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시련과 증명 (1)
“흐음.”
쿠라그는 낮게 신음하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적막함이 감도는 홀에는 오로지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
아르바흐는 의연한 표정으로 쿠라그를 바라봤다.
물론 속으로는 초조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제발…….’
아르바흐는 쿠라그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울그바흐의 역모와 왕의 죽음.
그 배후에 있는 울그렉 이후트의 존재까지.
남은 건 쿠라그의 선택뿐이었다.
수염을 쓸어내리던 쿠라그의 손이 멈췄다.
“흠.”
그는 자신의 잔에 손을 뻗더니 미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쿠라그가 아르바흐를 바라봤다.
“증거는 없다 이 말이지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좋습니다.”
“예?”
황급히 대답하던 아르바흐는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쿠라그를 바라봤다.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 쿠라그 쉴드락. 왕자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아르바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간신히 지켜오던 평정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쿠라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국정이니 원탁회의니 머리 아픈 것은 질색입니다. 제 임무는 관문을 지키는 것, 그것뿐.”
쿠라그는 목에 걸린 철로 된 명패를 식탁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명패에는 쉴드락 가문을 상징하는 방패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여섯 가문의 일원, 쉴드락 가문은 원탁회의에서 왕자님의 승계를 지지하겠습니다.”
“……!”
됐다.
아르바흐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려 구르드를 바라봤다.
구르드는 그것 보라는 듯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쿠라그의 대답이 구르드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고맙습니다. 쿠라그!”
“별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아닙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왕국은 살아남게 될 겁니다.”
아르바흐는 진심으로 쿠라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가 쿠라그의 손을 맞잡자, 쿠라그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이걸로 표는 두 개가 모였군요.”
“왜 두 개죠?”
흥미롭다는 듯 경청만 하고 있던 호진이 손을 들어서 물었다.
이에 쿠라그가 무슨 질문이 그러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나는 제 표고, 다른 하나는 원래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때.
─탁
철로 된 명패 하나가 식탁 위로 놓였다.
명패에 조각된 것은 사냥당하는 용의 형상.
그것의 주인은 다름 아닌…….
“구르드 스틸하트.”
아르바흐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지 개척자 스틸하트 가문의 가주이자, 용 사냥꾼들의 전 단장이시죠.”
설명을 듣던 구르드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했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쿠라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구르드 님이 사라지시고 지금까지 스틸하트 가(家)는 원탁회의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주님이 살아계실 거라 굳게 믿고 있더군요.”
“흑노(黑弩)의 구르드가 쉽게 죽을 리가요. 제 스승님은 살아 있는 전설이신걸요.”
“……그만해라, 아르바흐.”
구르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험악하게 말했다.
그가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풉.”
“하하하하!”
구르드는 끄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은 책상 위에 왕국 세력도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선은 원탁회의에서 저를 지지해 줄 가문들을 골라야 합니다.”
아르바흐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며 회의를 주도했다.
원탁회의에 참가하는 가문들은 총 여섯 개.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 가문들을 일컬어 여섯 가문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중 두 가문.
쉴드락과 스틸하트 가문의 표는 얻은 상태.
과반을 만들기 위해선 앞으로 두 가문을 더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실버핸드와 그레이고트 가문은 울그바흐에게 붙었습니다.”
“예전부터 동부왕국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산양 기사들을 배출하던 걸출한 가문들이지. 하지만 최근엔 입지가 많이 약해진 만큼 울그바흐에게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을 거다.”
“입지가 약해졌다라……. 어째서 그렇죠?”
무기들이 발달해 감에 따라 산양 기사들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그렇다 쳐도, 건축과 야금에 일가견이 있는 종족인 드워프에게 교역과 외교는 중요한 일일 터. 그런 역할을 전담하는 가문들의 입지가 약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동부왕국과의 교역이 단절됐기 때문이지.”
쿠라그의 말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장인의 민족답게 시대에 적응할 기술이 없는 가문들은 입지가 쉽게 흔들리는 모양이다.
아르바흐는 쓰게 웃으며 세력도 위에 남은 두 가문을 가리켰다.
“선택지가 적어서 좋네요.”
마이스터 롱비어드.
왕국의 검 브론즈비어.
아르바흐는 괜히 자신들이 공략해야 하는 가문들의 이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두 가문의 가주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아르바흐가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두 가문 모두 왕국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가문으로, 몇 번 본적은 없지만, 그때마다 두 가문의 가주들은 아르바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곤 했다.
가주의 자리에 걸맞은 존재감을 지닌 이들의 눈총에 아르바흐는 한층 더 쭈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떤 부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이 그들을 설득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불안과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왔으나, 아르바흐는 이를 악물며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닌 해야만 했다.
그가 왕좌를 되찾지 못한다면 왕국은 이곳에서 끝이었으므로.
아버지가 희생하여 남겨준 기회다.
반드시 해내겠다고 다짐한 아르바흐는 망치를 어깨에 걸치며 일어섰다.
“가시죠.”
다음 행선지는 쉴드락 영지와 가까이 있는 마이스터들의 도시.
“‘카락 아조르’로.”
***
─까강 캉
도시 전체에 쉴 새 없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규칙적인 풀무질에 화구가 거칠게 불을 뿜어내고, 끄집어내진 금속들은 장인들의 망치질에 제 모습을 찾아갔다.
도시로 발을 디딘 호진의 얼굴로 후끈한 열풍이 와 닿았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방 같네요.”
호진의 순수한 감탄에 난쟁이들은 하나같이 뿌듯해했다.
자신들의 도시나, 가문이 아닐지라도 난쟁이의 기술력은 그들의 오래된 자랑이었다.
“여기는 외곽에 불과합니다. 진짜배기들은 안쪽에 있죠.”
아르바흐가 웃으며 앞장섰다.
일행들이 가야 할 곳은 도시의 최심부에 위치한 롱비어드 가문의 공방이다.
다른 가문들과 달리 공방은 그들의 집이자 터전이었으니까.
그곳으로 향하는 중, 길거리에 있는 온갖 화려한 물건들이 호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골렘부터, 거대한 쇠뇌 그리고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까지.
역시 이곳의 기술력 차이는 국가마다, 분야마다 가지각색이었다.
‘골렘이 있는데, 총 한 자루가 없다니.’
드워프 기술의 방향성에 호진은 혀를 내둘렀다.
당장 시리온 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증기기관이나 마력으로 구동되는 생활용 기계 장치들이 도시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하긴, 고대신의 사도가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검기와 마법을 쓰는 세상에서 총은 좀 약하지.’
마법으로 대량의 적을 사살하고, 검으로 성문을 부수는 이곳에서 화기는 그 필요성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만약 총기가 발달했다면 이런 멋진 것들도 못 봤겠지.’
호진은 난쟁이들이 벼려낸 무기들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나하나가 예술품에 가까운 품질과 아름다움을 지녔다.
마음 같아선 하나하나 들고 휘둘러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기에 그런 욕구를 꾹 눌러 담아야 했다.
그렇게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롱비어드 공방입니다.”
아르바흐는 입구에 조각된 모루와 망치 모양 표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긴장된 듯 목울대가 잠깐 울렁인 아르바흐.
그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공방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일행들은 그 뒤를 조용히 뒤따를 뿐이었다.
“어이, 잠깐.”
공방에 들어선 지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누군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난쟁이 하나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어딘가 익숙한 붉은 수염의 난쟁이는 호진을 비롯한 인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경계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롱비어드 가문의 공방이오. 외부인은 출입이 불가능하지.”
“아, 저희는…….”
아르바흐가 입을 열려던 그때 호진이 갸웃하며 말했다.
“에우두르?”
저녁의 석양 색을 닮은 불타는 듯한 붉은 수염.
난쟁이치고는 넉살 좋아 보이는 눈빛까지.
스스로를 최고의 마이스터라 부르던 에우두르와 똑 닮아 있었으니까.
그 이름을 들은 상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떡 벌렸다.
그러기도 잠시, 들고 있던 망치를 내던지며 호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은 거요?”
“……에우두르가 아니군요.”
호진은 그의 수염을 살폈다.
에우두르가 5개의 반지 모양 장신구를 수염에 끼고 있던 반면, 그는 3개뿐이었다.
호진의 반응에 아르바흐와 구르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아니죠. 누가 봐도 훨씬 어려 보이지 않습니까.”
“자네는 눈썰미가 형편없구만. 사과하는 편이 좋네.”
“…….”
호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똑같이 생겼는데…….’
억울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일행들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헷갈렸던 모양.
아마 외국인을 만나면 다 비슷해 보이는 것과 같은 듯했다.
어쨌든 세계 어디에서나 그렇듯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닌지, 아르바흐와 구르드가 황급히 타박했다.
이에 호진이 사과하려 하자,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다급히 되물었다.
“나는 에우두르의 조카 이오른이오. 그러니 답해주시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은 거요.”
자신을 이오른이라 소개한 자의 눈이 가늘게 떨려왔다.
이에 아르바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진정하십시오. 이오른. 내 이름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당신의 큰아버지 에우두르는 살아계십니다.”
“아르……바흐? 그렇다면 저희 큰아버지가 정말……?”
“살아 계십니다. 아울레의 이름에 걸고.”
아르바흐에게 확언을 들은 이오른은 천천히 몸을 수그려 무릎을 짚었다.
“살아 계셨군요. 큰아버지…….”
왕자와 함께 사라진 왕국의 수석 마이스터, 에우두르 롱비어드.
롱비어드 가주의 형이자, 자신의 큰아버지인 그가 살아 있었다니.
아버지가 안다면 굉장히 기뻐하실 터.
최근 생기를 잃어버리신 아버지가 활력을 되찾을 게 분명했다.
이오른은 감정을 추스르곤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가주님에게 모시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르바흐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 세 번째 표를 모아야 할 시간이었다.