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시련과 증명 (3)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다음 날, 이른 새벽.
대리인을 비롯한 호진의 일행들이 철광산 앞에서 모여들었다.
산맥의 아래로 이어지는 이 지하 광산은 롱비어드 가문이 지닌 가장 큰 광산이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지난밤, 일행들이 머무른 방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은 비좁은 방이었다.
그럼에도 아르바흐는 내색하지 않고 대리인을 향해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군요.”
대리인은 그리 답하면서도 속으론 당황을 느꼈다.
그가 아는 왕자였다면 의기소침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불평을 토하거나 분노했어야 한다.
한데, 눈앞의 왕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다.
‘뭔가 잘못됐다.’
어제도 그랬다.
늘 왕자 대신 나서던 구르드가 왕자와 자신의 대화에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오직 왕자가 이야기를 주도하며 자신과 대립했다.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왕자는 변했다.
소심하고 옹졸했던 그릇이 몰라보게 커졌다.
‘이게 왕의 핏줄이라는 건가.’
대리인은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했다.
‘모든 건 울그바흐 님을 위하여.’
각오를 다진 대리인이 앞장서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시죠.”
“좋습니다.”
아르바흐와 호진이 그 뒤를 따라 광산에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려 주시오!”
오웬의 아들이자 롱비어드 가문의 후계자, 이오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다들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이오른은 준비해온 도끼를 꺼내 들며 말했다.
“나도 함께 가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리인이 미간을 모으자, 이오른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가문의 미래가 달린 일이오. 그 평가를 어찌 다른 이들의 손에만 맡기겠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요.”
“……그러시죠.”
대리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른의 주장이 정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오른은 도끼를 꼬나 쥐고는 몸을 돌려 나아가는 대리인을 응시했다.
‘의심스러워.’
어제 이오른은 큰 아버지인 에우두르 롱비어드의 생존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이오른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구한 날 다퉜지만, 실은 서로 늘 의지해왔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한데 돌아온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쯧. 그놈이 살아있었다고…….’
마치 원수가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듯한 반응.
탁한 눈동자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일렁였다.
그 반응에 이오른은 뭔가가 크게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저 기력이 쇠하셨다고 여겼거늘…….’
지금의 가주는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버린 것 같다.
언제부터 그랬나, 고민해 보면 왕과 왕자가 사라진 그때 이후부터 뭔가 이상했다.
그 말은 즉, 울그바흐의 대리인이라는 저자가 오고 나서부터기도 했다.
대리인이 이곳 카락 아조그에 온 것이 그 무렵이었으니까.
평소엔 아버지와 평범하게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할 뿐이라 의심치 않았지만, 이번에 왕자가 온 이후로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행동했다.
‘내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하리라.’
그 말 하나만큼은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러 나온 말이었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요. 이제 정말 출발하시죠.”
호진이 기다리기 지쳤다는 듯 앞장서서 광산으로 들어섰다.
새로운 시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성장한 아르바흐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호진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
광산은 얼마 전까지 활발하게 채굴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잘 관리되어 있었다.
광물을 실어 나르는 수레부터 천장에 박힌 빛나는 수정구까지.
이곳에 놓인 모든 것들을 당장 사용해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뿐.
“조용하군요.”
늘 벽을 뚫고 금속을 캐는 소리로 가득했던 광산은 이제 적막만이 흐른다는 사실.
아르바흐는 광산의 울퉁불퉁한 벽면을 쓸어내리면 낮게 중얼거렸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이오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광부 팀 하나가 통째로 실종됐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나선 용병들도 자취를 감췄고요.”
밝혀진 것만 해도 30명에 가까운 난쟁이들이 사라진 거다.
그런 큰 사건에도 의외로 영지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영주가 무능하기 때문이었다.
영주 오웬은 추가적인 조사단을 파견하는 대신 광산을 폐쇄했다.
그저 사건을 덮고 묻어버리며 외면한 것이다.
영지 내에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상처를 덮어두면 안에서 곯고 썩을 뿐이거늘…….’
이오른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저히 아버지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래도 다행이군.’
어떻게 해결할지 한참을 고민했는데, 이처럼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만약 이번 기회에 광산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롱비어드 가문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시기다. 저주받은 옛것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어.’
이런 시기일수록 강력히 뭉쳐야 하는 왕국의 힘은 점점 분산되어만 간다.
나무를 보다가 자칫 숲이 타버리는 것을 못 봐서는 안 된다.
가문과 영지는 나무다.
왕국이라는 숲이 없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이오른은 왕국에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꼭 아르바흐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르바흐라서 안 될 것도 없었다.
이오른은 차라리 아르바흐가 왕국과 영지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쪽으로 오시죠. 조금만 더 가면 작업하던 난쟁이들이 실종된 곳이 나옵니다.”
이오른은 길을 안내하면서도 계속해서 대리인의 안색을 살폈다.
이것은 아르바흐의 자격시험인 만큼 대리인이 꺼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 대리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런 이오른을 내버려 뒀다.
이오른은 그런 대리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르바흐도 고민에 잠겼다.
‘알려줘도 문제가 없다는 건가.’
아르바흐는 대리인의 침묵이 오히려 더 거슬렸다.
짖어대는 개는 물지 않는다.
정말 무는 개는 조용히 기회를 노릴 뿐이다.
지금의 대리인처럼.
‘때가 되면 이를 드러내겠지.’
뭔지는 몰라도 대리인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놓을 수 있는 때를.
“보고에 따르면 이 근처입니다. 조사단도 이곳을 넘어가 연락이 끊겼죠.”
이오른이 멈춰 서며 말했다.
그곳엔 미쳐 실어 나르지 못한 광석들이 수레에 실려 있었고, 채굴 도구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순식간이었나 봅니다.”
아르바흐가 떨어진 곡괭이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곡괭이에는 거무죽죽한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게 물든 흙바닥의 피는 꽤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거나 다쳤음을 의미했다.
다만, 시체가 하나도 없었는데,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사고가 아닙니다. 뭔가가 있어요.”
뼈나 옷가지는 없으니, 이곳에서 먹어치운 것은 아니다.
나중에 먹기 위해서든 아니면 노예가 필요했건 난쟁이들을 옮긴 것들이 존재한다.
“이제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지도에 따르면 이곳은 막다른 곳이어야 하지만, 갱도는 계속 이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있는 갱도.
그곳에는 빛나는 수정구도 횃불도 없기에 어둠만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전까지와 달리 벽면이 균일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는데, 이는 이 갱도를 뚫은 것이 적어도 난쟁이들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르바흐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티 내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에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이자 역할이다.
겨우 이곳에서 겁먹고 물러선다면, 지금이라도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으리라.
그렇기에 아르바흐는 망치를 꼬나 쥐며 걸음을 옮겼다.
미지의 존재가 기다리고 있는 어둠을 향해서,
호진과 대리인, 그리고 이오른은 횃대를 든 채로 그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
─저벅 저벅
깊은 어둠 속 작은 불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이 약해졌습니다.”
“산소가 부족하거나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요?”
호진은 갑자기 줄어든 빛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오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난쟁이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횃대의 불이 약해진다면 도망쳐라. 빛조차 집어삼키는 어둠이 온다.”
“어둠이요? 그게 뭡니까?”
“저희도 모릅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광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오른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뭔가를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아직도 갱도에서 불빛이 약해지면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고 물러납니다.”
“그럼 이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겁니까?”
“정말 깊게 판 갱도에서는 종종이요. 하지만 이상하긴 하네요. 겨우 이 정도 깊이에서는 처음이라…….”
호진이 이오른의 말을 곱씹던 그때, 앞서 걷던 아르바흐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공동입니다.”
아르바흐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 그곳에는 거대한 공동이 존재했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깊은 어둠이 깔린 거대한 공간.
“지하에 어떻게 이런 공간이…….”
이오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시 아래에 이만한 공동이 있다는 사실을 그도 전혀 몰랐다.
그 순간 아르바흐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지만 공기 중에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스쳤다.
“따라오세요.”
아르바흐는 망치를 강하게 움켜쥔 채 공동의 중심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 냄새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아르바흐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희미한 횃대에 비친 광경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기에.
“저번에 봤던 녀석들이네요.”
호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단단한 껍질 하나를 주워들며 말했다.
여덟 개의 발을 지니고 실을 타고 이동하는 괴물.
울그렉 이후트의 자식과 그녀의 군대.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의 괴물들의 잔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처참히 짓밟힌 듯 완전히 으스러진 채로.
“이건…… 도대체?”
그때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대리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미친 것처럼 중얼거리던 대리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자신하더니, 함정이라고 준비한 게 이거였나 봅니다.”
수백 마리의 거미 군대.
확실히 상대하기 쉽진 않지만, 호진과 아르바흐에겐 큰 위협이 될 수 없는 함정이었다.
“도망가게 둘 수는 없죠. 잡아 오겠습니다.”
호진이 그 뒤를 쫓으려던 때였다.
─후욱
그들이 들고 있던 횃대에 빛이 아예 사라졌다.
네 개의 횃대가 동시에.
심상치 않은 기류에 호진은 대리인의 뒤를 쫓는 대신 아르바흐의 옆을 지켰다.
어둠속 아르바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진 님, 아까 전 이오른 님이 해주신 이야기 뒤엔 한 구절이 더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호진이 되묻자 이번에는 이오른이 읊조리듯 말했다.
“횃대의 불이 꺼졌다면 절망해라. 그가 이미 이곳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