두고 세 사람은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두 난쟁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신호하면 입구로 뛰세요. 제가 시간을…….”
말하던 호진은 문뜩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쌍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색의 동공은 마치 파충류의 그것과 같았으며, 동공을 감싼 반달 모양의 홍채는 호박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에 호진은 욕을 삼키며 소리쳤다.
“뛰어!”
그 순간.
“──────!”
귀를 찢는 짐승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익숙한 창이 호진의 시야를 가렸다.
─띠링
「중급 내성이 드래곤 피어에 저항합니다.」
뒤를 돌아보니 그대로 얼어붙은 두 난쟁이가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경직된 그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망했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번쩍이는 빛으로 인해 눈이 저절로 다시 정면을 향했다.
“미치겠군.”
형형히 빛나는 호박색의 안광의 아래, 날카롭게 벼려진 이들 사이로 붉은색의 화염이 일렁였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잘 알고 있다.
“드래곤 브레스…….”
아르바흐가 딱딱거리는 이를 부딪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를 들은 호진은 역시라는 생각을 하며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한층 더 작열하며 타오르는 숨결.
금방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불꽃을 보며 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벌써 써야 한다니.”
호진은 어쩔 수 없이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공동에 쏟아졌다.
***
이글거리는 불꽃이 일렁이며 공동 전체를 환히 밝혔다.
놀랍게도 바위에 붙은 불은 꺼질 기세가 보이질 않았다.
도시만 한 공동이 활활 타올랐다.
작열하는 불꽃들로 인해 싸늘하다 못해 춥던 공동의 온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호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을 닦아냈다.
이것이 열기 때문에 나는 땀인지, 아니면 죽다 살아나 흘리는 식은땀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설마 범위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모래시계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공동의 끝까지 도망친 호진과 일행들.
만약 브레스의 범위가 조금이라도 더 넓었다면 그대로 죽었으리라.
호진은 고개를 들어 저 앞을 바라봤다.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 속에 검은색의 비늘을 지닌 괴물이 오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멀리 도망쳤는데도 그 외견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크기.
꼿꼿하게 솟은 뱀을 닮은 목과 불꽃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안광까지.
그것은 호진도 잘 알고 있는 용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저게 지금…….”
호진이 간신히 데리고 온 이오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는 드래곤 피어 때문인지 주저앉은 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끝인 건가……. 종말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종말의 예언? 저게 뭔지 아십니까?”
호진은 이오른의 중얼거림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하지만 이오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모두 죽을 거라며 읊조릴 뿐이었고.
대신 망치를 쥐고 일어선 아르바흐가 호진의 옆으로 다가서며 대답했다.
“빛을 삼키는 자. 종족의 배신자. 인색한 죽음. 저주받은 이름 파프니르.”
아르바흐는 굳건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지만 잘게 떨리는 수염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아르바흐는 두 눈에 신화 속의 존재를 담으며 말했다.
“불과 철의 여신은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찾아오리라. 심연의 구덩이에서 숨죽이던 그녀가 실을 타고 종말을 이끌고 온다. 종말의 기수. 저주받은 그 이름은 저주받은 파프니르일지니.”
호진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하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저놈이다, 그겁니까?”
“그럴 겁니다. 전해지는 외견도 그렇지만 바룩크툼 지하를 돌아다닐 용은 파프니르밖에 없으니까요.”
아르바흐의 대답을 듣던 호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공동은 거대하긴 하지만 녀석이 드나들 만한 입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파프니르는 사실…….”
“잠시만요.”
호진은 아르바흐의 말을 끊고 말했다.
다가오는 파프니르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설 속 괴물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혹시 약점은 없습니까?”
모든 전설 속 괴물들에게는 약점이 있다.
특히나 악으로 분류되는 것들에는 늘 퇴치되는 전승이 함께하고는 했다.
지금 호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정보였다.
하다못해 평범한 용들의 약점이라도 말이다.
호진의 질문에 아르바흐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를 떠올린 아르바흐의 눈에 광채가 떠올랐다.
그는 호진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5분만. 아니 그보다 짧게 하겠습니다. 호진 님.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예? 그건 조금…….”
호진이 뭐라 답하기도 전 아르바흐는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망치에 새겨진 문자들에서 황금색의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빛에선 신격이 느껴졌다.
처음 접하지만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느낌만으로 왠지 모르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난쟁이들의 여신 이자리온.
그녀가 분명했다.
‘강신은 아니고…… 일종의 힘을 빌려오는 형태인가?’
느껴지는 신격이 크지는 않았기에 의아했지만, 지금은 믿고 맡겨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아르바흐는 일종의 보험일 뿐, 호진이 베어 죽이면 그만이니.
호진은 고개를 돌려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은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브레스를 준비했다.
이제는 피할 곳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미리 끊어낸다.’
호진은 아끼지 않고 가장 자신 있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메노하바키리를 사용한 절 베기.
숙달된 동작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검집은 왼손에 가볍게 말아 쥐고, 오른손은 칼자루에 올려놓는다.
검집 안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예기를 응축시킨 기운이 느껴졌다.
호진은 그 모든 것을 찢어버릴 것 같은 기운을 재빨리 뽑아 휘둘렀다.
─카각
늘 기분 좋게 울리던 절삭음 대신 기분 나쁜 마찰음이 공동에 울려 퍼졌다.
호진이 쏘아낸 검기가 파프니르의 목을 때렸지만, 베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단지 그 비늘 일부만이 바닥에 떨어지며 후두둑 소리를 냈을 뿐이다.
브레스를 준비하던 파프니르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랐지만, 브레스를 멈추진 않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호진은 쓰게 웃으며 납도했다.
이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호진은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권능을 일깨웠다.
벤다는 것.
상대가 무엇이든 베어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권능.
그것이 물이든 불이든 혹은 그 무엇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심상 속 한 자루의 검이 형상을 이루었다.
이전과 같이 검(劍)은 푸른빛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다.
찾아 헤맨 끝에 깨달은 자신의 본질인 뭉툭한 형상의 검.
그것을 움켜쥔 호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덧 파프니르는 자신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반면 무채색으로 물든 세상은 더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 후끈한 열감에도 왠지 마음이 차분했다.
베지 못하면 죽는다는 단순한 결과 때문인지, 손에 쥐어진 검에서 느껴지는 전능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내리그었다.
다음 순간 세계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