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시련과 증명 (2)
─쿵쿵
이오른이 단단히 닫힌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힘없는 대답이 들렸다.
“……들어와라.”
그 목소리를 들은 아르바흐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기억하던 강인한 가주의 음성과 너무나 달랐기에.
이오른은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에 따라 영주의 집무실 안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무기들과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벽면을 가득 채웠고, 탁자 위에는 무기의 장치와 도면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집무실이라기보다는 대장간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가주님. 아르바흐 왕자님과 스틸하트 가문의 구르드 님이 방문하셨습니다.”
“…….”
집무실 의자에 앉은 영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일행들의 얼굴을 살폈다.
대답 없이 그들의 면면을 지긋이 응시하는 영주.
이에 아르바흐는 한 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롱비어드 가문의 주인에게 인사드립니다.”
“……아르바흐.”
가주의 시선과 아르바흐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에 아르바흐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흠칫 떨었다.
탁한 눈동자, 주름진 피부,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과 수염.
모든 게 자신이 기억하던 롱비어드의 가주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롱비어드의 가주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건방지구나. 아울레의 이름을 대다니. 그 이름을 댈 수 있는 건 오로지 왕위에 오른 자들뿐이거늘.”
가주의 말에 아르바흐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선대 생전에 자신은 아달바흐의 아들 아르바흐였다.
하나, 선대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그렇기에 왕을 상징하는 호칭 ‘아울레’는 자신이 이어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롱비어드의 가주는 그의 자격을 대놓고 부인하고 있었다.
“가주님!”
그의 아들 이오른은 그런 가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조차 구르드의 노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웬 롱비어드!”
벼락같은 노성을 내지른 구르드가 도끼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네놈이 노망이 단단히 들었구나! 감히 어느 앞이라고!”
평소에는 아르바흐를 잔소리로 달달 볶는 구르드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아르바흐의 정통성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아르바흐는 소중한 제자이자, 정통한 왕의 후계자였기에.
일촉즉발의 상황, 긴장이 고조된 그때.
목소리를 낸 건 다름 아닌 아르바흐였다.
“멈춰주세요. 스승님.”
아르바흐의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오웬 님의 말씀도 틀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왕국에는 왕이 없으니까요. 아울레의 이름은 잠시 넣어 두겠습니다.”
“…….”
구르드는 이를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았지만, 뒤로 물러났다.
간단히 소란을 정리한 아르바흐.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롱비어드의 가주, 오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했구나.”
“변해야만 했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요.”
아르바흐가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당당하고 여유가 담긴 태도에 오웬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탁해진 눈 사이로 옅은 빛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아르바흐는 용건을 꺼내 들었다.
“제가 오웬 님을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원탁회의에서 저의 승계권을 지지해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것이 왕국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아르바흐의 대답에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오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봐라.”
다 됐다.
이 정도 태도면 설득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야기를 납득만 시킨다면 부족한 것은 거래와 타협을 통해 넘어갈 수 있었다.
아르바흐가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려던 그때.
“기다려주시죠.”
한 난쟁이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곤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실링으로 봉인된 양피지를 꺼내 보였다.
그 편지에 새겨진 망치 문양은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그야 왕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문양이었으니까.
아르바흐가 없는 지금 그 문양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울그바흐뿐이었다.
“울그바흐 님의 이름으로. 왕국에 혼란을 야기하는 아르바흐 님의 거짓된 주장을 지탄합니다.”
“…….”
아르바흐는 조용히 사태를 파악했다.
‘빠르다.’
자신의 등장이 벌써 울그바흐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 대응 속도는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르바흐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삼촌께선 실종된 조카가 돌아왔는데, 달리 할 말이 그것밖에 없으시답니까?”
“……물론 울그바흐 님은 아르바흐 님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 돌아오시자마자 이렇게 왕국의 평안을 깨트리려 하시니 그것을 걱정하시는 것이지요.”
울그바흐의 대리인은 아르바흐의 기세에 살짝 기가 죽어 한발 물러났다.
아르바흐는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일갈했다.
“삼촌께는 제가 조만간 찾아뵙지요. 지금은 저와 롱비어드 가주님이 대화 중이니 물러나 주시죠.”
“……그럴 수는 없겠는데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르바흐의 음색에 분노가 깃들었다.
반면 울그바흐의 대리인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며 답했다.
“그럴 수는 없겠다고요.”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아르바흐가 사나운 기세를 일으키려던 그 순간, 오웬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오웬은 쿨럭 기침을 터트리고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만하도록. 이쪽은 울그바흐의 오랜 충신이자 나의 벗이네. 그도 자네의 이야기를 함께 들을 게야.”
“……알겠습니다.”
아르바흐는 기세를 가라앉히며 대리인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가주의 반응이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리인은 어느새 일행들을 지나쳐 오웬의 옆에 섰다.
마치 오웬의 가신처럼 말이다.
그 태도와 행동이 거슬렸지만 아르바흐는 준비해온 말을 시작했다.
울그렉 이후트가 깨어났으며, 그를 막기 위해선 왕을 다시 세워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울그바흐의 배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건,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아르바흐의 주장이 자칫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집안싸움으로 변질되어 보일 수도 있었기에.
롱비어드 가문의 가주 오웬은 그런 아르바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군. 그럼 우선 원탁회의에…….”
“잠시만요. 가주님.”
그때 말을 끊은 울그바흐의 대리인이 무언가 가주의 귀에 속삭였다.
이에 아르바흐가 인상을 쓰며 따져 물으려던 순간, 가주가 말을 정정했다.
“……생각해 보니 일리는 있지만 증거가 없지 않나. 아르바흐, 울그렉 이후트가 깨어났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있나?”
“…….”
아르바흐는 답할 수 없었다.
황금 망치는 그의 손에 들려있지만, 울그렉 이후트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네가 왕이 되면 울그렉 이후트를 물리칠 수 있다는 근거는 있나?”
“그것은…….”
아르바흐는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본인조차도 울그렉 이후트를 처치할 방법이 없어 호진에게 기대고 있다.
차마 가주에게 당당히 ‘내가 해낼 수 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 망설임을 틈타 대리인이 말했다.
“오웬 님, 그렇다면 시험을 내려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시험?”
“얼마 전에 지하 광산의 일로 골치를 앓지 않으셨습니까.”
“지하 광산?”
오웬이 고개를 갸웃하자 대리인은 재차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아아, 그랬지. 맞아. 지하에 광부들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지.”
오웬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 눈은 한층 더 탁해 보였다.
“그대에게 시험을 내리도록 하지, 아르바흐. 지하 광산의 문제를 해결해 보거라. 만약 잘 해결한다면 자질을 인정하고 원탁회의에서 표를 고려해보마.”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르바흐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 분명하겠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진 몰라도 오웬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결국 대리인이 원하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갔으니, 함정이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르바흐는 그 시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그 외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시험이니만큼 아르바흐 님 혼자 힘으로 해결하시죠. 감독으로는 저와 그쪽 일행들 중 한 분이 함께하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이곤 일행들을 돌아봤다.
그러곤 호진과 시선을 교환한 후 답했다.
“이분이 감독해 주실 겁니다.”
“……구르드 님이 아니라 이 인간이 말입니까?”
대리인이 처음으로 당혹스럽다는 듯 답하자, 아르바흐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답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꼭 구르드 님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 아무래도 말에 무게가 있는 사람이 감독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여.”
“이분은 시리온 공국의 왕이신 호진 님입니다.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시리온의 왕이라니, 무슨? ……실례했습니다.”
대리인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이지만 낭패라는 표정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구르드와 함께 자신을 처리할 생각이었을 터다.
‘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런 녀석을 보며 아르바흐는 속으로 냉소했다.
자신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어찌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좋습니다. 제 자리를 걸고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린 호진이 어깨를 으쓱하면 답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르바흐는 옅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여유 있는 자신의 새로운 스승이자 동경의 대상.
호진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부웅
별빛을 머금은 황금빛 망치가 공기를 찢으며 휘둘러졌다.
가파른 호흡과 구슬진 땀이 아르바흐의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망치는 멈출 줄 몰랐다.
오래도록 단련해왔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난 정말 강해진 걸까?’
대련 상대를 해주는 호진은 아르바흐가 강해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늘 여유롭게 자신을 상대하는 호진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
─탁
아르바흐는 누군가가 던진 물병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스승님.”
아르바흐의 인사에 구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쉴 땐 쉬어야 한다. 아르바흐.”
“죄송합니다. 불안해서 그만…….”
아르바흐는 망치를 내려놓으며 땀을 훔쳤다.
내일이 바로 시험이었다.
머리로는 오늘 같은 날 푹 쉬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조급한 마음이 수련을 강제했다.
스승의 일갈이 떨어질 거라 생각한 아르바흐는 지레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구르드가 그에게 말했다.
“망치를 들어라. 아르바흐.”
“예? 그게 무…….”
말이 끝나기도 전 별빛 아래 검은색의 그림자가 내달렸다.
검은색의 화살처럼 쏘아진 신형이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다.
─까앙!
아르바흐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그 공격을 막아냈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호진과의 대련을 떠올리면 충분히 막을 만한 공격이었다.
“스승님?”
“…….”
아르바흐는 갑작스럽게 공격해온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허나, 구르드는 대답 대신 가만히 검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구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최선이었다.”
“…….”
짤막한 말이었지만, 아르바흐는 그 말에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넌 충분히 강해졌다. 자신감을 가져라.”
아르바흐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토록 넘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벽을 어느새 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입을 열지 않고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하늘에 수놓은 별들이 시리도록 눈부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